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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26> 말향고래, 이슈마엘 그리고, 타성 깨뜰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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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9월17일 16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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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한 철, 집을 떠나 살았다. 익숙한 식탁, 익숙한 문지방이 아닌 것들이 주는 ‘낯 설음’ 이 일상의 타성들을 얼마쯤은 비켜갈 수 있게 해주었다. 속초 시내 서점에 가서 책을 사다 읽었다.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등 붙이고 누워서 책을 읽어보는 것도 한 즐거움이 될 수 있는 것. 게으르게, 게으르게, 자고, 자고, 또 자고. 읽고 기다리고. 시를 기다리는 것도 목마름이어서 가끔씩 소주 몇 잔이 갈증을 식혀주었다.

 시공디스커버리 문고로 나온 『고래의 삶과 죽음』도 지난 겨울의 독서 목록 중의 하나였다. 문고판으로 나온 얄팍한 이 책은 고래에 대한 소상한 정보들을 수록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고래’ 생각을 자주하곤 했었다.
 고래가 지구상에 나타난 것은 공룡들이 멸종해가던 까마득한 시기였다고 한다. 고래의 조상은 인간의 조상들이 지구상에 나타나기 1000만 년 전 쯤 전, 지구에 터 잡고 살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고래의 전 역사의 99.99% 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고래는 인간을 만날 수 없었다. 인간이 내는 소음으로 뒤덮이기 전까지 바다는 고래들의 파라다이스였다. 

고래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몸으로 진화한 동물이다. 고래는 시각, 후각이 퇴화한 대신 청각이 예민하게 발달하였다. 고래가 사용하는 소리의 주파수는 아주 너른 대역에서 분포하고 있어서 오대양 모두를 통신 범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15,000km 떨어진 남극과 북극의 고래들이 서로 사랑 노래를 부르며 소통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허먼 멜빌이 소설 『백경』(1951)을 썼을 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가 처음 포경선을 탄 것은 1841년 1월 매사추세스주 뉴베드퍼드에서였다. 그는 포경선 전체 수입의 1/120을 받기로 하고 견습작살잡이가 되었다. 멜빌은 이때의 포경선 승선 체험을 토대로 소설 『백경』을 완성하였다.

 말향고래는 고래세계에서 아주 크고 힘센 종에 해당된다. 몸길이 20여 m, 몸무게가 50톤이 넘는 놈들도 있다고 한다. 말향고래는 거대한 머리 속에 양초의 원료가 되는 경납을 그득히 넣고 산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지방층이 몸을 싸고 있어 고래 사냥을 통해 양질의 기름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이 녀석 뱃속의 ‘용연향’은 희소한 가치로 해서 최고의 값으로 거래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향고래는 크고 예리한 이빨을 지니고 있다. 에이허브 선장의 다리 하나를 삼킨 ‘백경’은 아마도 이 녀석이었을 확률이 크다. 자신이 죽음의 궁지로 쫓기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백경’은 에이허브의 다리 하나를 삼키며 저항했을 것이다. 말향고래의 예리한 ‘이빨’은 생존과 자위를 위한 것일 뿐, 공격을 위한 ‘무기’가 아니다.

 그런데, 멜빌은 어째서 이 녀석을 흉포한 짐승으로만 매도했던 것인가. 사랑노래도 부르며 영특한 지능을 지니면서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기르는 자애로운 이 짐승을 말이다. 에이허브 선장을 포경선 피이쿼드 호를 몰고 험난한 바다로 나아가게 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증오였던가, 복수심이었던가, 아니면 신념이었던가. 고래와의 응전 끝에 선원들 모두가 바다에 수장되고 마는 결말은 무엇인가. 나는, 냉혈한, 에이허브 선장의 복수의 일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난파의 바다에서 겨우겨우 살아남아서 포경선 피이쿼드호의 최후를 전해준 견습 선원 이슈마엘을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운명에 휩쓸려 포경선엘 타긴 했지만 그는 순정한 정신을 지닌 젊은이였고 거대한 운명에 맞닥드려 난파해가는 탐욕스런 인간들과, 무엇보다도 바다의 주인 고래들의 소식을 상세한 기록으로 전해 주었다.

 에이허브 선장이 바다에서 만났던 말향고래를 나는 내 생애동안 몇 번씩이나 만났었음을 안다. 때로는 돌발적인 운명으로, 우레 소리처럼 큰 울림으로 내게 와서 깨달음도 주고, 격려를 베풀어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칫 왜소해지거나 타성에 잡히기 쉬운 날들 을 헤쳐 건너갈 수 있는 ‘헤엄치기’ 방법을 넌지시 일러주고 간 것도 말향고래라는 것 을 알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겨울 동안 나는 ‘만해마을 집필실’에 머물면서 물과 바람과 소나무 숲과 흙이 ‘생명’을 이루는 근간임을 새삼 돌이켜보게 되었다. 연작시 「말향고래를 찾아서」는 그런 생각들 속에서 쓴 시편들 중의 일부이다.

 그런데, 소설 『백경』 속의 청년 이슈마엘은 다시 포경선을 타고 험난한 운명에 도전했을까, 전문 고래사냥꾼이 됐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애의 첫 관문에서 만났던 험난한 운명과, 난파의 바다에서 살아난 또 다른 운명을 통해 생애와 현실과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혜안을 지니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슈마엘이 나이 들고 백발성성한 노인이 되었을 때 생애의 곳곳에서 만났던 말향고래들을 자애의 눈으로 헤아려 그것들을 바른 자리에 세워 편한 삶을 살게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상식과 타성에 빠지지 않으면서 자신이 만나는 운명을 지혜의 눈으로 성찰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닌 노인으로 늙어 갔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유심』(2009.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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