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 혼군(#8A) 폭정의 교과서, 유송(劉宋) 유자업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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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 유송(劉宋)의 혼란과 혼군 유자업의 등극(AD464)
북위 탁발준이 재위하던 AD460년경 당시 장강 남쪽의 유송은 극도로 혼란했다. 유송을 건국한 창업자 유유의 아들로 AD423-AD453년의 삼십년간 「원가의 치세(元嘉之治)」를 열었던 문제 유의륭은 태자폐위 문제로 발생한 태자간의 갈등문제에 휘말려 피살되었다.(AD453) 그 이후 유송은 황제로 즉위한 태자 유소파와 그를 반대하는 다른 황자를 지지하는 파들 사이에 극렬한 내부분란에 휩싸이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문제 유의륭의 둘째 아들 유준(劉駿)이 형 유소를 제거하고 황제가 되었으나(AD453) 유준은 형편없는 황제였다.
재물과 이익을 끝없이 탐하였고 자사나 이천석 이상의 급여르 받는 고위지방직 관리들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 올 때에는 반드시 일정액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종일토록 술을 마셨고 깨어 있을 때는 잠시 뿐이었다. 그러나 밖에서 상주하는 일이 있으면 즉시 자세를 바로 하여 깨어있는 시늉을 하였으므로 주변 신하들은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유준이 갑자기 AD464년 죽으면서 유조를 내렸다.
“ 태재 유의공은 상서령에서 해임하고 중서감을 덧붙이며
유원경은 영상서령에 임명하고
크고 작은 일은 모두 그 두 사람에게 상의하여 결정할 것이며
큰일은 심경지와 더불어 상의하라.
군대에 관한 일은 반드시 심경지와 의논할 것이며
상서의 일은 안백지에게 맡기고
외감의 일은 왕현모에게 부탁하라.“
유준이 죽고 그의 아들 유자업이 15세 나이로 황제자리를 계승하였다.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유자업은 전혀 슬픈 기색을 하지 낳았다.
이부상서 채흥종이 이렇게 독백했다.
“ 노나라 소왕이 양공이 죽은 뒤에 곡을 하지 않자
숙손목자가 그가 끝을 보지 못할 것을 알았다고 했는데
오늘 나라의 재앙은 바로 유자업에게 있음을 알겠구나!“
<2> 어머니의 임종을 외면하는 유자업
유자업은 아버지 유준의 정부인 왕태후 소생이다. 왕태후가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자 아들 유자업을 침상으로 불렀다. 그러나 유자업은 이렇게 말하며 가기를 거절했다.
“ 병자의 몸에는 귀신이 많다는데
어찌 내가 귀신 곁으로 갈 수가 있겠는가?“
왕태후가 격분하며 말했다.
“ 칼을 갖고 와서 내 배를 갈라라.
저렇게 비린내 나고 어리석은 녀석을
어떻게 내가 낳았단 말인가“
왕태후는 그 말을 마치고 곧바로 죽었다.
<3> 채흥종의 좌천(AD465)
황제 유자업이 나이가 어렸으므로 정사는 태재 유의공이 떠맡고 소상지가 그를 보좌했으며 인사는 채흥종이 맡았다. 그러나 태재 유의공이 매우 무능했으므로 사실상 대법흥이 정사를 도맡았다. 당시 채흥종은 훌륭한 인사를 추천하고 임용하면서 조정 대신의 정치 잘잘못을 지적함으로써 국정을 떠받치는 유일한 존재였으니 당연히 황제는 물론 대법흥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채흥종이 번번이 황제에게 직설을 고해바치면 대법흥과 소상지 등이 문서를 고쳐서 황제에게 올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채흥종이 대법흥에게 이렇게 말했다.
“ 주상께서 상중에 계시니
친히 만기를 친람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선(인사) 문제는 원래 기밀이라서
아무도 건드리면 안 되는데
이렇게 서류를 고치고 조작하면
더 이상 국가의 기밀서류는 어느 것이 천자의 뜻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됩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채흥종이 자주 비판하고 따지자 유의공이나 대법흥과의 사이가 벌어졌다. 결국 채흥종은 좌천되어 신창태수로 쫒겨 나갔다.
<4> 유자업의 오른팔 화원아와 대법흥 제거(AD465)
황제 유자업은 성질이 급하고 포악했으며 능력이 모자랐다. 어려서부터 태후와 대신, 그리고 대법흥이라는 사람을 몹시 두려워했고 그들의 견책을 부끄러워했다. 유자업이 황제가 된 뒤 점차 나이가 들면서 마음대로 무엇을 하고자 하면 반드시 대법흥이 나서서 제재를 가했다.
유자업은 환관 화원아를 특별히 총애하면서 엄청난 재물을 내리려고 했으나 대법흥이 나서서 절반으로 줄이자 화원아가 대법흥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황제 유자업이 화원아에게 시중에 돌아다니는 유언비어를 탐문하게 하자 화원아가 이렇게 보고했다.
“ 시중에 떠도는 말이
궁중에는 두 천자가 있답니다.
대법흥이 진짜이고
자리에 앉아있는 황제는 안천자(雁天子,가짜)랍니다.
