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5B) 포악한 군주 부생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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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8) 부건의 장안 장악(AD350)과 전진(前秦 혹은 大秦) 건국(AD351년 1월)
양국의 신흥왕 석지는 후조의 황제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영녕이라고 하면서 여음왕 석곤을 상국으로 삼았다. 주변에 흩어져 웅거하는 모든 이민족은 석호의 아들로서 정통성을 지닌 석지에게 지지를 표명하였다. 석지는 요익중을 우승상, 친조왕이라고 칭하면서 특별히 우대하였다. 요익중의 아들 요양이 배포도 크고 용감하며 지략이 뛰어났으므로 주변 모두가 그를 세자로 책봉하라고 권했지만 요익중은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석지는 요양을 예주자사 신창공에 책봉했다. 부홍의 아들 부건에게도 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에 봉하였다.
AD350년 4월 석지는 10만 군사를 석곤에게 붙여서 왕랑과 장거 등과 함께 남쪽 염민의 위나라를 공격했다. 6월에 석곤의 군사는 한단을 점거하고 번양(하남성 내황현)에서 유국과 협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염위의 장군 왕태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석곤의 군대는 크게 깨졌다. 기가 꺽인 유국은 군대를 돌리고 말았다.
석지의 거기장군 왕랑이 석곤과 함께 업을 공격하러 떠난 사이 왕랑의 사마 두홍은 장안을 점거하고서 스스로 동진 정북장군 및 옹주자사라고 부르면서 장거를 자신의 사마로 삼았다. 부홍의 아들 부건은 장안을 뺏을 생각이 있었다. 다만 두홍이 그 생각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겉으로 석지가 내린 후조의 관작(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을 받는 척하면서 부하들을 하남 요지에 임명하고 또 보리를 심는 척하면서 서쪽(즉 장안)을 공략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이 속였다.
이렇게 위장하여 두홍을 안심시킨 뒤 부건은 스스로 동진이 내린 직책, 즉 정서대장군 및 도독관중제군사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격적으로 군대를 몰아서 장안의 두홍을 쳐들어갔다. 부건 동생 부웅은 5천 군사로 동관으로 들어가고, 조카 부청은 7천 무리로 지관(하남성 제원)으로 들어갔다. 부건이 조카 부청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 성공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북에서 죽을 것이고
나는 하남에서 죽을 것이다.“
두홍은 장수 장선과 1만 3천의 군사를 보내 동관의 북쪽에서 부웅과 부청의 군사를 맞아 싸웠으나 장선은 참패하고 말았다. 두홍은 관중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장안에서 부웅과 부청의 군사를 대적했으나 두홍의 아우 두욱이 부건에게 항복함으로써 거의 모든 전투에서 지고 말았다. 주변의 모든 성읍들은 부건에게 귀부하였지만 두홍은 장안성을 닫아걸고 대치하면서 항복하지 않고 버티었다.(AD350년8월)
부청은 위수 북쪽에서 두홍의 부장 장선의 나머지 군사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았다. 장선이 잡히자 삼보(장안을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눈 지역)의 모든 성과 보루들이 부청에게 항복했다. 10월 부건이 장안으로 습격해 들어오자 석 달간 버티던 두홍과 장거도 성을 버리고 서쪽의 사죽(섬서성 주지)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부건은 11월 27일 장안성에 입성했다. 당시 백성들은 진(晉)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살아있었으므로 부건은 참군 두산백을 동진 수도 건강에 보내 형식적으로 장안이 동진 소유의 땅이 된 것처럼 승리를 바쳤다. 다음해(AD351년 1월) 부건은 장안에서 대진(大秦 : 역사에서는 전진前秦)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천왕자리에 올랐고 일 년 뒤인 AD352년에는 장안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9) 부건의 허창 진격(AD352)
동진의 안서장군 사상과 최근 동진으로 항복한 평북장군 요양은 함께 허창을 공격하였다. 허창을 지키고 있던 전진의 예주자사 장우는 부건에게 긴급지원을 요청했다. 부건은 부웅, 부청과 2만 군사를 보내 동진 군대를 격파했다. 부웅은 그 지역 백성 5만 여 호를 장안으로 이주시켰다. 사상은 모든 것을 버리고 회남으로 도망갔다. 북벌을 강력히 주창하던 동진 최고 권력자 은호의 꿈은 일단 좌절된 셈이다. 그리고 이 일 이후로 요양은 동진의 군사력에 대해 심각한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황하이남 과 회하 이북 지역은 확실히 전진의 세력권 안에 들게 된 셈이다.
