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51>국토를 제대로 지켜라 (VI) 제 2차 파저강 전투③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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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6 평안도 방어와 4군 설치
김종서의 함길도 경략과 두 번에 걸친 평안도 야인 토벌에도 불구하고 압록강 및 두만강 연변 북방지역의 방어는 여전히 불안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세종은 그렇게 생각했다. 야인들이란 은혜를 모르는 짐승과 같아서 아쉬우면 나와 구걸하다가도 배부르면 노략질과 도적질을 그치지 않으니 언제 또 침략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종은 지속적으로 평안도 도관찰사나 도절제사에게 구체적인 방어대책을 지시하거나 방어의 큰 틀을 제시하였다. 특히 경솔하게 전투를 일으켜 뜻하지 않은 패배를 당하지 않도록 경계했다. 제 2차 파저강 전투가 끝나고 석 달도 안 되어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에게 당부한 말이다.
“장군의 도리는 호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신중함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만약 적의 강약과 많고 적음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일시
결전을 하였다가 만일 패배한다면 그 해가 적지 않다. 연변 여러 장수가
저들 땅에 깊숙이 들어가 외롭게 멀리 추격한다면 비록 한나라 위청과
곽거병과 같은 명장의 일이라 하더라도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爲將之道 非貴好戰 貴乎持重 若不料敵之强弱衆寡 徒欲決戰一時 萬一致
敗 爲害不小 沿邊諸將深入彼土 孤軍遠追 雖有如漢家衛 霍之所爲 固非予
之所望 : 세종 19년 12월 15일)”
그러니 적들이 오거든 방어에 주력할 것이지, 신진보와 허유강같이 섣불리 나아가 적을 쫒다가 전사하거나 포위당하는 꼴을 보지 않도록 신신 당부했다. 앞으로는 다음과 같은 방침에 따를 것을 주문했다.
“금후 연변 여러 장수들은 적이 오면 아군의 준비가 만전되었을 때 나
가 기막힌 계교로 응전하여 그 위세를 보일 것이며 중과 부적일 때에
는 도전해 오더라도 가볍게 나가지 말아서 변방의 화를 일으키지 말라.
(今後沿邊諸將 當賊來時 我有萬全之勢 則出寄應變 以示其威
如其衆寡不敵 彼雖挑戰 毋得輕出 以構邊禍 : 세종 19년 12월 15일)”
[평안도 분할]
평안도 방어대책으로 제기된 방안 중 하나는 평안도를 분할하자는 안이다. 평안도는 동쪽 끝 여연에서 서쪽 끝 의주까지 벌어져 있는데다가 고을과 고을 사이 거리가 작게는 150리 많게는 200리에 달하므로, 절제사가 효과적으로 지역을 통괄하기 어렵고 따라서 적의 내침이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경상도를 좌도, 우도로 분할한 것과 같이 평안도를 좌우 둘로 나누어 오른쪽을 강계도, 왼쪽을 삭주도로 하자는 안이었다. 세종이 황희에게 의견을 물었다(세종 20년 1월 24일).
황희는 북쪽 적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면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만약 그런 논리라면 해적을 방어하기 위해서 또 평안도 땅을 갈라 별도의 절제사를 둘 것이냐고 반문하였다. 그냥 영변에 절제사 본영을 두고 왼쪽이 공격을 받으면 왼쪽으로, 오른쪽이 공격을 받으면 오른쪽으로 대응하면 큰 탈이 없을 것이라 답변했다. 우찬성 이맹균도 도적의 침략은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이라서 옆 고을에서도 구원하기가 쉽지 않은데 도절제사 영이 강계나 삭주에 있다고 대응이 그렇게 쉽겠냐고 반문했다. 황희와 같은 생각이었다. 최사강과 조계생은 만약 도를 두 갈래로 나누면 병마를 같이 나누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마땅한 절제사를 구하기도 어렵고 병마의 숫자도 적어 어려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좌찬성 신개는 생각이 달랐다. 평안도를 두 개로 나누는 방안이 요령이 있는 것 같으므로 일단 시험 삼아 시행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명칭은 강계여연도와 삭주의주도로 하고, 지략 있고 용맹 높은 자를 절제사로 임명하고 마을과 마을 사이가 너무 멀지 않도록 새로운 마을을 많이 만들자고 건의했다.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세종은 추후 더 깊이 의논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 안은 약 4개월 후 예전대로 그대로 두기로 결정되었다. 다만 여연군에 2품 절제사를 두어 자성까지 관찰하도록 하고 강계에도 2품 수장을 포치하여 이산까지 관장하며 벽동과 창성에 진을 설치하도록 결정하였다(세종 20년 5월 5일).
