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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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문화영토를 무한 확장하는 꿈.

한국어는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전 세계인에게 주목받고 있다. 러시아, 터키, 태국, 인도 등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선정하는 국가는 약 41개국에 이르고 있고 베트남이 전 세계 최초로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선정했다. 한국어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한국어의 표현법인 한글의 우수성이 매우 큰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한글은 세종대왕님이 밝힌 바와 같이 똑똑한 사람은 반나절에도 익힐 만큼 쉽고 합리적이다. 특히 컴퓨터와 모바일의 보급이 늘어나면서 한글의 우수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가까운 나라 중국과 일본의 경우는 자기네 나라말로는 도저히 키보드 자판을 구성할 수 없는 문제가 있으나 한글의 경우는 어떤 디바이스건 간에 쉽게 적용되고 활용된다. 국격의 상승과 한류문화의 확산이 강해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의 보물인 한글과 한국어의 수출을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2외국어로 선정하는 국가는 약 41개국

전 세계 나라 수는 국제표준화기구에 의거한 경우 249개국 그리고 UN에 등록 승인된 국가는 196개국이다. 우리나라의 세계무역 순위는 10~8위 수준이다. 거대 무역국인 만큼 교역을 하는 나라는 거의 전 세계적이다. 그러나 그 비중을 보면 전체 교역 내용의 3/4은 중국, 미국, 베트남, 홍콩, 일본, 대만, 인도, 싱가포르, 독일, 말레이시아가 주요 수출국이고 중국, 미국, 일본, 독일, 베트남, 호주, 대만,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말레이시아가 주요 수입국이다. 중복된 나라를 묶으면 13개 국가로 압축이 된다.

전 세계 나라를 약 200개라고 보고 우리의 주요 교역국이 13개 나라라면 187개국에는 더 많은 교역의 기회가 있다는 단순 계산이 나온다. 물론 교역이라는 것이 국가나 해당 국민의 필요에 의해 성립되므로 무턱대고 접근해서는 안 될 일이므로 국익에 우선한 합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어 수출 방법

우선 한국어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수출할 곳이 분명해야 한다. 한국인이 거점을 만든 세계적인 네트워크 중에 태권도가 있다. 태권도는 212개국에서 15천만 명이 즐기는 가장 대중적인 무술이며 1만 여개 이상의 도장이 있다. 다른 형태의 네트워크는 750만의 재외동포로 구성된 한상네트워크다. ‘세계한상대회180여개 국에서 기업활동을 하는 기업인들의 모임으로 활발히 기업을 운영하며 대회에 참가하는 기업수가 5000여개에 달한다. 여기에 국가가 취업준비생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지원금을 결합하면 효과적인 답을 얻을 수 있다.

해외취업준비생에게 국가의 해외정착지원금이 선진국은 400만원, 우대국가에는 800만원의 지원금이 지급되고 있다. 이를 보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이미 태권도 교육은 어느나라를 막론하고 한국어로 교육을 한다. 여기에 사범이 수련 시간 외에 한국어 교육을 하는 코스를 만든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구체적인 방법은 한국어 교육 자격증을 주고 대한민국이 공인하는 교육시설이라는 인증을 하며 지원금과 관리 제도를 만들면 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 더불어 해외취업준비생의 인턴쉽을 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여 우리나라 국민의 일자리 창출도 되고 해당 국가의 국민도 한국에 들어와 취업할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고구려의 유민으로 알려져 있는 라후족과 묘족 등 한국어와 유사도가 높으며 어순이 거의 비슷한 종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일이다. 그 외에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가 상호교류 및 인력 수급을 위해 진행하는 베트남,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기술연수생의 교육에는 한국어 자격 취득 시험이 있는데 이를 더욱 확대한다면 효과적일 수 있다.

