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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7 광개토대왕과 후연(11)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1월03일 16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1월03일 16시03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8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60) 모용수의 적요 토벌(AD387)

 

장안과 제섭 무리를 토멸했지만 모용수는 가증스런 적요를 가만 둘 수가 없었다. 그는 여기저기를 붙어 다니면서 반란과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이었다. 동진에게 붙었다가 후연에게 붙었다가 또 서연에게 붙었다 하면서 모용수를 괴롭혔던 사람이다. 마침 적창이라는 사람이 후연의 태수 서함원을 죽이고 적요에게로 투항하는 일이 발생했다. 모용수가 직접 나섰다. 태자 모용보와 장무왕 모용주에게 중산을 맡기고 모용해를 전군도독으로 삼아 자신이직접 전군을 동원하여 남쪽으로 쳐들어갔다. 적요 무리들은 과거 전연이나 후조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모용해가 선봉에 섰다는 말을 듣고 모두 기뻐했다.

 

“ 태원왕 모용해는 나의 부모님이나 마찬가지다.”     

 

모용해의 아버지 모용각은 전연의 명장이었고 또 명재상으로써 백성들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적요의 무리들이 서로 서로 권면하며 모용해에게 귀부하자 적요가 두려워서 항복의 뜻을 보내왔다. 모용수는 적요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서주목의 직책을 내렸다. 모용수가 적요를 토벌하는 동안 가포라는 사람이 외부인을 끌어들여 중산을 공격해왔지만 장무왕 모용주와 모용보가 안팎으로 힘을 합하여 격파하고 공격해 온 무리들을 사로잡았다. 모용수는 다시 중산으로 돌아왔다.   

 

 

(61) 모용수의 유현 세력 토멸(AD387)

 

산서성 북단 끝자락 우옥현을 거점으로 한 유현의 세력은 동쪽으로는 탁발규와 대치하고 서쪽으로는 유위진과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영토가 넓고 비교적 비옥하여 강력한 군대를 가질 수가 있었다. 아버지 유고인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의 민심 또한 얻고 있었다. 그러나 유현과 동생 유가니 사이의 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났다. 북위 장곤이 탁발규에게 후연과 연대하여 내분에 빠진 유현 세력을 토벌하자고 종용했다. 혼자서는 힘이 달렸던 탁발규는 장수 안동을 후연 모용수에게 보내 또 다시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탁발규가 반란을 피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AD387년 경 북중국의 패권은 사실상 후연의 모용수가 잡고 있었다. 요장의 후진은 건국한 지 3년 밖에 되지 않았고 북위 또한 지난해에 세워졌다. 강력했던 전진은 무너지고 있는 중이었고 장안 서쪽에는 우후죽순처럼 소국들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후연의 경쟁상대는 되지 못했다. 유위진은 그런 모용수의 환심을 얻기 위해 말 몇 천 필을 보냈다. 그러나 도중에 유현이 그 말을 모두 약탈했다. 격노한 모용수가 모용해를 보내 유현을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유현은 남쪽 마읍, 즉 산서성 삭주 서쪽 산으로 도망갔다. 탁발규와 모용린이 그치지 않고 유현을 쫓아와 공격하자 유현은 마침내 후연과 사이가 좋지 않은 모용영의 서연으로 도망갔다. 모용린은 유현의 모든 군사와 가축을 거두었다. 빼앗은 가축이 천만 마리가 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로써 유현의 세력은 사실상 끝이 난 셈이다. 모용수는 유현이 다스리던 지역의 통치를 그의 동생 유가니에게 위탁했다. 

 

(62) 적요(遼)의 배반과 적위 건국(AD388)

 

지난 해 항복해 온 적요를 모용수는 서주목에 임명했는데 그 적요가 사마 휴경을 보내 사죄하고 반성의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모용수는 적요의 과거 행적을 볼 때 믿을 수가 없었으므로 사신 휴경의 목을 베어버렸다. 적요는 사실상 투항의뜻이 전혀 없었고 다만 휴경을 보내 후연의 정황을 염탐시키려 했던 것이었다. 휴경의 목이 날아갔다는 것을 들은 적요는 곧바로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천왕이라고 부르면서 독립을 선언했다. 지금의 하남성 남부 지역인 활대(하남성 활현:개봉 북쪽 50KM)를 근거지로 하는 이 나라를 역사에서는 적위(翟魏:AD388-AD392)라 부른다. 