[평안도 본영의 이전 : 영변에서 강계로]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세종 24년 3월 평안도 관찰사의 보고에 따라 병조가 본영이전 문제를 제기하였다. 평안도 도절제사의 본영이 있는 영변군은 본도의 중앙에 있어 연변지역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이 많이 출몰하는 결빙기(7월 보름 이후)부터 우기(4, 5월)까지 도절제사는 강계부로 이동하여 체류하고 있는 실정이라 본영에 있는 날은 2, 3개월 밖에 되지 않으니 평안도 본영을 영변에서 강계로 이전하자고 건의하므로 결국 본영을 강계로 옮겼다(세종 24년 3월 2일). 영변에서 강계로 본영을 옮겼다고 해서 야인들 침략이 줄어들거나 혹은 방어에 크게 효과를 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강계 본영을 긍적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본영이 강계에 있으니 소문과 위세(聲勢)가 들릴 것이므로 효과가 있다고 하는 반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도적들이 강계 뿐 아니라 의주, 창성 등 여러 곳으로 들어오므로 차라리 영변이 중앙에 있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의정부는 몇 년 전 신개의 평안도 분할안을 기억했다. 경상좌우도와 같이 평안도를 좌우도로 분리하는 것이 묘책이라 생각했다. 우측 강계도에는 위원, 자성, 우예, 여연, 무창의 5개 군을 붙이고, 좌측 삭천도에는 이산, 벽동, 창성, 정녕, 의주, 인산의 6개 군을 붙이도록 건의했다. 그리고 각 도에 2품 이상 절제사를 두고 영변 도절제사는 판도호부사가 되어 강계 및 삭천 절제사를 총괄 감독하도록 하자는 안이었다(세종 29년 10월 29일). 세종은 이 안을 따랐다.
[이천의 평안도 방어대책]
평안도 방면 최고 군사 책임자 이천은 세종의 지속적인 요청에 따라 16개조의 방어대책을 제시해 올렸다(세종 21년 3월 19일). 무엇보다도 평안도 지역의 방어실정이 매우 열악함을 강조하였다. 병마는 적은데 수비부담은 커 병사의 노고가 대단히 심한데다가 도내 7개 읍과 강변 16개 구자에 모두 석성을 쌓는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실컷 돌 성을 쌓아 놓고는 겨울에 그 성을 버려둔다면 그건 ‘쓸데없는 헛것(無用之虛器)’이라는 것이다. 기존의 돌 성을 충분히 활용하되 의주관할 소삭주 넓은 들에 새로 석성을 쌓아 소삭주 및 청수 지역 사람들을 유입하고 나머지 석성지역은 모두 목책으로 대신할 것을 건의하였다. 세종은 병조에 이 건의를 내려 보냈다. 병조가 이천의 건의를 검토한 후 의정부에 의견을 올렸다. 석성을 쌓기로 한 것은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된 일이고 이미 남도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갔으므로 사람수효가 많으므로 석성은 중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의정부는 영중추원사 최윤덕 지중추원사 성달생 등과 같이 의논한 끝에 이미 석성을 구축중인 상무로와 조명간 구자 말고 나머지 14개 구자도 모두 석성 또는 석보를 쌓도록 세종께 건의하여 채택되었다(세종 21년 3월 19일).
[신개의 의주-경원의 장성 제안]
보다 대담한 연변 방어대책을 우의정 신개가 내놓았다. 신개는 일단 부방(赴防)과 입보의 피해를 부각시켰다. 부방이란 국경지역의 진이나 보에 수비를 위하여 가까운 지역이나 혹은 멀리 타 도에서 병력을 동원하는 것을 말하며 입보(入堡)란 농사가 끝난 겨울이나 혹은 갑작스런 비상시에 성이나 혹은 보안으로 피신하는 것을 말한다. 부방의 피해도 대단했다. 평안도와 함길도 방어를 위해 멀리는 경상도나 전라도 지역에서 방어인력이 동원되기도 했으므로 긴 여정에 인명 피해는 물론 재산적 피해도 심각했다. 신개는 입보 피해가 더 심각하다고 주장했다(세종 22년 2월 18일).
(i) 돌아오면 집이 폐허가 되어있고 가재도구가 다 분실되는 피해,
(ii) 곡식을 제대로 가져오지 못하여 겨우내 굶다시피 하는 실정,
길쌈을 못하여 의복이 없어 벌거숭이가 되는 실정,
(iii) 농사철에 변고가 생기면 씨앗이 없어 다음 봄 농사를 기약
못하는 실정,
(iv) 한 곳에 부방군사와 함께 거하므로 발생하는 많은 문란함,
(v) 먹이 부족으로 인해 수없이 죽어가는 우마의 부족 등을 지적했다.
