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 채무조정, 선제적 위기 대응인가 vs. 도덕적 해이 부추키나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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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 행진하는 물가상승에 대응하여 통화당국의 금리인상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8월 이후 올해 7월말까지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폭은 1.75%p에 달한다. 올 연말까지 세차례 남아 있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추가적으로 0.75~1%p의 금리인상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지난 7월 전년동월대비 6.3%를 기록했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한국은행의 중장기 목표 수준인 2%로 낮아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점에서 내년에도 금리인상 추세는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20년 코로나 19 발생과 더불어 -0.7%를 기록했던 GDP 증가율은 2021년 4.1%로 높아졌지만 올해 상반기에는 2.9%로 낮아진 데 이어 하반기 중에는 더욱 낮아질 전망이다. 에너지가격 불안, 잇따른 금리인상의 영향으로 경기침체 우려가 점차 커지는 상황이다.
정책당국, 취약부문 금융 민생안정 대책 제시
향후 금리상승과 경기위축이 맞물릴 경우 그동안 잠재적인 위험 요인으로 지적되었던 1,859조원에 달하는 가계부채(가계신용, 2022년 3월말 기준)와 439조원의 개인사업자 대출(은행대출, 2022년 7월말 기준)의 부실화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올해 6월말 현재 기업과 가계대출의 변동금리 대출 비중은 각각 71.6%, 78.1%에 달하고 있어 금리인상으로 원리금 상환부담이 바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코로나 19 이후 시행되었던 소상공인에 대한 대출 만기연장, 상환유예 조치가 9월말 종료되면 소상공인들이 일시에 차입금 상환 압박을 받게 될 가능성도 있다.
가계부채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에 대비하여 정책당국도 선제적으로 다각적인 대응방안을 내놓고 있다. 지난 8월 8일 진행된 금융위원회의 업무보고에서 125조원+α 규모의 취약부문 금융 민생안정 대책이 제시되고 뒤이어 세부적인 실행 계획이 순차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80조원 규모의 자영업자∙소상공인 금융지원을 위해서는 정책자금 공급(41.2조원), 고금리 대출의 저금리 대환(8.5조원)과 아울러 새출발기금(30조원)을 통한 채무조정 지원이 계획되고 있다. 서민, 실수요자가 보유한 변동금리 대출을 저금리의 장기, 고정금리, 분할상환 대출로 바꿔주는 안심전환대출이 올해 25조원, 내년 20조원 규모로 시행될 예정이다. 이 밖에도 서민들을 위한 추가적인 정책금융 제공과 저신용 청년을 대상으로 한 특례 채무조정 등이 모색되고 있다.
이러한 조치들은 사전적으로 가계부실 위험을 줄이고 경제 및 금융 취약계층의 어려움을 완화, 해소해 준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가계부채 대책에 대한 비판 여론도 만만찮다. 특히 이번 대책에서 눈에 띄는 새출발기금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된다. 10월부터 30조원 규모를 목표로 시작될 예정인 새출발기금은 일종의 배드뱅크(bad bank)와 같은 것이다. 90일 이상 원리금 상환이 연체된 금융사 보유의 자영업자, 소상공인에 대한 대출 채권을 매입하여 원금의 60~90% 수준을 감면해 주고 나머지에 대해 최장 20년 이상 나눠서 갚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실히 원리금 상환을 해 온 차입자들 입장에서는 형평성에 어긋나는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채무 탕감을 기대하고 고의적인 연체를 부추기는 등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에 대한 우려도 있다. 금융기관들도 저가에 매출채권을 매각해야 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새출발기금에 대한 자금 출연 부담이 생기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걱정한다.
일부 채무탕감 등과 같은 가계 채무조정 불가피
이러한 도덕적 해이 확산 및 금융기관들이 지게 될 부담에 대한 우려가 어느 정도 일리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계의 특성과 현재의 금융, 경제상황을 감안하면 일부 채무 탕감을 비롯한 가계 채무조정은 불가피한 점이 없지 않아 보인다.
기업의 경우 부실화되면 적용되는 프리워크아웃(pre-workout)과 워크아웃, 법정관리 등의 다양한 구조조정 제도가 마련되어 있고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 자산 매각과 청산 절차를 밟기도 한다. 기업의 파산이 경제와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단계별로 다양한 기업 구조조정 조치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기업과 마찬가지로 가계의 경우도 채무부실화 정도에 맞추어 다양한 구조조정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금융기관의 자발적인 채무조정 또는 신용회복위원회를 통한 사적인 방식인 개인채무조정과 함께 법원을 통한 공적인 방식의 개인회생, 파산 제도가 존재한다. 새출발기금은 기존 제도를 이용하는데 소요되는 시간과 절차를 단축하여 신속하게 가계의 채무조정을 진행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현재의 경제, 금융 상황이 위중하다는 것을 반영하는 셈이다. 과거에도 경제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새출발기금과 유사한 배드뱅크가 가동된 바 있다.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3년 카드대란 사태에 대응해서 ‘한마음금융’이 설립된 바 있고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후 ‘신용회복기금’을 통해 취약 차주에 대한 구제에 나선 바 있다.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3년 3월에는 급증하는 가계부채 문제에 대응하여 18조원 규모로 국민행복기금이 설립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기업의 경우 청산절차를 밟아 사라지더라도 살아남은 기업들에게는 경쟁 압력 완화로 실적 개선과 성장의 기회가 생겨날 수 있다. 일시적인 고통과 충격을 겪은 후에는 기업 및 경제의 건전성 회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나 가계의 경우 구조조정의 결과로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기업과는 다르다. 근본적으로 상환능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채무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일생 동안 빚 부담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사전 예방 차원에서 가계부채로 인한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은 빚을 낼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취약 차주에게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의 잘못과 책임도 무시될 수는 없다. 또는 대출 당시에는 상환능력이 있었던 가계라도 실업 등으로 소득이 사라지면서 채무상환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도 존재할 수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일이 터지고 난 후에는 우선 수습하는데 힘을 쏟는 것이 중요하다. 가계부실 문제가 현실화될 우려가 큰 상황에서는 도덕적 해이 문제를 내세우기보다는 금융위기의 방지 및 취약 계층의 복지지원 차원에서 상환능력을 상실한 개인과 가계, 자영업자에 대한 채무조정이 필요할 수 있다.