 

 

(63) 태자 모용보를 녹상서사 섭정-현업수업(AD388)

 

북중국 최강의 나라가 된 후연의 모용수는 이 때 나이가 62세를 넘고 있었다. 그리고 장자 모용보의 나이는 이미 서른세 살이나 되었다.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를 녹상서사로 임명하여 모든 정치의 실권을 사실상 넘겨주고서 자신은 국가대사만 간여하기로 했다. 두 달 뒤 5월 모용수는 모용보에게 영대선우(임시 대선우)라는 직책을 주어 선비족 최고위 직책인 대선우의 임무마저도 위양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현재 부인 단씨를 황후로 책봉했다. 그리고 그의의 언니이자 전의 황후였던 태자 모용보의 어머니 죽은 단씨를 성소황후로 추가로 시호를 내렸다. 

 

(64) 모용수와 탁발규의 염탐(AD388)

 

북위 창업자 탁발규가 몰래 후연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사촌 동생 탁발의를 중산으로 보내 후연의 상황을 염탐시켰다. 모용수가 그런 의도를 모를 리가 없다. 탁발의를 꾸짖었다.

 

“ 어째 위왕이 손수 오지 않았느냐?”

 

이 때 탁발규는 열일곱 살에 불과했으니 모용수로써는 손자뻘도 안 되는 셈이었다. 탁발의가 이렇게 대꾸했다.

 

  “ 돌아가신 선왕(탁발규의 할아버지 탁발십익건)과

    후연과 더불어 서진 조정을 섬기며 형제로 지내지 않았습니까?

    제가 사신으로 온 것이 큰 잘못은 아닌 듯 생각합니다.“

 

모용수가 말했다.

 

  “ 나는 이제 위엄이 사방에 미치고 있는데 

    어찌 옛날과 지금을 같이 놓고 말할 수 있겠느냐?“

 

탁발의가 대답했다.

 “후연이 덕과 예를 닦지 않고 오로지 무예만 가지고 

  강성하다고 예기하신다면

  이것은 장수나 할 말이지 군주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북위로 돌아 온 탁발의는 탁발규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 후연 주군 모용수는 늙었습니다.

   태자는 어리석고 나약하며 

   범양왕 모용덕(모용수의 동생)은 스스로의 재주만 믿고 날뛰는 것을 보면

   조카 모용보의 신하는 아닐 것입니다.

   주군 모용수가 죽고나면 후연은 큰 회오리로 빠져 들것이니

   그 때를 기다리시면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  

     

 

(65) 장신-왕조의 반란 진압(AD388)

 

AD388년 9월에 잔신이라는 반란 무리가 광평(하북성 한단 북동부 곡주현 부근)을 침략해 들어왔고 왕조라는 도적은 낙릉(산동성 양신현 부근)을 노략질해 들어왔다. 모용수는 고양왕 모용륭을 먼저 보내고 이어서 태원왕 모용해와 조왕 모용린을 구원군으로 뒤를 받쳐 주었다. 이 세 세력들이 합구(하북성 창주)에서 만나서 함께 장신과 왕조의 연합세력을 깨뜨려 패주시켰다.

모용륭은 그들을 추격할 생각이었으나 모용해와 모용린이 말리고 나섰다.

 

 “ 왕조는 늙은 도적이라서 간계가 대단합니다.

   혹 매복이라도 했다면 습격을 받기 딱 좋으니 

   잠시 기다렸다가 날이 밝으면 쫓아가십시다.“

 

모용륭이 반대했다. 

 

 “ 저들은 까마귀보다 못한 잡군에 불과합니다.

   도망갈 줄만 알았지 전략이나 전술 따위는 생각해 본적도 없는

   형편없는 무리들입니다.“

 

모용해와 모용린에게 차지한 장신의 성을 계속 포위하게 하고는 왕조를 추격했다. 날이 밝을 무렵 모용륭은 대부분의 왕조 무리들의 자른 머리를 들고 돌아왔다. 놀란 장신과 왕조가 나아와 항복해 들어왔다.    

 

 

(66) 후연의 인사와 용성지역 안정화(AD389)

 

장신과 왕조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모용수는 이 지역의 총괄을 위해 모용유를 양국(하북성 형태시)에 부임시켰다.(AD389년 1월) 요서왕 모용농이 이 때 조정에 편지를 올렸다.

