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4> 혼군(2) 조조의 어리석은 손자 조예(a)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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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1> 조조의 손자 조예(曹叡, AD205?-AD239) 즉위(AD226년 5월)
위나라 2대 황제 위명제 조예(曹元仲)는 조조(曹操)의 손자로 위나라 초대황제 위문제 조비(曹丕)의 아들이다. 그의 생모 견씨(AD183-AD221)는 원래 원소의 아들 원희(袁熙)의 부인이었는데 조비가 견씨의 미모를 보고 좋아하자 조조가 빼앗아 조비에게 처로 준 여자였다. 조예의 생모가 나중에 조비가 황제가 된 뒤로 곽귀빈을 편애하자 견부인은 남편을 볼 수가 없게 되었고 이것을 심하게 불평하자 곽귀인이 견부인을 참소하여 죽음을 내렸다(AD221년 6월28일). 조예가 열여섯 살 때 일이다. 곽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견부인이 죽고 조예를 곽부인이 키웠는데 조예는 곽부인에게 매우 깍듯하게 예의를 대했다. 조비가 조예와 함께 사냥을 갔을 때 조비가 어미 사슴을 죽이고 아들 조예에게 새기 사슴을 쏘라고 했으나 조예는 울면서 “폐하께서 어미를 죽였으나 저는 차마 그 새끼까지 죽이지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망서렸다. 조비는 그 때문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조예의 생부는 조비가 아니라 원희라고 하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조비가 병이 깊어지자 죽기 직전에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AD226년5월)한 것을 보면 적어도 조비는 조예의 근본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며칠 뒤 5월 16일 조비가 진군, 조진 및 사마의 세 장군을 불러 유조를 내리고 40세 나이로 죽었으며 조예가 황제가 되었다.
<2> 교활한 간신 유엽(劉曄)과 충신 진군(陳羣) (AD226년 5월)
조예가 황자로 있는 동안 대신들도 조예의 존재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조예 또한 정사에 신경을 쓰지 않고 독서에만 몰두했었다. 갑자기 황제로 즉위한 뒤로도 며칠 동안 조예는 오로지 시중 유엽하고만 이야기를 나눌 뿐 다른 신하들과는 대면하지 않았다. 마침 유엽이 나타나자 신하들이 조예에 대해 궁금해진 대신들이 어떤 분이냐고 묻자 유엽은 이렇게 대답했다.
“진시황제나 한나라 효무제와 비견할 정도지만 재주가 조금 모자라다고 할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고명대신 진군이 상소를 올렸다. 진군은 원래 유비의 부하였으나 권유를 받고 조조의 신하가 된 사람이다.
“ 무릇 신하가 부화뇌동하며 옳고 그름을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은 나라의 큰
근심거리입니다. 만약에 서로 화목하지 못한다면
서로 원수 같은 패거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원수 같은 패거리들이 나타나면
마음대로 칭찬하거나 깎아 내리는 기준을 바꾸게 되니
진실된 사람과 거짓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어
진실되고 알맹이 있는 사람을 잃게 됩니다.
이것을 깊이 살피셔야 합니다.“ (AD226년 5월)
<3> 촉한 정벌을 두고 갈팡질팡하는 조예 (AD230년 9월)
위나라 대사마 조진이 조예에게 촉한정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촉한은 제갈량의 지휘아래 적극적으로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한중과 성고 같은 위나라 남쪽 국경을 넘보고 있었다. 조예는 그 말을 듣고 바로 남쪽에 나가 있던 무군대장군 사마의에게 장강을 따라 북상하여 한중지역에서 조진과 만나 촉을 공략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사공 겸 진군대장군 진군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 조조께서 장노를 공격하실 때(AD215년)
콩과 보리를 대량으로 비축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을 함락시키지 못함에 따라 군량이 크게 부족하여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그 당시보다 급박할 것이 없고,
또 한중의 야곡이라는 지역이 몹시 막히고 험난하여
진격이나 퇴각이 매우 어렵습니다.
군량을 보호하며 움직이는데 상당히 많은 군사가 필요할뿐더러
그마저 적군의 전후방 습격에 매우 취약하니
전과를 올리기 매우 힘든 것을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조예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군의 건의가 일리가 있어 보였다. 조예가 군사작전을 중지시킬 것을 명령하자 조진은 다시 진격허락을 요청하는 편지를 올렸다. 진군 또한 그 전략의 비용과 작전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편지를 올렸다. 황제 조예는 대사마 조진에게 바로 군사작전을 중단시켜야 했었다. 그러나 조예는 결정을 내리는 대신 진군의 상소편지를 조진에게 보냈다. 알아서 작전을 취소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대사마 조진은 진군의 편지를 읽고 군사작전을 중지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진군명령을 내리고 말았다.(AD230년 7월) 위나라의 촉한 공격은 참혹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8월에 한 달 가까이 비가 내리는 바람에 모든 잔도가 끊겨 버렸다. 군사이동도 불가능했고 군량의 운송도 어려웠다. 태위 화흠이 황제에게 충고했다.
“ 먼저 치도(治道)에 마음을 두시고 정벌을 나중에 계획하십시오.”
소부(스승) 양부도 간언을 올렸다.
“ 전진해도 경략할 곳이 없고 물러나도 얻을 것이 없으니
이는 왕자가 취할 길이 아닙니다.“
산기상시 왕숙도 이렇게 말하며 전쟁중지를 요청하였다.
