코로나 극복 일등공신, 의료보험 (2) 전 국민 건강보험 초석 깔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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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가 집필한 책 ‘한국의 사회보험, 그 험난한 역정’(코리안 미러클 5)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 2019.3, (주)나남>을 토대로 작성된 것임을 밝혀둡니다. |
근대 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서구 선진국에서 맨 먼저 도입된 사회보험제도는 건강보험이다.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권리 가운데 하나인 ‘질병으로부터의 보호’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우선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역시 그런 시각에서 사회보험제도가 연구되고 정책이슈로 검토됐다. 특히 60년대에 추진된 1~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서 국민소득 향상은 물론 산업화에 따른 빈부격차, 농촌문제, 노동자 문제 등 사회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박정희 정부는 1972년 10월 유신체제로 이행하면서 ‘유신 반대’의 사회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사회보장 확대 정책이 절실했던 터였다. 그런데 여러 가지 사회보험제도 가운데 무엇을 먼저 추진해야 하는가의 우선순위 논란에 직면했다.
보건사회부 등 사회문제를 다루는 부처에서는 의료보험이 우선이었지만 경제기획원을 비롯한 경제부처에서는 국민연금제도의 도입을 우선시 했다. 당시 국민연금제도를 시행하면 당장의 지출은 발생하지 않는 반면 곧바로 연금 보험료가 걷히기 때문에 기금이 쌓이게 된다. 이를 경제개발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들이 많아 경제부처에서는 국민연금 추진을 우선시했다. 물론 순수한 국민복지 향상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라는 반론도 없지 않지만 당시의 한국경제 형편으로 보아 내자조달의 필요성이 무엇보다 우선하는 절박한 정책목표였음은 분명했다.
“4계획에 반영하라” 박대통령 특별지시로 77년 당연(강제)적용 의료보험 실시
그런 논란을 거쳐 1972년 말 국회에서‘국민복지연금법’을 통과되고 다음해부터 시행키로 했다. 또 이를 담당할 부서로 보건사회부 내에 국민연금기획국을 신설하기도 했다. 그런데 73년 10월에 밀어닥친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세계경제가 요동을 치게 되자 기업부담 급증을 이유로 국민연금제도의 시행이 보류됐다. 대신 정부 내에서 국민의료보험제도의 추진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의료보장과 의료보험제도가 수면 위로 떠올라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한 것이 1975년 12월 신현확 보건사회부장관이 부임하면서 부터다. 때마침 1976년 6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77년부터 시작되는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우리 실정에 맞는 의료보험제도 실시를 반영하라”고 지시하면서 당연(강제)적용 의료보험제도의 도입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대통령의 지시가 곧 법이었던 시절(사실은 새로운 정책의 추진을 대통령 입을 통해 지시함으로써 정책추진의 당위성과 추진력을 강화하기 위한 각 부처의 전략)인 만큼 보건사회부는 그해 9월에 의료보험 조기 시행방안을 포함한 ‘국민보건 향상을 위한 의료시혜 확대방안’을 발표했다. 당연적용 의료보험제도를 1977년 7월부터 시행한다는 구체방안이 이 때 공식화 된 것이다.
1963년 12월에 제정된 ‘의료보험법’ 개정을 통해 1977년 7월 1일부터 500인 이상 고용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강제적용 의료보험이 시행된다. 사실 종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료보험이지만 법적 연원으로 따지면 1963년의 의료보험법이 지금의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실질적 뿌리이자 초석이었던 셈이다. 이후 공무원이나 사립학교 교원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은 물론 강제 적용 사업장 법위도 확대되면서 점진적인 전 국민 적용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하나하나씩 다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79년의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1980년대 들어 신군부로 일컬어지는 ‘국가보위입법회의(국보위)’시대를 거쳐 제5공화국으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전기가 만들어 진다. 역시 신군부가 등장하고 전두환의 5공이 출범하면서 복지확충시책이 또 한 번의 도약 계기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 가운데 의료보험은 전국민으로 확대하는 방안이 입안되고, 시범사업을 거쳐 지역의료보험(제2종 의료보험)과 농어촌지역 의료보험이 확대 실시되기에 이른다. 농어촌의료보험은 1988년 1월 1일부터, 그리고 도시지역의료보험은 1989년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전 국민 의료보험의 단단한 초석이 다져진 셈이다.