 

 “ 신이 고구려 군을 쳐내고(AD385) 

   이곳을 진수한 지 벌써 오년이나 되었습니다.

   장수들은 편안하고 백성들은 한가롭게 지낸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청주(산동성), 서주(강소성 북부), 형주(하남성 남부),

   형주(하남성 남부) 및 옹주(섬서성 중서부)지역에 남은 도적들이 많다고 하니

   적절한 시기에 교대하고 그곳으로 가서

   죽을 힘으로 도적들을 몰아내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살아남아도 남은 힘을 조정을 위해 다 쏟아 부을 것이니

   죽는다하더라도 조그마한 여도이 없겠습니다.“    

 

모용농은 태자 모용보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모용수는 모용농의 충심을 알고 바로 소환하여 시중 및 사예교위로 임명하고 고양왕 모용륭을 도독유평지주제군사 및 유쥬목으로 삼아 용성에 유대를 건설하고 모용륭이 유부와 평주(요녕성 일대)의 모든 정치군사업무를 도맡게 하였다. 모용륭은 형님 모용농이 만든 법규와 질서를 계승하여 이를 넓히고 닦으니 요와 갈(하북성 동북부 지역) 지역이 매우 안정되었다.

 

 

(67) 하란부의 동정

 

AD383년 전진의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동진의 태보 사안과 그의 조카 사현에게 참패를 당한 뒤 북중국은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비록 전진의 부견이 살아있었고 또 군사력 또한 무시할 정도가 아니었지만 북동쪽의 모용수가 이끄는 후연세력과 요장의 후진, 그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작은 세력들은 과거와 같이 전진에 대해 충성을 보내지 않게 되었다. 서연의 모용충은 장안을 습격해 들어왔고 모용홍은 섬서성 화음에 웅거했다. 후량의 여광 또한 전진의 부하로 있었지만 혼란을 틈타 서역지방에서 독립하여 떨어져 나갔다. 

 

AD384년 전진의 주군 부견의 아들 부비가 주둔하고 있던 업성이 후연 모용수에게 포위되자 유고인은 지원군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당시 유고인 휘하에 있던 모여문과 모여상은 군사들이 출정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반란을 모의했다. 유고인을 격살하고 후연 모용수에게로 도망간 것이다. 유고인의 군대는 무너졌고 잔당을 규합한 사람은 유고인의 동생 유두권이었다.  선비족 유두권은 하란부(산서성 우옥)을 근거지로 하여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유두권의 아들 유나진은 아버지 유두권에게 사촌형 유현을 제거하라고 권유했다. 유현은 유두권의 형 유고인의 아들이다. 

 

그러나 유두권은 아들의 청을 듣지 않았다. 얼마 후 유현이 유두권을 죽이고 자립했다. 그리고 도망 와 있는 대나라 계승권자 탁발규마저도 죽이려 했다. 유현의 동생 유항니의 처 탁발규의 고모였으므로 유현의 음모를 몰래 탁발규 어머니 하란씨에게 알렸다. 유현의 참모인 양육권도 탁발십익건의 조카로써 평소 탁발규의 능력을 깊이 존경하고 있던 터라 유현의 계획을 그만 놔 둘 수가 없었다. 목숭과 해목을 보내 탁발규의 어머니에게 알려왔다. 탁발규의 모후 하씨는 밤에 유현을 불러 술을 취하도록 한 뒤 그 틈을 타고 아들 탁발규를 도망치게 했다. 그런 뒤 고의로 말을 놀라게 하여 장막을 온통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통곡하며 절규했다. 

 

“내 아들이 없어졌으니 누가 죽였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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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유위진, 유현 및 탁발규 세력 분포

 

 

갑작스런 소란에 미안한 마음이 든 유현은 미처 탁발규를 추격할 생각을 못했다. 탁발규는 외삼촌 하눌이 있는 하란부로 도망갔다. 상황을 파악한 유현은 이 모든 계획의 뒤에 양육권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목숭이 겉으로 분노한 척 나서서 양육권의 처와 말을 강제로 빼앗아 왔다. 그것은 탁발규 구원계획이 들키게 되면 그렇게 하라고 양육권이 미리 알려 준 대로 였다. 꼼짝없이 속아 넘어간 유현은 탁발규를 받아들인 하란부 하눌을 분하게 여겨 하씨를 죽일 참이었다. 낌새를 알아차린 하씨는 유현의 동생 유항니 집으로 도망가 3일을 숨어 지냈다. 유항니는 온 가솔을 들어서 형에게 애원하여 하씨는 죽음을 면했다.(AD385) 얼마 후 유현부락에 반란이 생기자 하씨는 유화진과 함께 아들이 있는 탁발규에게로 도망갔다. 하란부에 도착한 탁발규에게 외삼촌 하눌이 이렇게 말했다.

