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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서른세 번째 이야기 ‘화는 들불처럼 번진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2월10일 17시04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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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화, 존재의 번뇌 

  동물의 뇌에는 아미그달라(Amigdala 편도체)라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외부대상과 접할 때 그것이 자기개체에게 위협이 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능을 갖는 부분이라고 한다. 뇌 생리학자들이 동물실험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했는데, 아미그달라가 마비된 쥐는 고양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사람의 뇌에도 아미그달라가 있다. 아미그달라의 작동원리는 단순하다. 자기 개체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 이롭지도 해롭지도 않은지를 판단한다. 해롭다고 판단되면 아미그달라에 경고등이 ‘팍’ 켜진다.

 

 

 

  아비담마에서 웨다나(受 느낌)를 이 세 가지로 나누는 통찰과 딱 맞아 떨어지는 분석이다. 나쁜 느낌은 바로 도사(dosa 嗔)로 이어진다. 도사는 분노, 싫음, 짜증, 화... 등등의 모든 부정적 느낌을 통칭하는 말이다. 도사가 바로 자기 개체의 존재를 위협하는 경우 작동하는 원리에 비추어 논서가 왜 도사를 ‘존재의 번뇌’라고 표현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뇌는 보통 20년에 걸쳐 성장하는데 아미그달라는 최초 5년 동안 형성돼 완성된다. 그러니까 다섯 살 어린아이나 스무 살 청년이나 예순 살 노인이나 아미그달라는 똑같은 매커니즘으로 작동한다는 말이 된다. 아무리 어른이라고 해도 화낼 때는 다섯 살짜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누구든 화가 나면 앞뒤를 재지 못한다.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함께 상하게 한다. 좋았던 인간관계들도 보통 이 화에 의해 무너진다. 

  화는 내면 낼수록 커지는 속성이 있다. 마치 들불처럼 번진다. 화를 낸다고 결코 분풀이가 되지 않는다. 청정도론의 표현을 보자. 

 

“두들겨 맞은 독사처럼 잔인함을 특징으로 가진다.

한 모금의 독처럼 퍼지는 역할을 한다.

자기의 의지처를 태우는 역할을 한다.

마치 숲 속의 불처럼.

성내고 있음으로 나타난다.

마치 기회를 포착한 원수처럼.

성을 낼 대상이 가까운 원인이다.

독소가 섞인 오줌과 같다고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

 

  화를 참기란 참 어렵다. 하지만 화를 내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없는 관계라면 참는 수밖에 없다. 화를 참으면 병이 된다. 요즘말로 스트레스고, 만병의 근원이다. 만만한 상대라면 화를 터뜨리면 잠시 시원하지만 점점 더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한다. 빈도가 높아지고 습관화되고 몹쓸 인격을 형성시킨다.

  화를 다루는 유일한 방법은 화나는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아미그달라에 경고등이 켜진 뒤 90초 동안 별다른 위험이 없으면 자동적으로 꺼진다고 한다. 분노의 열차가 지나가는 90초 동안 마음의 건널목을 지켜보면서 기다리는 방법이다. ‘화가 나면 수를 세라’는 세간의 지혜는 근거가 있고 유용하다. 

  수행의 길을 가는 자는 늘 마음을 살펴야 한다. 일부러 약을 올리고 화내는지 안 내는지를 살피는 것은 도인 판별법 중 하나이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벌컥벌컥 화를 내는 인격을 가진 도인은 없다. 화를 극복해야 자비라는 덕이 갖춰지지 않겠는가? 

 

  옻통 같은 마음 

  마음에 색깔이 있다면? 아마도 새까맣지 않을까? 불교는 중생의 마음에는 어리석음이 운명처럼 도사리고 있다고 통찰한다. 모하(moha 어리석음 痴)는 모든 해로운 마음부수가 일어날 때 항상 함께 일어난다. 오히려 그것의 바탕이라고 해야 옳겠다.

  모하는 아비자(avijja 無明)와 동의어이다. 무명은 마음의 어두운 상태를 가리킨다. 그 어둠은 예로부터 옻통(漆桶)에 비유돼 왔다. 가구나 목기에 검은 색을 입힐 때 쓰는 옻칠을 담은 통이 옻통이다. 그야말로 까만색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마음이 그러하다니, 마음 색깔은 까망일 수밖에 없겠다. 청정도론은 모하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통찰하지 않는 역할을 한다.

대상의 본성을 덮어버린다.

바른 수행의 결여로 나타난다.

지혜 없이 마음에 새김이 가까운 원인이다.

모든 해로움의 뿌리가 된다.”

(청정도론)

 

  어둠의 저편에 빛이 있듯, 모하의 맞은편에는 지혜가 있다. 모하는 어둠에, 지혜는 빛에 비유된다. 지혜는 있는 그대로 아는 능력이다. 마음에 지혜가 있으면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반면 지혜가 없으면 그릇된 견해를 갖게 된다. 

  그릇된 견해를 딧띠(ditthi 邪見)이라고 한다. 논서들은 어리석음과 사견, 즉 모하와 딧띠를 각각 4가지 번뇌 중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 둘은 인과관계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사실상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니, 둘을 통틀어 ‘반짇고리’라고 부르듯. 마음 깊숙이 도사린 모하가 딧띠로 드러나는 그런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중생의 눈을 가리는 사견을 경전이나 논서는 경계하고 또 경계한다.

 

“삿된 견해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청정도론 13-90)

 

“비구들이여, 이보다 더 큰 허물은 

단 한 법도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삿된 견해이다.”

(증지부 33)

 

  사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고 보편적이며 엄청난 집착을 부르는 것이 바로 有身見(sakaya-ditthi)이다. 유신견은 몸을 가진 내가 있다는 견해이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인 ‘無我’와 상대되는 견해이다. 무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유신견 때문이다. 유신견에서 벗어나기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초기불교의 수행론은 유신견을 버리면 성인의 반열에 든다고 가르친다. 유신견에서 벗어나려면 지혜를 닦아야 한다. 붓다가 가르친 수행법은 그래서 지혜를 닦고 기르는 데로 귀착한다. 사마타는 선정을 얻는 수행이고, 위빠사나는 지혜를 닦는 수행이다. 선정과 지혜는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되는 수행의 두 바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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