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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77> 생애 전부를 시(詩)만을 향해 살았던 시인, 박희진 선생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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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08월24일 16시37분
  • 최종수정 2024년08월25일 08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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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진 시인은 2015년 3월 31일에 타계하셨다. 1931년 12월 4일 생이니 향년 83세. 평생을 박 선생과 혈육처럼 지내던 성찬경 선생도 이듬해 타계하셨다. 그러고 보면 한국시단을 이끌어 오던 박 선생 동년배 시인들이 거의 타계하신 셈이다. 이형기, 박성룡, 박재삼, 구자운 선생들이 세상을 떠나신 것도 벌써 오래 전 일이 되었다. 적막하다.  

1940년을 전후한 시대에 태어난 필자와 같은 시인들에게 1930년을 전후해 출생한 시인들은 육친처럼 몸의 온기를 전해주는 선배 시인들이었다. 이분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가르침이 되었고, 이분들이 보여준 시인으로서의 몸가짐이, 시의 향방이 알게 모르게 가르침으로 와 닿았다. 그리고, 필자와의 동년배들도 하나 둘 이승을 떠나는 친구들이 나타나고 있다. 거듭 적막하다. 

 

c0bba66c83bf1ca87c1c2580d2a3a9a5_1723775<박희진 시인>

 

박희진 선생은 우리 윗세대의 시인들 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경우에 속하는 시인이다. 그는 평생을 시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시에 다가가기 위한 치열한 삶을 산 분이다. 그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세속적인 일에서 벗어나 시만을 지고의 가치로 삼고 살기 위해 그는 독신자의 삶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직장 일에, 가정사에 속박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의 길이 독신자의 길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 선생은 동성고등학교 영어교사를 직업으로 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그는 고등학교 교사 만 20년이 되는 해에 사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났다고 듣고 있다. 만 20년은 사립교원연금공단에서 연금이 지급되는 최소 근무 연한이다. 그는 연금 지급 개시 최소 근무 연한을 채우고 직장을 떠났다. 그러니까 박 선생은 아마도 나머지 생애 40여 년 가까운 기간을 적은 연금만으로 자족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시만을 바라보고 산 삶이었다.

 

박 선생은 평생을 시인으로 자족의 삶을 산 분이었다. 다른 세속의 명리를 탐하지 않았으므로 시만이 그의 보람이었고 시적 활동만이 그에게 희열을 안겨주는 것들이었다. 박희진 선생은 샘솟는 시적 활력을 아낌없이 쏟아내어 시를 썼고, 그 시들을 시집으로 엮어 냈다. 그는 필자가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44권의 시집을 세상에 남겼다. 아마도 편수로 친다면 한국에서 제일 많은 시를 쓴 시인이 아닐까 한다. 조병화 선생이 많은 시집을 냈지만 박희진 시인의 시집은 수백 편의 시를 한 권의 시집에 담은 방대한 것들이 상당 수에 달한다. 그리고, 그는 시인으로 사는 거의 전 생애를 시 낭송(낭독)운동에 바쳤다. 성찬경, 박희진 2인 시낭독회, 공간시낭독회 등을 거쳐 오면서 우리나라 시 낭송운동을 개척한 선구적 업적을 이뤄냈다.

 

 필자도 박 선생 등이 이끌어 온 공간시낭독회에 몇 번 초대되어 참가한 적이 있었지만 그의 시 낭독은 독특하고도 특이하게 이뤄낸 것이었다. 박희진 선생은 시 낭독 전, 시를 쓰게 된 배경 등을 소상하게 이야기한 후 작품을 낭독하였다. 한 20여 분은 족히 되는 시간을 그의 창작 배경과 시에 대한 자신의 소신들을 이야기하였다. 물론 낭독 작품을 관객에게 보다 잘 전달하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때로, 그의 낭독 시간을 지루하게 받아들이는 관객이 있으면 그는 질타를 해서라도 그의 시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려 했다.

