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4> 혼군(3) : 무능의 극치, 서진 사마충(AD259-AD307)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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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 혼군 서진 혜제 사마충(AD259-AD307)
진(晉) 2대 황제 사마충은 중국을 다시 통일한 진무제 사마염의 적장자였다. 두 살 위인 형 사마궤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사마충은 나이 8세(AD267)에 황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선천적으로 지적 결함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냇가에 개구리가 우는 것을 듣고서 사마충은 시종에게 이렇게 물었다. “ 저 개구리들이 저렇게 시끄럽게 우는 것은 관청에서 시킨 것이냐 저들이 스스로 그런 것이냐?” 또 한 번은 가뭄으로 사람들이 밥을 굶어 죽는 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 밥을 못 먹으면 고기를 먹이면 될 테인데 왜 고기를 먹이지 않는가?”라고 물었던 사람이다. 이런 황태자를 걱정한 사마염은 몇 번이나 교체할까 생각했었다. 황태자를 교체해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대신(정북대장군 위관)이 없지는 않았으나 적통을 버리고 연소자를 채택한다고 하면 조정의 반발도 클 것이므로 선뜻 바꾸지 못하며 망설였다. 특히 사마충의 장인이 당시 실세 중에의 실세인 가충이라면 엄청남 반발을 살 것이 분명했다.
사마염이 황태자를 교체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영특한 사마충의 아들 사마휼 때문이었다. 비록 아들 사마충이 부족하더라도 손자가 똑똑하니 사직은 잘 지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사마충을 폐위시키지 않았다. 그 대신 당시 최고의 문인 이희와 이밀을 사마충의 스승으로 붙여 주어 가르치도록 했다.
본인의 지적 결함에 더해 사마충을 더욱 무능한 혼군으로 만든 것은 부인 가황후였다. 가황후(이름 가남풍)는 가충(賈充)의 딸이다. 가충은 사마염의 아버지 사마소집권 시절부터 총애를 받아오던 권신으로써 교활하고 아첨을 잘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순의, 순욱 및 풍담과 한 패거리가 되어 진무제 사마염이 동생 제왕 사마유를 제치고 태자로 책봉되는데 핵심역할을 한 공신이었다. 조정에서 흉노 출몰이 빈번한 진주와 양주(감숙성지역)도독으로 가충을 몰아내려고 하자 순욱의 제안을 받아 사마충 태자와 혼인함으로써 못 생기고 질투심한 딸 가남풍을 태자비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마염은 당시 조정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위관의 딸을 며느리로 삼을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다. “위씨는 다섯 가지 장점(賢, 多子, 美, 良, 白)이 있고 가씨는 네 가지 흠(妬忌, 無子, 醜, 短, 黑)이 있소.” 그러나 가충의 처 곽외가 황금뇌물로 양황후를 꾀었고 순욱 등의 무리를 동원하여 집요하게 사마염을 설득한 결과 태자보다 세 살이나 많았고 추한 가씨를 태자비로 만드는데 성공했다.(AD271년)가비는 태자비일 때 이미 몇 사람을 죽인 일도 있고 임신한 남편의 시첩에게 창을 던져 낙태시킨 적도 있어서 황제인 사마염에게 유폐당하고 폐위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자치통감에는 태자가 두려워했다고 할 정도로 가비는 무서운 여자였다.
사마염이 죽고(AD290) 사마충이 31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지만 정치는 오로지 가황후 및 동맹 등 환관 일당이 전횡했고 그에 반발하는 황족과 외척과 환관 사이에 끝없이 이어지는 내전으로 국가는 황폐해져 갔다. 사마 황족 사이에 벌어진 20여 년 간의 8왕의 난(AD291-AD311)으로 중국통일의 대업은 산산이 부셔졌고 혁혁한 공을 세운 훈구공신들은 거의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8왕의 난이 마지막 실권자 사마월에 의해 거의 끝나가던 AD306년 사마충은 궁궐에서 떡을 먹다가 체해 죽었다. 나이가 47세였으니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속설에는 사마월에게 독살되었다고 전한다. 재위 17년이니 짧은 기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라를 받드는 문무 충신들이 모두 제거된 데다가 불만에 쌓인 황족과 외척과 환관과 간신이 조정을 가득 메운 상태에서 사마충과 같은 혼군이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런 나라가 어찌 나라이겠는가? 진나라가 수명을 다하기(AD316) 이전에 나라 곳곳에서 분열이 일어나면서 전량(AD301), 전조(AD304), 성한(AD306) 및 대(315)의 여러 나라로 쪼개지고 있었다. 조조나 제갈량이나 할아버지 사마의나 아버지 사마소가 달성하지 못한 중국통일의 대업을 달성(AD280)한 사마염의 공업을 한 세대 만에 다 말아먹은 것은 서진 혜제 사마충이다.
<2> 서진(西晉)의 멸망(AD316)
AD316년 전조(前趙)의 유연이 장안을 포위하였다. 성내에서는 양식이 고갈되어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비참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황제 사마업(사마충의 조카)은 수치를 참고서라도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항복하자고 생각하고서 항복문서를 시중 종창에게 건넸다. 그러나 당시 실세(상서복야)였던 삭침이 항복에 반대하면서 종창을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들을 유요의 군영에 보내 이렇게 말했다.
“성안에 1년 분 양식이 있으므로 쉽게 함락 못 시킬 것이다.
만약 나에게 의동삼사(재상에 해당)과 만호의 식읍을 준다면 항복하겠다.”
유요는 단 칼에 삭침 아들의 목을 베어 버리고 말했다.
“ 내가 15년 군사를 거느렸으나
그런 속임수 잔꾀로 이겼다는 예를 본 적이 없다.
군량이 충분하다면 끝까지 버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늘의 천명을 받게 될 것이다.“
삭침에게 갇혔던 종창이 빠져나와 유요 군영에 가서 항복문서를 전달했다.(AD316년 11월10일) 그 다음날 황제 사마업은 입에 구슬을 물고서 유요의 전조(前趙)에 항복했다. 사마염이 서진을 세운지 꼭 56년 만이고 사마충이 죽은 지 구년만의 일이다. 삭침과 함께 국정을 농단했던 국윤은 자살했다. 전조의 황제 유총은 사마업(서진 민제)에게 광록대부 회안후라는 직을 주어 목숨을 살려 주었지만 2년 뒤에 전조의 내분에 휩싸여 18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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