(10) 전진과 동진의 결판 : 남전(藍田)전투(AD354)
은호가 죽고 나자 환온은 곧바로 군사를 모아 북벌에 나섰다. AD354년 3월이었다. 4만여 보병과 기병으로 근거지 강릉을 출발하여 보병은 육로로, 수군은 양번(호북성 양양)에서 한수를 따라 석천(하남성 석천)을 지나 상락(섬서성 상락)을 거쳐 장안으로 향했다. 시작은 환온에게 유리했다. 환온의 별장이 상락을 공격하여 전진의 형주자사 곽경을 생포했고 이어서 청니(섬서성 남전 동남)를 함락시켰다. 동진의 사마훈은 뒤로 돌아 전진의 서쪽 변경을 침략했고 또 동진과 연합한 전량(前凉)의 왕탁도 진창을 공격해 들어왔다.
전진 부건은 태자 부장과 함께 장안을 지키고 동생 승상 부웅, 부생, 부청, 부석 등은 함께 5만 군사로 요유(섬서 남전현 남쪽)에서 총력을 쏟아 환온군을 막았다. 환온의 동생 환충은 부웅의 군대를 격파했고 여세를 몰아 동진군대는 장안 동쪽까지 진출했다. 장안에서는 부건과 태자 부장과 대사마 뇌약아가 3만 군대로 방어하고 있었다. 장안 주변의 주민들은 모두 환온의 동진에 투항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대세는 동진으로 기울 것이 틀림없었다.
이 때 거짓말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부웅의 7천 기병결사대가 장안 남쪽 자오곡에서 동진의 사마훈 대군을 습격하여 대파한 것이다. 자오곡은 장안 남쪽 진령 산길을 빠져 나오는 남북으로 긴 협곡으로써 촉한 120여 년 전 제갈량의 북벌(AD228)에서 위연이 제안했던 습격루트였지만 제갈량이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패전하면서 마속을 읍참할 때 나왔던 길이다. 사마훈은 일단 군대를 몰아 주지(섬서성 주지)로 퇴각했다.
(11) 전진 승상 부웅(苻雄)의 죽음(AD355)
전진의 승상 부웅은 사마훈과 전량의 왕탁을 토멸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잔당 교병과 옹(섬서성 봉상현)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웅이 죽었다. 부웅은 부홍의 둘째 아들로써 주군 부건의 친동생이다. 부건은 부웅을 잃고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부웅은 혁혁한 무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공손하여 세상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부건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 원재(元才,부웅의 자)는 나의 주공(周公) 단이다.”
부웅의 모든 지위와 작위는 그대로 큰 아들 부견에게 내려졌다. 부견 또한 아버지를 꼭 빼 닮아서 총명하고 겸손하며 효성이 지극했다. 도량이 넓고 뜻이 커서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영웅호걸들과의 교분도 두루 넓혔다. 여파루, 강왕, 양평로 등이 그와 친했다.
(12) 태자 부장의 전사와 애꾸눈 부생의 등장(AD355)
부웅이 전사한 옹(섬서성 봉상현)지역은 마지막까지 전진에게 버티던 지역이었다. 부웅이 전사할 정도로 지세가 험하여 공략하기 어려운 관중의 서쪽 끝자락 지역이었다. 마침내 태자 부장이 옹주자사 교병을 잡아 죽이고 옹 지역을 함락시켰다. 관중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셈이다. 부건은 환온의 북벌을 성공적으로 막고 나아가 관중을 통일시킨 공로를 높이 사서 대대적인 포상과 승진인사를 단행했다. 뇌약아를 부웅의 후임 승상으로 임명했고 모귀는 태부, 어준은 태위, 부생은 중군대장군, 부청은 사공으로 임명했다. 부건은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았고 노인들을 자주 불러 정치를 자문하였으며 관대하고 편안하면서 절약하고 검소한 정치를 함으롰 민심을 크게 얻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화살을 맞은 태자 부장은 여러 달을 앓다가 결국 10월에 죽었다. 태자의 자리는 친동생 부생(苻生, AD335-AD357)에게로 이어졌다.