 

몇 년 전, 조각가 문신의 작품을 대상으로 한 시편들을 대상으로 한 시낭독회를 주최하는 쪽에서 낭독시인 섭외를 내게 부탁해 온 적이 있었다. 박희진 선생께 낭독회 취지를 말씀드리고 참가를 요청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조각가 문신의 작품들이 수록된 도록을 보내드리겠다고 연락을 드렸었다. 그런데, 박 선생은 도록이 아니라 작품을 실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 선생은 지팡이를 짚은 몸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는데도, 숙명여대 문신 미술관을 찾아와 직접 작품들을 세세히 둘러보고 갔다. 이런 점은 박 선생의 시의 성실성을 뒷받침하는 일례일 수 있으리라. 그는 그냥 책상에 앉아 적당히 시를 써내는 ‘적당한 시인’이 아니었다. 시적 오브제와 직접적인 교감을 통해 시를 불러오는 ‘진짜 시인’의 길을 가려고 부단히 노력한 시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1950년대에 등단한 주요 시인들이 망라된 『60년대사화집(60年代詞華集)』(1960년 창간)을 실질적으로 주재한 것도 박 선생이었다. 구자운, 박재삼, 박희진, 성찬경, 이경남, 이종헌, 이창대, 주명영, 신기선 등이 창간 멤버였으며, 후에 박성룡, 문덕수, 강위석, 이성교, 이제하, 이희철, 인태성 등 많은 시인들이 참가하기도 한 이 시동인은 대개 1950년대에 등단한 시인들이었다. 한국 정통 시맥의 주류를 이룬 시인들의 집합을 보여준 이 시동인이 한국시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큰 것이다. 이 동인지의 출발을 기점으로 60년대 다양한 시동인들이 등장하는 기폭제가 되었다할 것이다. 물론 복판에서 이 동인지를 이끌어 낸 핵심인물이 박희진 선생이었다.

 

박희진 선생은 내게 각별한 관심을 보여준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박 선생은 자신이 시집이 간행될 때마다 시집들을 빠짐없이 내게 보내주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박희진 시인의 시집은 때로 수 백편의 시를 시집 한권에 담은 방대한 것들이 많았다. 인세조로 저자에게 주어지는 책 외에도 저자는 시단에 배포할 기증본을 따로 구입하는 것이 우리 시단의 상례일 터이다. 박 선생이 그렇게 확보했을 기증본을 내게 빠짐없이 보내주었던 것이다. 내게 대한 박 선생의 배려가 새삼 고맙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나는 2002년부터 약 2년여에 걸쳐 「해방후 한국시인연구」라는 연재물을 『현대시학』에 연재한 적이 있었다. 1945년 해방 후 한국시의 등뼈를 이뤄 온 시인들을 살펴보자는 의도였다. 모두 22명의 시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시세계와 그들의 시가 한국단에 끼친 영향 등을 살펴보고자 했었다. 그런데, 이 연재 시리즈에 박희진 선생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팔자였던 나의 능력 부족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박희진 시인의 시집들의 그 방대한 시편들을 80매 내외의 산문 속에 간추려 넣을 방도가 내게는 없었던 것이었다. <四行詩 百參拾四篇>, <사행시 四行詩三百首)>, <박희진 一行詩七百首>, <百寺百景>, <박희진 세계기행시집>, <1행시 960수와 17자시 730수. 기타>등의 시편들은 물론이고 나머지 시집들도 수록 시편들이 상당한 것들이었다. 나는, 후에 좀 더 집필 여유가 생길 때 박희진 시인의 시세계를 따로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박 선생께서 내게 베풀어준 관심과 애정을 생각할 때 퍽 송구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처럼 송구스럽게 된 저간의 형편을 박 선생께 따로 해명할 기회를 갖지를 못했다.

 

그 무렵 어느 자리에서 박 선생을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박 선생의 표정에서 섭섭해 하시는 표정을 읽게 되었고, 송구스러움은 일종의 죄스러움으로 번져나서 몸 둘 바를 몰라라 했었다. 이제 박희진 선생이 이승을 떠나셨으니 달리 저간의 형편을 말씀드릴 기회도 없게 되었다. 참고로, 박희진 시인의 시집 목록을 아래에 첨부하며 능력있는 후학들이 선생의 시세계를 본격적으로 궁구한 연구저작들이 나와 주기를 바란다.

시만을 위해 독신의 길을 산 시인,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시와 연관된 길만 오로지 선택해서 살았던 시인, 진정성의 시만을 좇아 살았던 시인, 박희진 시인의 시가 오랜 생명으로 살아남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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