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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8> 원로원파와 민중파의 살생부 대결 (기원전 107~78)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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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2월13일 16시49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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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라쿠스 형제(기원전 134~122)의 개혁 실패로, 로마 역사는 공화정 말기의 진영 싸움과 내란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파와 호민관을 중심으로 한 민중파가 조직화된 양상으로 싸움이 전개되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었던 개혁의 바통은 민중파의 기수 마리우스에게 넘어갔다.

마리우스는 이탈리아 중부 아르피눔의 부유한 기사 계급 가문에서 태어나 군인으로 성공하여 로마의 정치 지도자로 등장했다. 기원전 107년 집정관에 당선된 이후 총 7번이나 집정관을 역임했다. 당시에 한번 집정관을 지내면 10년이 경과해야 다시 집정관에 출마할 자격이 주어졌지만, 국가 비상사태의 경우에는 예외였다. 마리우스가 그만큼 출중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마리우스는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북아프리카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나아가 이탈리아 북부의 켈트족을 상대로 싸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이 같은 성취 덕분에 귀족이 아닌 신인이면서도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당선될 수 있었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명문 가문과 혼인하여 귀족과의 유대 관계도 강화해나갔다. 마리우스의 부인이 훗날 등장하는 카이사르의 고모다. 

 

마리우스는 군사 제도를 개혁했다. 로마군의 모집 방법을 징집제뿐만 아니라 지원제를 도입하여 보완했다. 과거에는 재산이 있는 시민만이 군인이 될 수 있었다. 재산이 없는 무산계급은 아예 군인이 될 수 없었다. 마리우스는 무산계급도 군인이 되는 길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마리우스가 원로원 의원들에게 군사 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한 내용을 콜린 매컬로의 『로마의 일인자』에서 살펴보자. 

 

“이제 이탈리아에는 최하층민이 바닥났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전부 노예로 전락했기 때문이죠. 원로원 의원 여러분, 이탈리아의 최하층민에게는 농지에서 노예로 일하는 것보다 더 나은 임무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전통적인 형태의 군대를 조직할 수 없습니다. 군에 복무할 만큼 재산을 가진 남자들은 너무 늙었거나 너무 어리고, 적당한 나이의 남자들은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군에 복무할 수 있는 것은 최하층민뿐입니다.”

 

마리우스는 군사 재원의 충원이 어려운 때 군사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군사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특히 용병의 고용 관계를 국가가 아닌 장군과 맺게 함으로써 장군들은 경쟁적으로 우수한 병사를 모집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이제 로마의 병역은 시민의 의무에서 직업으로 바뀌었다. 장군과 군사가 피호 관계가 되어 장군은 파트로네스가 되고 병사는 클리엔테스의 관계가 된 것이다. 

 

동시에 군사 제도 개혁의 문제점도 나타났다.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불안 요인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지휘관직의 가치가 높아졌고, 좀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해외에서 군사적 분쟁을 일으키려는 유혹도 커졌다. 더 불길한 것은 실전 경험이 많고 개인적으로 충직한 군대의 뒷받침을 받는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령관은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상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내전을 일으켜서라도 정적들을 누르고 일어설 만한 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마리우스에게 반기를 들고 대항한 사람이 술라다. 그는 코르넬리우스 가문에 속하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세가 기울어 가난했다. 하지만 쾌활한 성격에 대인관계가 좋았고, 주변 여인들을 통해 많은 재산을 축적하여 정계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그는 집정관 마리우스의 부하로 아프리카 전쟁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술라는 민중파인 마리우스와 정치 노선이 달라 결별하고 원로원파를 대변하는 정적으로 변했다. 기원전 82년, 술라는 민중파를 상대로 한 내전에서 승리하자 살생부를 만들어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술라가 작성한 살생부에는 90명의 원로원 의원, 15명의 전직 집정관, 2,600명의 기사 계급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 살생부에는 18세의 젊은이 카이사르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민중파의 대부인 마리우스의 처조카이며 킨나의 사위라는 이유로 인해 제거되어야 할 인물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술라의 부하들이 카이사르가 아버지도 없는 집안의 후계자로서, 아직 나이가 젊고 정치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살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때 술라가 측근들에게 했던 말을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 이렇게 전한다. 

“기억하라. 그대들이 이토록 간절히 살려내고자 하는 이 젊은이가 언젠가는 우리가 진심으로 수호하고자 했던 귀족 정치를 무너뜨릴 것이다. 카이사르 안에 여럿의 마리우스가 보인다.” 

 

기원전 81년, 술라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이 되어 전권을 가지고 호민관 및 민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원로원 지배 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각종의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술라는 기원전 79년 돌연 독재관을 사임하고 은퇴하여 이듬해 죽었다. 

 

공화정 말기의 민중파와 원로원파의 두 주역 마리우스와 술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마리우스는 기사계급 출신이고 술라는 귀족 출신이다. 또한 마리우스는 기사계급이라 경제력이 풍부했고 술라는 귀족이지만 돈이 없었다. 로마에서 정치로 성공하려면 재력이 중요하다. 젊었을 때 돈이 없어 고민하는 술라의 모습을 콜린 매컬로는 『로마의 일인자』에서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아, 내년에 감찰관 심사가 열리는 포로 로마노에서 자신을 소개하고 연 100만 세스테르티우스(로마의 화폐 단위)의 수입을 내는 자산을 가졌다고 입증할 수만 있다면! 이는 원로원 의원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재산이었다. 그게 안 된다면 연 4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수입이라도! 이는 기사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자산이 전혀 없었다.” 

 

로마 공화정의 후기 역사는 그라쿠스 형제, 마리우스, 술라를 거치면서 민중파가 권력을 잡으면 원로원파를 숙청하고 원로원파가 권력을 잡으면 민중파를 숙청하는 식으로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혼미한 역사였다. 이와 같은 살생부로 이어지는 피의 보복을 중단해야 되겠다고 나선 인물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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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2월13일 16시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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