부생이 태어났을 때(AD335) 할아버지 부홍이나 아버지 부건 모두 후조 석륵의 부하였었다. 부생은 한 쪽 눈이 멀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멀었다고도 하고 독수리 새끼를 꺼내려다가 눈을 쪼여 실명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부홍은 어린 손자 부생에게 농담 삼아 이렇게 물었다.
“ 아가야,
애꾸눈은 눈물도 한 쪽 눈으로만 흘린다던데
너도 눈물을 한쪽으로만 흘리느냐?“
부생은 이 때 몹시 자존심이 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칼로 자신의 팔을 찌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 이것도 한 줄기 눈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홍이 크게 놀라서 부생을 회초리로 때렸는데 부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 칼이나 창으로 맞는 것은 참을 수 있겠으나
회초리로 맞는 것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부홍이 아들 부건에게 이렇게 말했다.
“ 저 아이는 미친 듯 패역하니
의당 일찍이 그를 없애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온 집안을 파괴할 것이다. “
아버지 부홍의 말대로 부건이 부생을 죽이려고 했는데 동생 부웅이 한사코 제지하면서 말했다.
“ 어린 아이들이야 자라면서 응당 고칠 것입니다.
어찌 그리 서두르십니까?“
그렇게 살아 난 부생은 힘이 천균을 들 수 있었고 맹수와 격투하여 이겼으며 달리는 말을 따라 잡았고 찌르며 활을 쏘는 것에서 당할 자가 없었다고 했다.
태자 부장이 죽었을 때 생모 강씨는 막내 부유를 세울 생각이었는데 부건은 삼양오안(三羊五眼, 세 마리 양의 다섯 개 눈. 즉 양 하나는 눈이 하나)이라는 참위서를 믿고 스무 살 부생을 태자로 삼은 것이다.
(13) 부건 와병(AD355년 6월)과 유언
그 해 부건의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았다. AD 317년생이니까 서른여덟이었지만 병환으로 드러눕게 되었다. 부건의 병환이 심각해지자 태위부청은 부생의 사람됨이 난폭하기도 하였고 본인 또한 야욕이 있었으므로 이 기회에 정권을 잡을 생각을 품었다. 병환이 심각한 것으로 볼 때 부건이 이미 죽었을 것으로 생각한 부청은 군대를 이끌고 동궁으로 들어가 부생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부건은 아픈 몸을 이끌고 몸소 반란군 방어에 나섰다.
반란군 가담군사들은 죽은 줄만 알았던 부건이 살아있음을 보고 혼비백산했다. 부청은 사로잡혀 죽었다. 부건은 대사마 부안에게 모든 군사권을 준 뒤 조정의 중신을 곁으로 불러 유조를 남겼다. 태사 어준, 승상 뇌약아, 태부 모귀, 사공 왕타, 상서령 양릉, 좌복야 양안, 우복야 단순, 이부상서 신뢰가 고명대신으로 불려 들어와 유조를 받들었다. 그런 뒤 부건은 부생을 곁으로 불러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 오랑캐 출신 여러 장군이나 대신들이
네 말을 듣지 않으면 미리 죽여 버려라.“
부건은 이 말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AD355년 6월15일) 전진의 1대 경명황제 고조다. 서른여덟의 짧은 생이었다.
사마광은 이런 부건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 고명대신은 후계자를 보필하여 황통을 잇게 하는 오른 쪽 날개와 같은 것이다.
그들에게 우익이 되라 해 놓고 뒤로 그것을 자르라 했으니
망하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다.
충성을 믿지 못하면 맡기지 않으면 될 것을
맡겨 놓고도 의심하고 시기한다면
혼란을 불러오지 않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자치통감 권100 공안 355년)“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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