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특집- 문화예술 칼럼> 이유진의 문화유적 기행 - 산성의 나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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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를 꾸준히 하고 있는 입장에서 산성 답사는 문화유산 답사중에 볼거리가 많고 역사공부도 더 많이 할 수 있는 그리고 등산의 즐거움도 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한국사는 산성의 역사라 할만하다. 남한 지역에만 무려 1,200여 개의 산성이 있다. 고구려 산성은 중국에 204개, 북한지역에 109개, 남한지역에 10여개가 있다고 한다. 한국의 성은 일본과 중국의 성들과 성격이 다르다. 지배층을 위한 공간이 일본과 중국의 성들이라면 한국의 성은 모두를 위한 공간이었다. 선조들은 평상시에는 평지성에서 생활하다 전쟁시 산성으로 올라가 항전했다.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자 신하들이 "고구려는 산에 의지해 성을 쌓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라며 반대한 것은 고구려의 산성이 난공불락임을 말해준다. 임진왜란 때 평지싸움에는 조선군이 전멸했지만 산성싸움에서는 크게 이겼다고 하니 산성의 위력이 대단했음을 짐작케한다.
산성은 축성 방식에 따라 포곡식과 테뫼식으로 나뉜다. 포곡식은 산등성이와 계곡을 따라 쌓은 것이고 테뫼식은 산정상을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것이다. 그래서 포곡식은 성벽길의 높낮이가 심한 차이가 난다. 그에 반해 테뫼식은 오르내리는 차이가 포곡식에 비해 적은 편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테뫼식 산성이 포곡식 산성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겠다.
제목: 단양 온달산성
촬영장소: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촬영날짜: 2021.9.3.
조상들이 이 높은 곳에 산성을 쌓느라 얼마나 피땀을 흘렸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공격하는 입장에서 올려다 본 산성은 감히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온달산성은 남한강이 보이는 성산의 정상부근을 돌로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벽의 안팎을 모두 비슷한 크기의 돌로 가지런히 쌓아 올린, 둘레 683m의 소규모 산성이다. 남서쪽 문터의 형식과 동문의 돌출부는 우리나라 고대 성곽에서 드물게 보이는 양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성벽의 보존 상태가 좋아, 축성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제목: 문경 고모산성
촬영장소: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촬영날짜: 2018.3.14.
삼국시대 초기인 2세기경 신라에서 계립령로(鷄立嶺路:문경→충북 미륵사지)를 개설하던 시기에 북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주흘산 이남이 한 눈에 보이며 남쪽으로는 불정지역 외의 다른 곳으로 길을 만들 수 없어 반드시 이 곳을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임진왜란, 동학농민운동, 한말 운강 이강년 선생의 의병항쟁시 전략적 요충지로서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 성의 둘레는 1,270m로서 장방형을 이루며 성의 높이가 낮은 곳은 1m, 높은 곳은 11m로 폭이 2~3m이며 동족에 암문 1개가 남아있고 남쪽 1km 위치에 옛길은 토끼비리(串岬遷)가 있다.
제목: 문경 조령제3관문
촬영장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촬영날짜: 2015.11.2.
이 관문은 영남 지방과 서울 간의 관문이며 또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초부터는 이곳 초참(草站)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鳥嶺)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 기요마사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 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 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제목: 담양 금성산성
촬영장소: 전라남도 담양군 대성리
촬영날짜: 2021.4.5.
우리나라 산성은 어딜가나 멋진 전망을 보여준다. 군사요새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멀리 담양호까진 보인다.
전남 담양군 금성면과 전북 순창군 경계에 2개의 작은 마을로 둘러싸인 금성산(603m)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남 지역에서 유명한 3개의 산 가운데 하나이다. 외성의 전체 길이는 6,486m, 내성은 859m이다. 역사가들은 산성이 지어진 년도는 불확실하며, 성벽 주변의 훼손된 흔적을 토대로 삼국시대(기원전 57~676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금성산성은 1409년에 재건되었으며, 임진왜란후 1610년에 복원되었다. 그 후 주요 병영기지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제목: 공주 공산성
촬영장소: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
촬영날짜: 2020.10.23.
이렇게 멋진 산성이 있을까? 공산성은 오르내리는 굴곡과 성문, 누각, 금강이 보이는 전망등 주변환경과 보기좋게 어우러져 있다. 백제문화의 아름다움도 만날 수 있다. 공산성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은 답사라기보다 산책이다.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였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동서로 약800m, 남북으로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제목: 청주 상당산성 동문
촬영장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촬영날짜: 2015.4.26
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백제 때 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 돌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성 안에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문과 치성이 남아있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목: 보은 삼년산성
촬영장소: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촬영날짜: 2021.4.29.
신라 자비마립간 13년(470)에 축조되었고, 소지마립간 8년(486)에 아찬 실죽이 일선군一善郡 장성 3천명을 동원해 대규모로 수리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축성을 시작한지 3년 만에 완성하여 삼년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가 서북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중요한 전초기지로 사용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918~943 재위)은 이 성을 점령하려다 크게 패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축산성으로 둘레 1,680m, 최고높이 22m, 폭 8~10m에 이르며, 동서남북 4개소에 문지와 다수의 건물터가 남아있고, 산성 인접지역에 대규모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삼년산성은 반원형 치성과 성내 배수를 위한 수구 등 특이한 축성양식과 축성 및 수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 고대 축성법 연구에 중요한 산성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제목: 안성 죽주산성
촬영장소: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촬영날짜: 2021.6.4.
산책같이 다녀올 수 있는 산성이다. 주차장에서 5분이면 출발기점인 동문에 이르고 경사가 완만한 성벽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힘들지 않게 풍경과 역사의 흔적들을 감상할 수 있다.
죽주는 고려시대 죽산지역의 지명으로 이곳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영남길 교통의 요지이다. 이 성은 죽주성 또는 매성으로 불렸으며 몽고군과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곳인데,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하여 몽고침략 때와 임진왜란 때 다시 쌓았다. 고려 고종 23년(1236) 몽고군이 이곳 죽주산성에 이르러 고려군에게 항복을 강요하면서 공격하였다.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둘러 싸고 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전술을 쓰자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 송문주 장군은 "멀리서 왔으니 어찌 배고프지 않겠는가! 삼가 이 생선으로 군량을 삼으라!" 하며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에게 보냈고, 이에 크게 놀라 적이 물러가니 뒤쫓아 무찔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백성들은 그를 '신명神明'이라 불렀다. 성안에는 송문주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역사의 흔적을 따라가는 시간여행은 언제나 놀랍고 흥미롭다. 시간여행은 역사가 사람의 이야기임을 확인해 준다. 역사 유적에서 눈을 감고 당시를 상상하면 과거는 우리곁에 있다. 문화유산의 그 화려함 만큼 그 그늘의 어두움도 있다. 세종 4년(1422) 도성 공사에는 32만 명의 백성이 징발됐으며 겨울철에, 그것도 40일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공사를 밀어붙여서 사망자만 870여 명이 발생하는 희생이 뒤따랐다고 한다. 빛 이면에 있는 백성들의 희생과 고통, 고난을 생각해 보면 문화유산에 대한 감탄과 감동과 함께 희생한 조상들에 대한 숙연한 마음을 갖게 한다. 문화유산의 아름다움과 가치뿐만 아니라 그늘에 가려진 고난의 유산까지 보듬어 함께 받아들여 할 것이다.
작가 소개
이유진 작가는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이 세상의 역사유적들을 자기성찰과 성장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문화유산의 가치를 사색하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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