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5A) 포악한 군주 부생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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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暗君)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 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 저족(氐族)과 전진(前秦 : AD351-AD394)
저족(氐族)은 기원전 2세기부터 현재 칭하이 성(靑海) 주변에 거주했던 유목 민족이다. 남쪽으로는 티베트계 강족(羌族)이 있었고 북쪽과 동쪽에는 흉노족이 살고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아랍계 유목민들에 둘러싸였다. 당연히 저족은 단일민족으로 보기 어렵다. 서융전(西戎傳)에 따르면 그들 복장 색깔이 벌레 색깔과 같아서 저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저족은 양을 숭배하는 티베트계 강족과는 확실히 다른 종족임에 틀림없다.
후한 말 혼란기에 저족 추장 아귀(阿貴)와 양천만(楊千萬)이 조조를 반대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나 하후연에게 패하여 서남쪽으로 달아나 촉(蜀)에 망명하였다. 이들을 파저(巴氐)라고 부르기도 했다. 남은 저족의 부락민들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했고 이후 부풍, 천수 등 변경지역에 분산 이주시켰다. 그 후 저족은 한족과 동화되었다. 독실한 불교 숭상국이었던 전진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 AD372년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최초로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2) 유총의 회유를 거부하고(AD310) 유요에게 항복한 포홍(AD318)
AD310년경 지금의 감숙성 천수시 부근에는 많은 저족 들이 살고 있었다. 그 우두머리 포홍(蒲洪:AD285-AD350)은 날렵하고 용맹하면서도 지략이 뛰어나 모든 저족들이 깊이 존경하며 따랐다. 포홍의 명성을 잘 알고 있는 한조(혹은 전조) 군주 유총은 포홍을 포섭하기 위해 평원장군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포홍은 거절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저족을 보호하는 책임자, 즉 호저교위 및 진주(秦州)자사 악양공이라고 불렀다.
포홍이 전조 유총에게 귀부하지 않은 것은 당시 정통성을 가진 서진 조정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비록 팔왕의 난에 이은 내분으로 나라가 크게 흔들렸고 그 틈을 타서 유총의 아버지유연이 독립하여 전조(한조)라는 나라를 세웠지만 포홍으로서는 선비족에 불과한 유요가 세운 전조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도 없었고 또 이복동생 유화 등 형제 여러 명을 죽이고 황위를 찬탈한(AD310년 7월) 야만스런 유총을 수용할 수도 없었다.<유연 및 유총의 전조에 관해서는 본고 시리즈 #5, 졸지에 건국하고 망해버린 전조 참조> 그러나 유총이 죽고 뒤를 이은 황제 유찬과 근준의 폭정이 이어지면서 나라가 극도로 어지러워졌다. 근준은 쿠테타를 획책하기도 했다. 보다 못한 정국을 수습하기로 나선 사람은 서진을 멸망시켰던(AD316) 상국 유요다.
(AD318년) 유요는 유찬과 근준 세력을 제거하고 전조라는 나라를 세웠다. 유연의 한조의 연장선 위에 있는 나라지만 역사에서는 전조라고 따로 칭하기도 한다. 전조는 다시 막강한 세력을 떨치게 된다. 포홍은 더 이상 충성을 바쳐 기댈 언덕, 즉 서진이 없었다. 게다가 유요는 무공과 함께 훌륭한 덕을 갖춘 사람이었다. 마침내 포홍은 유요의 휘하에 들어갔다.(AD319년) 유요는 항복한 포홍에게 솔의후라는 작위를 내렸다.
(3) 전조의 멸망과 후조에게 복속한 포홍(AD329)
AD328년 12월 전조의 유요는 성고관(호뢰관) 전투(3차 전-후조 전쟁)에서 막강한 석륵의 후조에게 패하여 죽었다. 남양왕 유윤은 수 만 군사를 이끌고 주둔하던 천수를 나와 석생이 장악하고 있던 장안을 향해 진군했다.
(AD329년8월) 장안으로 오는 도중에 살고 있던 여러 이민족들이 모두 남양왕 유윤에게 호응했다. 군사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유윤군은 서안 북쪽 50KM 지점인 중교(섬서성 예천)까지 도달했다. 석륵 휘하 석생은 굳게 성문을 닫아걸고 방어에 치중했다. 9월 석륵의 부하 중산공 석호가 2만 군사로 의거(감숙성 영현)에서 남양왕 유윤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일격을 당한 유윤군사는 황급히 상규(천수)로 도망쳤다. 석호는 끝까지 뒤를 쫓아 결국 태자 유희, 남양왕 유윤, 그리고 공경 이하 3천여 명을 체포하여 모두 살해하고 유민 9천 명을 수도 양국(산서성 임분)으로 압송했으며 여러 지역에 흩어 져 살고 있는 흉노무리 5천여 명을 낙양까지 끌고 와 거기서 산 채로 묻어 버렸다. 이로써 AD304년 선비족 유연에 의해 건국된 전조는 25년 만인 AD329년 9월 같은 선비족 석륵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저족 지도자 포홍은 별수 없이 석호에게 항복했다. 저족 십 수만 부락은 하남성 사주와 하북성 기주 등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4) 석(염)민의 포홍 처형 주장
포홍은 후조 석호의 휘하에 들어가 많은 무공을 세웠다. 석호는 그런 포홍에게 사지절 및 도독육이제군사 및 관군대장군이라는 높은 직책을 주었다. 석호의 총신 석(염)민이 석호에게 포홍을 제거하자면서 이렇게 말했다.