“ 천리 길을 양식을 나르게 되면
병사들도 주리게 되며
풀을 베어 밥을 지어 먹으면
잠잘 때에도 배가 부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출병한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목표한 길의 절반도 못갔다고 하니
이야말로 피폐하기 기다리는 적의 입 속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가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군사를 좀 쉬게 하셨다가
나중에 틈이 생길 때에 공격하면
군사들은 기뻐서 죽음을 잊고 싸워 이길 것입니다.“
그 해 9월 출병한지 한 달 만에 결국 황제 조예는 철군 명령을 내렸다.
<4> 국정을 직접 돌보지 않는 조예(AD230)
촉한을 공격하러 갔다가 조예가 낙양으로 돌아왔다.(AD230년10월) 당시 낙양에서는 좌복야 서선이 남아서 정사를 총괄했었는데 황제가 돌아오자 결재할 서류를 서선 대신에 호아제에게 올렸다. 조예가 말했다.
“내가 살피는 것과 좌복야가 살피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느냐?”
끝내 사무를 보지 않았다.
<5> 딸 조숙의 사망을 애통하여 송장한 조예(AD232년 2월)
조예가 낳은 지 한 달도 안 된 딸 조숙이 죽자 매우 가슴 애통해했다. 평원의공주라는 시호를 내리고 사당을 세웠으며 죽은 생모 견씨의 종손 견황에게 결혼까지 시켜 합장시켰다. 그리고 견황의 후계를 두어 작위까지 세습하게 하였다. 스스로 장례에 참여하려 하였으며 몸소 생모의 고향인 하남성 허창까지 가려고 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경악했다. 사공 진군이 나섰다. 생후 3개월이 안 된 영아의 경우에는 상을 치르지도 않는다는 <예기>에도 합당하지 않았으며 성인의 예를 치르는 것이나 황제 스스로 상복을 입고 또 온 조정 대신들이 상복을 입는 전례가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소부 양부도 지적했다. 조비나 조조의 부인 무선황후가 붕어했을 때도 폐하께서 송장(장례참여) 하시지 않았는데 하물며 간난 아기가 죽었다고 송장하시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조예는 듣지 않았다. 끝까지 장례에 참석했으며 장지인 허창까지 직접 내려가 영구를 떠나 보냈다.
<6> 무모한 요동 공손연 공격의 실패(AD232년 9월)
조예는 요동태수 공손연을 토벌하고자 했다. 공손연이 명분상으로는 위나라 속번이었으나 외람되게 오나라와 내통하면서 독립할 생각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여남태수 전예를 시켜 청주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공손연을 공략하고 유쥬자사 왕웅은 육로로 요동으로 향하였다. 산기상시가 요동정벌을 반대했다.
“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기지 모샇면 공연히 적을 만드는 것이고
이긴들 나라에 큰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요동 재물을 다 손에 넣는 다 해도 우리가 부유하게 되지 않습니다.“
전예와 왕릉의 군사가 나아갔으나 득이 없어서 곧 철군했다.
<7> 간사한 유엽의 궤변(AD232년 9월)
조예는 시중 유엽을 매우 아꼈다. 조예가 지난 번 실패한 촉한 정벌의 가능성을 조정 대신들에게 물었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따로 유엽이 황제에게 들어가 촉한 토벌은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유엽이 나와서 대신들과 의논하면서 촉한 정벌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때 중령군 양기라는 사람이 유엽과 친한 사이였는데 촉한 정벌을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황제가 양기에게 촉한정벌 문제를 묻자 유엽의 예기를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 시중 유엽은 선제시절의 모사였는데
그 또한 촉한정벌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깜짝 놀랐다. 아까 까지만 해도 촉한정벌을 찬성한다던 유엽이었다. 황제가 유엽은 찬성한다고 했다고 하자 양기가 이렇게 말했다.
“직접 불러서 물어 보십시오.”
황제가 유엽을 불러서 다시 물어보았지만 이번에는 유엽이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며칠 뒤 홀로 황제를 대면하게 되자 유엽이 황제를 꾸짖었다.
“ 다른 나라를 정벌한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일입니다.
누설하면 모든 것을 그르치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누설될까 걱정이 되어
지난 번 양기 앞에서 말씀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군사행동은 속이는 일입니다.
행동을 개시하기 이전까지 모든 것은 비밀입니다.
신은 적국이 이미 이 계획을 아가 두렵습니다.“
부끄러워 진 황제 조예가 유엽에게 사과했다. 유엽은 나가서 양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 큰 고기가 걸리면 줄을 놓았다 댕겼다 하면서
제압할 때를 기다리면 못 잡을 고기가 없는 법이오.
임금의 뜻이 어찌 큰 물고기만 하겠소.
그대는 곧은 말을 하는 신하이기는 하나
계략은 좀 부족한 것 같으니
채택할 수가 없겠소.“
양기가 사과하며 물러났다.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 유엽은 항상 황제의 뜻만을 살피는 사람이라 조심해야 합니다.
시험 삼아서 황제의 뜻과 반대되는 쪽으로 말씀하시면
반드시 유엽은 그 쪽으로 답할 것입니다.
매사 그렇게 물어 보시어
유엽이 항상 폐하의 뜻에 반대하는 쪽으로 대답하는 것을 보시면
그것을 아실 수가 있습니다.“
황제가 자신의 뜻과 반대되는 쪽으로 유엽을 시험하여 물었더니 과연 유엽은 그렇게 대답하였다. 이때부터 황제는 유엽을 멀리하였다. 유엽은 한직으로 물러나 있다가 근심걱정으로 병사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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