대법흥은 태재 안사백 유원경과 한 통속이 되어서
왕래하는 문객이 수 백 명이며
안팎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지금 이 자리는 더 이상 황제 폐하의 것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황제는 대법흥을 면직시킨 뒤 귀양을 보낸 다음 죽음을 내렸고 그들의 일당 또한 제거해 버렸다. 당시 고명대신 상서우복야 및 단양윤 안사백과 유원경은 살려 뒀었는데 그들은 한 패거리가 되어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란 방자하여 평판이 매우 좋지 못한 사람이었으므로 황제 유자업은 이들 마저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5> 안사백과 유원경의 유자업 시해 모의(AD465)
안사백과 유원경은 자신을 해치려는 황제에 대해 대책회의를 열고서 황제 유자업을 시해하고 유유의 아들 유의공(황제 유자업의 종조부)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유원경은 그 결정을 측근 심경지에게 알렸는데 안사백은 심경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유원경에게 이렇게 짜증을 내며 물었다.
“ 심경지라는 작자는 자잘한 간신배에 불과한데
어찌 그 중요한 거사에 그를 끌어드리려 하시는거요?“
심경지가 그 말을 유원경에게서 전해 듣고는 곧바로 황제시해 모의사실을 황제에게 밀고해버렸다. 황제는 즉각 황실군대를 동원하여 유의공을 토벌하고 그의 네 아들을 그 자리에서 격살시켜버렸다. 그리고 유원경을 조정으로 소환한 뒤 여덟 아들과 여섯 동생과 모든 조카를 살해했다. 그 이후 정권을 오로지하게 된 유자업은 대신들을 공공연히 채찍질하며 모욕을 주고 멸시하기를 노예처럼 했다.
<6> 황음한 황제 유자업
유자업에게는 여동생 산음공주가 있었는데 공주는 평소에 이런 불평을 늘어놓았다.
“ 어찌 같은 태에서 태어난 형제인데도
폐하는 육궁 궁녀가 만 여 명이나 되고
첩은 오직 부마 한 명만 주어지는 것입니까?
세상에 불공평한 것이 이보다 더 한 것이 있습니까?“
유자업은 크게 웃으며 일리가 있다고 말한 뒤 면수(面首, 미남자) 삼십 여명을 붙여 주었다.
한 번은 유자업이 선조들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화공이 그림을 그려오자 유자업은 선조의 그림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 고조 유유황제께서는 위대한 영웅으로써 몇 명의 천자를 사로 잡으셨다.
태조 유의륭(할아버지)은 말년에 어린 아이에게 머리를 찍히셨다.
세조 유준(아버지)은 거대한 술독이 오른 빨간 코를 가지셨는데
어찌 그의 코가 빨갛지 않은가?“
즉시 그림을 고쳐 코를 빨갛게 그리도록 지시했다.
유자업은 과거 자신의 태자지위를 넘본 이복 동생 유자란(10세)에게 사약을 내렸고 그의 동생 유자사(6세)와 여동생에게도 같이 사약을 내렸다.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은 유자업은 유자란의 생모 은귀비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부셔 버렸다.
황음한 유자업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유의륭의 열 번 째 딸 신채공주는 영삭장군 하매가 남편이었는데 유자업에게는 고모인 셈이었다. 유자업이 고모 신채공주를 몰래 궁으로 불러들인 뒤 사귀빈으로 부르며 가까이 하면서 신채공주는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장례마저 치렀다. 영삭장군 하매는 그런 황음한 황제를 가만두고 볼 수가 없었다. 황제가 외유를 하는 것을 틈타 시해를 계획했다가 들켜 살해되었다.
<7> 원의와 채흥종
유자업이 태자였을 때 그의 무능함을 알게 된 황제 유의륭은 태자를 유자란으로 바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시중 원의가 나서서 유자업을 극력 옹호한 까닭에 폐위되지 않았었다. 그런 연유로 유자업은 원의에 대해 항상 고마움을 갖고 있었으므로 정치를 오로지하게 되자 모든 정사를 원의를 맡기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원의에 대한 총애는 오래가지 않았다. 원의는 사소한 죄로 문책 받게 되었고 원의 또한 황음한 황제 곁에 있는 것이 불안하여 외직으로 나갈 것을 요청했다. 황제가 원의의 요청을 받아들여 옹주자사로 내보냈다. 원의의 장인 채흥종이 원의에게 이렇게 물었다.
“ 양양 땅은 황제의 권력이 닿지 않아 흉흉하기 짝이 없고
또 최근 별자리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
어찌 그런 곳에 가겠는가?“
원의가 이렇게 대답했다.
“ 천도란 요원한 것이므로
어찌 인간의 예측한 대로 되는 것이겠습니까.“
조정에서는 채흥종을 임해왕 유자욱의 장사로 임명하여 내보내려고 했으나 채흥종이 사양했다. 그런 장인에게 원의가 말했다.
“ 장인께서 나가셔서 섬성 서쪽의 여덟 주를 장악하시고
저는 양양과 면수(한수)를 지키면 서로 지척지간이기도 하고
또 하천과 육지로 서로 연결되는 곳이니
만에 하나 조정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함께 제환공과 진문공의 공적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어찌 흉악하고 난폭한 자의곁에서 통제를 받으시고
추축하지 못할 재앙에 가까이 계시려고 하십니까?“
채흥종이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빈한한 가문에서 일어났네.
아직까지 주상과 소원한 관계는 아닐세.
만약 변고가 생겨 안이 어려워지면
바깥 역시 예측을 못하기는 마찬가지 일세
자네는 바깥에서 화를 피하고
나는 안에서 화를 면하는 것 역시 좋지 않겠는가?“
원의는 명문가문 출신으로써 군사에는 문외한이었으나 청렴하고 결백하였으며 인망이 높았다. 여러 황족과 교분을 두터이 하면서 고명한 인사들과 접촉을 깊이 하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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