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이 보여 주는 지도자‧충신‧간신의 귀감들 <55> 측천무후의 요청을 거부한 유인궤(AD684)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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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가 글을 써서 유인궤에게 보내 말하기를 太后与刘仁轨书曰:
“전에 한나라는 관중의 일을 소하에게 맡겼는데 昔汉以关中之事委萧何,
지금 공에게 맡기는 것이 바로 그것과 같소 今托公亦犹是矣。”
유인궤가 상소를 올려 仁轨上疏,
늙어서 관중에 거주하며 지키기 어렵다고 사양했다. 辞以衰老不堪居守,
그리고 여후(유방부인)가 화를 입어 패망한 예(*)를 들며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因陈吕后祸败之事以申规戒。
[(*) 유방 부인이 유방 사후 정치에 간여하다가 온 가문이 패망한 것을 의미]
측천무후는 (조카) 비서감 무승사를 보내 새서를 가지고 가서 회유하며 말했다.
太后使秘书监武承嗣赍玺书慰谕之曰:
“지금 황제(중종)가 (고종) 상례를 치르느라 말을 하지 못하니 今以皇帝谅闇不言,
모자라는 내가 대신 친정을 하고 있소. 眇身且代亲政;
멀리 고생이 많으시고 경계에 힘쓰시면서 远劳劝戒,
또 다시 노쇠하고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계시오. 复辞衰疾。
또 말하기를 여씨가 후대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고 又云‘吕氏见嗤(치,SCORNED)于后代
여록과 여산이 한조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고 하니 (吕)禄、(吕)产贻祸于汉朝’,
그 비유함이 깊이 옳고 두려움과 위로가 동시에 생기오. 引喻良深,愧慰交集。
공의 충절의 지조는 시종 바뀌지 않고 公忠贞之操,终始不渝(투,CHANGE),
굳고 강직한 기풍은 고금에 비할 데가 없소. 劲直之风,古今罕(한,RARE)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별 걱정이 없었는데 初闻此语,能不罔(걱정)然;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것이야말로 귀감과 같은 거울이었소. 静而思之,是为龟镜。
공의 선조에 대한 오랜 덕은 况公先朝旧德,
멀리 있으나 가까이 있으나 더욱 두루 빛나고 있소. 遐迩具瞻,
바라기는 크게 구한다는 마음을 품으시고 愿以匡救为怀,
나이가 들었다고 정분에 매이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无以暮年致请”。主
◎ 유인궤(601-685)
당나라 변주(汴州) 울지(尉氏) 사람. 자는 정칙(正則)이다. 어릴 때 가난했지만 학문을 좋아했다. 태종 정관(貞觀) 연간에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는데, 강정(剛正)한 탓에 이의부(李義府)의 미움을 받아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쫓겨났다. 고종(高宗) 용삭(龍朔) 원년(661) 소환되어 신라(新羅)와 함께 백제(百濟)를 공격하는 임무를 받고 대방주자사(帶方州刺史)가 되었다. 공을 세워 낙성현남(樂城縣男)에 봉해졌다.건봉(乾封) 원년(666) 좌상(左相)에 올랐다. 총장(總章) 3년(670)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에 오르고,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과 감수국사(監修國史)를 지냈다. 나중에 공(公)으로 진작(進爵)되고, 다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겸 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어 정사를 보좌했다. 의봉(儀鳳) 연간에 조하도행군진수대사(狣河道行軍鎭守大使)가 되었다. 무측천(武則天) 때 글을 올려 병으로 사직했는데, 문창좌상(文昌左相)이 되었다. 현종(玄宗) 개원(開元) 중에 문헌(文獻)이라 추시(追諡)되었다. 저서에 『유씨행년기(劉氏行年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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