 

“ 나라(대)를 회복하거든 반드시 늙은 신하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탁발규가 이렇게 말했다.

 

“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말씀을 깊이 새기고 잊지 않겠습니다.” 

 

다음해 AD386년 열 다섯 살 탁발규는 우천(내몽고 흥화)에서 대나라를 다시 세웠다. 이 해에는 대나라 뿐만 아니라 요장의 후진과 여광의 후량과 후연의 모용수가 모두 나라를 세우거나 제위에 올랐다.  

 

대나라를 다시 건국한 탁발규는 당장 유현을 공격했다. 유현은 선남(산서성 우옥)에서 마읍(산서성 삭주)으로 도망갔다. 유현의 한 부족이었던 유노진은 주민을 거느리고 탁발규에게 항복을 요청했다. 유노진의 형 유건이 탁발규의 주력부대인 하란부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유노진은 자신의 부락민을 형 유건에게 귀속시킬 것 요청했다. 대왕 탁발규는 승인했다. 유건은 또 다른 동생 유거근을 하란부에 보내 감사를 표시했다. 

 

그런데 하란부의 하염간이라는 원로대신은 탁발규의 모후 하씨의 삼촌이면서도 전에 탁발규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었다. 평소 어린 탁발규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이 못 마땅했다. 하염간이 유건과 유거근에게 다가가 자신을 따르라고 요청했다. 유건과 유거근 형제는 하염간의 뜻을 좇았다. 유노진은 격노했다. 자기 가족 부대를 하란씨가 아니라 대나라에게 복속시키는 것이 본뜻이었다. 유노진은 형 유건과 동생 유거근을 모두 죽였다. 자신에게 귀속하기로 한 유건 형제가 피살되자 하염간은 즉각 유노진을 공격했다. 유노진은 탁발규가 있는 대나라로 도망쳤다. 탁발규는 사신을 보내 하염간에게 군사행동에 대해 경고를 했다. 하염간은 탁발규의 기세에 눌려 군사행동을 자제했다. 유현의 동생 유폐니도 탁발규에게 귀복했다.

 

십년 전인 AD376년 대나라를 멸망시킬 때 부견은 탁발십익건의 어린 아들 탁발굴돌을 장안으로 압송했었다. 그러나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전한 뒤 전진이 무너지자 탁발굴돌은 서연을 세운 모용영을 따라서 동쪽으로 갔다. 모용영은 탁발굴돌을 신흥(산서성 기주)태수로 임명했다. 유현은 동생 유항니를 보내 탁발굴돌을 영접하고 탁발규의 남쪽 경계서부터 공격해 들어왔다. 탁발규 내부에서도 우환 등이 탁발굴돌과 결탁하여 탁발규를 체포하려는 반란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우환의 장인은 사위의 음모를 탁발규에게 알려줬다. 탁발규는 우환과 그 측근 5명을 죽이고 나머지 가담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북쪽 하란부가 있는 음산산맥으로 피신한 뒤 모용수의 후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후연 모용수는 모용린을 보내 탁발규를 구원해 주었다.(AD386) 모용린의 지원군이 오기도 전에 탁발굴돌과 하염간은 탁발규를 공격해 들어왔다. 공격을 받은 북위의 북부대인 숙손보락은 서쪽의 유위진에게로 도망갔다. 탁발규는 모용린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연합군을 결성하여 탁발굴돌을 반격했다. 참패한 탁발굴돌도 유위진에게로 도망갔다. 그러나 유위진은 탁발굴돌 무리를 모두 죽였다. 이제 삭방(내몽골 이금곽락기)에 근거지를 둔 유위진은 막강한 군사와 병마를 지니게 되었다.(AD386) 유위진의 위상이 크게 높아지자 후진 주군 요장은 그를 대장군, 대선우, 하서왕으로 삼았고 장안에 근거지를 둔 서연의 모용영 또한 유위진을 대장군 및 삭방목으로 삼아서 자기편으로 끌어드리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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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후연 및 서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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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1월03일 16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1월03일 16시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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