신개는 고려조의 수 천리 석성을 상기시켰다. 고려 덕종이 평장 유소에 명하여 관방(關防)을 설치하고는 압록강 하류 예전 국내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위원, 흥화, 정주, 영해, 영삭, 운주, 안수, 청새, 평노, 영원, 정융, 삭주 등 13개 성을 거쳐 동해로 연결되는 높이 25척, 넓이 25척의 수천리 석성을 축성케 했음을 기억시켰다. 이 성이 수축되자 동서 오랑캐들이 변경을 엿보지 못하고 와서 항복했으며 입보의 폐해나 부방의 피곤함을 제거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백성의 수고는 한 때이고 국가의 이익은 영구하다고 생각했다. 신개는 이 생각을 오래 전부터 품고서 변방의 일을 아는 자와 상의하였으나 부방입보의 피해를 동감하면서도 대장성의 일에 있어서는 옳다는 자는 적고, 옳지 않다는 자가 많아 말씀드리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의주에서 경원까지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자연요해가 매우 많아서 실제로 성을 쌓아야 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석성 축조 문제는 이미 최윤덕이 제기한 바가 있었다. 적이 쳐들어 올 때마다 고을이 함락되는 이유가 바로 성을 축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최윤덕은 압록강 연변 요로에 흙성(土城)이 아닌 돌성(石城)을 쌓을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축성부역에 동원된 사람들은 근무 날짜를 딱 정하여 그 기한이 끝나 즉시 돌려보내면 문제가 많을 것이라 비판했다. 날짜를 한정하면 일을 태만히 하고 날만 가기를 기다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자를 정하는 대신 작업구간을 할당하여 그 작업이 끝나야만 임무를 면제해 줘야 빈둥대며 태만하지 않을 것이라 지적했다. 최윤덕이 나가자 세종은 승지들에게 물어봤다. 승지들은 일수를 정해 부역하는 것은 바꿀 수 없는 확고한 법이라 지적했다. 그렇지만 세종의 생각은 최윤덕에 가까웠다.
“군인들이 날짜만 허비하고 힘을 다하지 않는 자가 있다. 날짜를 참작
하여 축조를 끝낸 다음에 놓아주도록 하라. 만일 정해진 날짜 안에 받은
성의 기초(城基) 축조를 끝내거든 즉시 놓아주어라. 군인들이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軍人徒費日數 不盡其力者有之 量期赴役畢築後放之 若限日內
畢築所授城基 則卽放之 使軍人各盡其力爲便 : 세종 16년 5월 29일)”
세종은 최윤덕의 건의에 따라 압록강변 요충지에 축성하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만포구자, 이산의 신채리, 공주, 경원, 영북, 갑산의 무로 등지에 석성 축조를 속으로 검토하고 있던 참이었다.
신개가 장성제안을 한 지 나흘 만에 세종은 조용히 도승지 김돈을 불렀다. 장성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진나라가 만리장성을 쌓아 후세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또 두안이 황하에 다리를 놓아 당시의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장성은 만대의 큰 소용이 되었고 두안의 다리도 유익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긴 안목으로 보면 장성도 고려해 볼 만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따라서 만세의 원대한 대책을 세우려 하는 자는 일시의
공과 힘씀을 계산하지 않는다.
(故欲建萬世之長策者 不計一時之功役 : 세종 22년 2월 2일)”
물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꼭 다 잇겠다는 것은 아니고 중요한 요새만이라도 석성을 쌓고 필요에 따라 목책을 세우거나 구덩이를 파면 백성들에게 부방과 입보의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도승지 김돈이 맞장구를 쳤다. 만세의 장구한 장책이므로 당연히 성을 쌓아야 하며 장성을 쌓을 수없는 곳엔 목책과 보를 설치하고 능력 있는 장수로 순시하도록 하자고 했다. 세종은 병조판서 황보인과 참판 신인손에게 가서 책임을 맡을 자를 의논하도록 하라고 지시하면서 말했다.
“너희들 의논하는 것을 은밀히 하여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汝等密議 愼勿露 : 세종 22년 2월 22일)”
세 사람이 의논한 끝에 자기들 세 사람 말고는 적당한 사람이 없다고 보고했다. 세종은 그러면 황보인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황보인을 평안도함길도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보내었다. 단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장성문제가 아니라 기존에 있는 성보를 늘일 것인지 줄일 것인지 검사하는 것으로 위장하도록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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