“ 포홍은 뛰어난 책략과 무공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그의 여러 아들들도 비상한 재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만 두시면 장차 염려를 만들 사람이니 미리 제거하여
사직의 걱정거리를 없애십시오.“
석호는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오직 그와 그의 아들(포건과 포웅. 나중에 성을 부씨로 바꿈)에게 의지하여
오나라와 촉나라를 뺏을 수 있었는데
어찌 그를 죽이겠는가?“
그러면서 더욱 두텁게 포홍 부자를 대하였다.
(5) 포홍의 충간(AD346)
석호가 총애하는 환관 엄생이 위세를 업고서 상서 주궤를 몹시 증오 배척하였다. 마침 오랫동안 장마가 지자 엄생은 주궤가 도로를 제대로 수리하지 않아서 백성들의 피해가 커졌고 게다가 수시로 주궤가 조정 정치를 비방했다고 참소했다. 석호는 즉각 주궤를 가두었다. 포홍이 나서서 주궤를 옹호했다.
“ 폐하께서 양국과 업궁을 가지고 계신데
장안이나 낙양궁은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사냥하는 수레만 1천 대이고 둘레만 해도 수 백리 울타리 안에서
금수를 기르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의 처를 10여 만 명을 탈취하셔서 후궁에다 채워놓으시니
성스러운 황제와 밝은 임금이 정녕 이렇게 하겠습니까?
오늘은 길을 제대로 닦지 않았다고 상서 주궤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폐하께서 올바른 덕치를 하지 않으시니 하늘이 노하여 비를 70여 일이나 내린 것입니다.
귀신같은 100만 군사라 하더라도 비가 개이고 이틀 만에
진흙구덩이를 제거할 수 없을 텐데 어찌 한 사람에게 그것을 기대한 단 말입니까.
정치와 형벌이 이런 모양이니 사해는 어떨 것이며 후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디 작업을 즉각 중단하시고 원유는 없애시며 궁녀들을 풀어서 내보내고
주궤를 용서하시옵소서.“
석호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평소 존경하는 열 살 연상의 어른이었으므로 포홍에게 죄를 주지는 않았다.
(6) 포홍의 동진 투항(AD349)
AD349년 4월 19일 업성에 태풍이 불었다. 집채만 한 나무가 뽑히고 바가지만 한 우박이 쏟아졌다. 궁궐에 큰 불이 한 달 이상 꺼지지 않는 바람에 많은 누각과 궁전이 불에 탔다. 승여나 어복도 절반 이상 타버려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이 때 패왕 석충은 계성(북경)에 진수하고 있었다. 동생 석준이 석세를 폐위시키고 황제로 앉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석준 토벌군을 일으켰다. 5만 군사를 이끌고 업으로 내려오는 동안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정의로운 군사에 동참을 호소했다. 옛 조나라와 연나라 지역에서 구름처럼 지원군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10만이 넘는 대군이 되었다. 석준은 석충에게 편지를 보내 뜻을 충분히 이해하므로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군사를 돌리라고 권유했다.
석충은 부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군사를 돌릴 수가 없었다. 석준은 석민과 이농에게 정예군 10만을 주어 석충군을 격퇴시킬 것을 명령했다. 석충의 10만 군사와 석준의 10만 군사는 평근(하북성 석가장 동남쪽 조현부근)에서 싸웠는데 석충이 크게 패하였다. 석충은 도망가다가 원지에서 붙잡혀 참수되었고 군사 약 3만 명은 매몰되었다. 석민은 석준에게 석호의 명령에 따라 관중지역, 즉 진주(섬서성 중남부)와 옹주(산서성 서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포홍이 장차 국가의 위협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종용했다. 석준이 석민의 말을 듣고 포홍의 옹진주도독직을 파면하자 포홍은 화가 나서 동진에 투항하고 말았다.
(7) 포(蒱)씨 성을 부(苻)씨로 바꾼 포홍의 독살(AD350)
동진(東晉) 조정은 내부 승계 문제로 혼란한 틈을 타서 염위를 공략할 생각을 품었다. 양주(楊洲)자사 은호와 후조에서 투항한 포홍과 그 아들 포건을 선봉으로 세워 석(염)민 침략계획을 세웠다. 당시 요익중은 관우, 즉 함곡관 지역을 놓고 포홍과 예민하게 다투고 있었는데 포홍이 염민을 공격한다는 것을 알고 아들 요양을 파견하여 5만 군사로 포홍을 선제공격을 감행했다가 대패를 당했다. 이번 승리를 계기로 포홍은 스스로를 삼진왕(三秦王)이라 부르면서 성을 포(蒱)씨에서 부(苻)씨로 바꾸었다.
손자 포견(나중에 전진의 영웅 부견)의 등에 초부(艸付) 라는 글자가 새겨 있어서 성을 부(苻)씨로 바꾸었다는 설이 있다.
장수 마추가 부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염민과 석지가 서로 겨루고 있으니 중원은 아직 평정될 수가 없습니다.
먼저 관중을 빼앗고 나서 가업을 튼튼히 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런 다음에 시간을 봐서 동쪽으로 쳐들어가
천하를 다툰다면 누가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
부홍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추는 연회를 이용하여 부홍에게 짐독을 먹여 죽이고 그 무리를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하려다가 발각되었다. 아들 부건이 마추의 목을 베었다.
독약을 먹은 부홍이 아들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 내가 입관(관중, 즉 섬서성 서안지역으로 들어감)하지 않은 것은
중원(하남성 산서성과 산동성 일대)이 쉽게 평정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룬 것이었다.
지금 불행하게도 어린 녀석에게 독으로 죽게 되었는데
중원은 너희들이 쉽게 감당할 곳이 아니니
내가 죽거든 서둘러 관중으로 들어가라.“
말을 마치고 부홍은 죽었다. 장자 부건은 아버지의 대도독·대장군 삼진왕이라는 독자 칭호를 모두 버리고 동진의 관작만을 지닌 채 부고를 동진 조정에 알려왔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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