그러나 직장조합과 지역조합으로 나뉘어 운용된 의료보험은 재정상태가 직장과 지역조합사이에서는 천지차(天地差)가 날 수밖에 없었다. 직장의보는 본인부담 보험료는 물론 회사가 절반을 부담하는 보험료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거둬짐에 따라 재정은 넉넉한 데 반해 농촌이나 지역 조합은 그렇지 못해 적자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의료보험 통합논의다. 통합 찬성과 반대는 사회복지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다.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를 논리적 기반으로 의료보험 ‘통합’과 ‘반대’가 첨예한 대립 속에 이념논쟁으로까지 확대되는 양상이었다.
1987년 민주화 열풍(熱風) 타고 ‘전국민 의료보험’ 깃발은 올랐지만…….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1987년 이른바 민주화 시대의 도래(到來)다. ‘형평’의 논리와 근로자들의 욕구분출을 앞세운 민주화의 열풍을 타고 1987년 4월에는 보건사회부가 마련한 ‘전국민 의료보험 추진계획안’이 발표되고, 1989년 3월 9일에는 의료보험통합을 내용으로 하는 ‘국민의료보험법’이 국회본회의를 통과한다. 보편적 복지, 통합파의 승리로 귀결된 양상이었다. 이는 1988년 4월 총선에서 처음으로 여소야대(與小野大)국회가 구성되면서, 국회가 야당 주도로 변모됐기 가능했던 일이다. 당시 여당은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民主正義黨)이었고, 야당은 이른바 ‘3김’(金大中 평화민주당 총재, 金泳三 통일민주당 총재, 金鍾泌 신민주공화당 총재)이었다.
그러나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국회에서 여야합의로 통과된 ‘국민의료보험법’ 등 4개 법안에 대해 법안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입법이 무산되기에 이른다. 물론 대통령이 행사한 법률안 재의요구는 국회가 재적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 찬성으로 재의결하면 법률이 확정되지만 당시에는 국회가 재의결을 하지 않았다. 당시 정국이 워낙 어지러웠던 데다 1990년1월에 이른바 ‘3당 합당’이 이뤄지는 등 정국 소용돌이로 인해 의료보험 통합논의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당분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물론 의보통합을 둘러싼 갈등은 민주화 이후 이념논쟁으로까지 번지면서 물밑 힘겨루기는 갈수록 거세지고 있었음은 물론이다.(계속)
국민건강보험 진화일지(進化日誌) <2>
1977. 7. 1 강제적 의료보험제도 시행
* 500인 이상 고용 사업장 대상
* 근로자(피보험자) 116만 명(피부양자 194만 명) 486개 조합 설립
1977.12.31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의료보험법 제정
1979. 1. 1 공·교의료보험 시행
1980. 2.20 보사부,’의료보험조합 통폐합 추진계획‘ 수립
1980. 9.30 보사부장관, 의료보험 관리운영체계 일원화 방안 검토
* 직장의료보험조합 통폐합 계획 추진 보류
1980.12.31 ‘농어촌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 제정, 공포
* 농어촌 등 소외지역에 의료인력과 보건의료망 확보
1981. 4. 4 의료보험법 4차 개정
* 지역의료보험 시범사업 착수
1981. 5. 2 보사부, 제2종의료보험 시범사업 세부계획안 수립
1981. 7. 1 제2종의료보험 1차 시범사업 실시(홍천군,옥구군,군위군)
1982. 7. 1 제2종의료보험 2차 시범사업 실시(강화군,보은군,목포시)
1987. 4.20 보사부, ‘전국민의료험 추진 계획안’ 발표
1988. 1. 1 농어촌지역의료보험 전국확대 실시(134개 조합 설립)
1989. 3. 9 국민의료보험법(의료보험통합법) 국회본회의 통과
1989. 3.24 노태우 대통령,‘국민의료보험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
* 임시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으나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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