도덕적 해이 우려에도 취약계층 지원 및 위기에 대한 선제적 대응 차원으로 이해
과거의 배드 뱅크 사례에 비해 새출발기금의 규모가 커지기는 했으나 전체 가계대출이나 개인사업자 대출 규모에 비하면 여전히 작은 규모에 불과하다. 새출발기금을 비롯한 가계부채 조정 대책들이 가계부실 위험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채무조정의 혜택을 보는 개인과 가계, 소상공인들은 숨을 돌릴 여유가 생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계부실에 따른 금융위기는 항상 취약 차주의 원리금 상환 연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금융불안 및 금융위기의 촉발요인(trigger)을 제거함으로써 위기 가능성을 완화해 주는 면도 있다. 더욱이 취약 차주는 대부분 저소득층으로 한계소비상향이 상대적으로 높다. 즉 소득 변화에 따른 소비 변화가 크다. 이러한 계층의 부채 부담을 덜어준다면 금리상승과 경기위축이 동반되면서 나타나는 소비 감소를 완화해 줌으로써 경기위축의 강도를 낮추어 주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채무조정 혜택을 악용하는 도덕적 해이를 막는 한편 채무조정 혜택이 절실함에도 정보 부족 또는 미비사항으로 인해 제외되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대상자 선정 및 부채조정의 강도 등에 있어 준비와 설계가 철저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도덕적 해이 문제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일부 부채의 탕감과 같은 채무조정의 혜택을 보는 경우 일정 기간 금융거래 제한에 가해지게 되므로, 이러한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일부러 채무조정 대상이 되려고 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새출발기금에서도 소득 및 재산을 고려하여 엄격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과 함께 채무의 탕감과 더불어 신규 대출과 신용카드 이용에 7년간 제한을 가하는 등 강도 높은 금융거래 상의 불이익을 계획하고 있는 만큼 채무조정을 악용하는 사례는 상당 부분 걸러질 수 있을 것이다. 새출발기금을 실무적으로 운영하게 될 자산관리공사가 과거 배드 뱅크 운영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노하우가 도덕적 해이 방지에 충분히 활용될 것으로 기대되는 면도 있다.
금융기관의 손실 분담이 불가피한 점도 존재
금융기관으로서는 다양한 방식의 채무조정 과정에서 손실을 입게 되거나 또는 배드 뱅크에 출자해야 하는 부담에 대해 우려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가계와 더불어 금융기관도 가계대출 부실로 인한 손실을 분담한다는 차원에서 채무조정과정에서 금융기관의 역할과 참여가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의 경우 장기 연체되고 있는 대출채권을 채권 추심기관에 할인 매각하고 이에 따른 손실은 미리 적립해 놓은 대손충당금으로 메우게 된다. 손쉽게 부실자산을 털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계는 채무조정 없이는 원금상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계대출 부실은 일차적으로 가계에게 책임이 있겠지만, 채무자의 신용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대출해 준 금융기관에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가계와 소상공인에 대한 채무조정이 경기침체와 금융위기를 방지하는데 일부 기여할 수 있다면, 금융기관들로서는 더 큰 손실을 막을 수 있게 되는 면도 있다.
과거 1997년말의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에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은 일부 퇴출되거나 다른 금융기관에 흡수, 합병되기도 했으나, 막대한 공적자금의 지원을 받아 회생할 수 있었던 경험이 있다. 은행들은 금융시스템 안정 차원에서 잠재적으로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기능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이 채무조정 과정에서 손실이 커지게 되거나 자금 출연 부담이 생기게 되는 것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인다.
가계부실 확대로 채무조정 늘어날 가능성에도 대비
최근 몇 년간 가계부채로 인한 잠재적인 금융위험을 낮추기 위해 양적인 가계부채 규모 증가세 억제와 질적인 가계부채 구조 개선에 역점을 두어 왔다면, 이제부터는 가계부실 위험의 현실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책 마련에 나설 때다.
정책당국이 최근 제시한 가계와 소상공인 부채 관련 대책들은 경기위축과 금융위기가 현실화되기전에 선제적으로 가계부채 관련 위험을 낮추고 취약 차주를 지원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채무조정으로 인해 취약 차주가 연체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경제생활로 복귀할 수 있고 경기침체와 금융위기를 방지하는데 일부 기여하는 면이 있다면 공동체 전체의 관점에서 일부의 도덕적 해이 문제는 감수할 만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도덕적 해이에 대한 비난을 의식하여 정책당국이 채무조정 대상이 되는 취약 차주들에 대해 지나치게 금융거래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은 아닌 지도 점검해 볼 일이다. 불이익이 과도하면 취약 차주에 대해 정상적인 경제, 금융생활로의 복귀를 지원한다는 당초 정책적 의도가 충분히 달성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금리상승과 경기악화로 인해 채무조정 수요가 점차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에 대비하여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 방지와 채무자의 회생 지원이라는 목표 간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기존 사적, 공적 채무조정제도들에 대한 점검과 개선방안이 지속적으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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