 

한국어 수출의 이점

위와 같은 방법들로 한국어를 수출하면 생기는 이점은 당연히 국격이 높아지고 문화영토의 확장으로 기존의 교역내용과는 확연히 다른 교역량과 수준이 높아지게 될 수 있다. 그 이점은 굳이 거론할 필요 없이 많이 알고 있으므로 효과적으로 실천하면 된다고 본다.

 

효과적인 실천이 필요한 것을 조금 더 서술하겠다.

 

위에서 거론한 코트라의 경우 전세계 84개국에 10개 지역본부, 129개 무역관을 운영중인 한국 경제의 대외 경쟁력 진흥기관이다. 코트라 해외무역관의 고유 업무는 수출상품의 홍보와 현지 정보수집 및 활용 등 국내 기업과 상품, 서비스의 현지 진출 지원이 중심이지만 해외 취업을 위한 업무도 추진하고 있는데 이 업무의 필요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요구되고 있으나 취업 효과는 크지 않다. 이런 문제의 원인은 현지 기업인과 한국인과의 소통문제이다. 물론 해외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은 현지어를 능숙하게 익혀서 진출하지만 현지 기업인의 인식은 다를 수 있다. 그가 만약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인과 한국 상품에 대한 가치 측정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미 진행하고 있는 정책이라도 종합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한국어와 한류문화보급이 직접적으로 연계된 프로그램으로 재구성하는 필요성이 있다.

 

대한민국의 문화영토를 무한 확장하는 꿈을 꿔야 한다.

 

고맥락사회인 동양이 오랜기간 번영을 누리다가 몇 세기 전부터 저맥락사회인 서양에 뒤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현상은 현재 문명의 발달 방향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인데 현재의 문명은 자본주의에 의한 소비와 생산의 메커니즘에서 출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새로운 것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내야하는 문제를 품고 있는 자본주의는 기존의 없는 것을 만들기 위한 사고를 해야 하고 이런 사고의 핵심은 고대그리스사상에서 출발하였다. 이런 사상의 배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분야는 역시 철학과 과학이지만 이를 일반인도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분야로 현대미술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서양미술이라는 분야를 받아들임에 있어 일본의 오류를 그대로 받아들여 아직도 이해가 안되고 어려운 분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이런 오류를 정리하고 현대미술이 가진 근원에 대한 탐구 정신을 통해 고대그리스인들의 사고법을 이해한다. 또한 사고가 연계되어있는 19세기 전후의 서양 철학과 과학자들이 계승하여 발전시킨 발견과 발명의 사고법을 이해하여 4차산업혁명의 물결을 도도하고 거침없이 넘어가자는 마음으ᅟ로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본편은 몬드리안의 사례를 통해 그가 그토록 고민했던 나무속에 담긴 우주의 질서는 어떤 것인지를 알아본다.

코로나 사태의 거리두기 실천으로 인하여 본 행사는 9월1일에 예정하였으나 정부 지침에 의거 보름간 연기하였으나 여전히 경각심을 가져야하는 시기이므로 대상 수상자만 모시고 최소한의 행사를 진행했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미술의 전래에 있어 용어적 오류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현대미술은 우리의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이해가 안되는 문제로 인하여 기피 현상이 생기는 것 이 문제입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한 실천입니다.

- 대한상상창의 공모전 조직위원장 Kai Jun​

 

수상자 명단


대상 : 
김용석     우수상민경진, 박용진, 양승규

 

대상 수상자 감상문


相濡以沫

김용석

 

상유이말(相濡以沫). 곤경 속에서도 작은 힘을 보태어 서로 돕는다.” 물고기들이 샘물이 마르자 자신들의 거품으로 서로의 몸을 적셔주었다는 내용의 사자성어이다. 물고기가 현재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 이 세상에 자신만의 이익을 찾는 사람이 가득하다면 세상은 결국 공사(共死)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말이다. 게다가 이번 코로나 사태로 세상은 더욱 아비규환이 되었다. 하지만 공생(共生)을 향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속한 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뒤엉켜서 싸운다. 그러다 함께 타들어 가고 만다.

 

최근 개인의 이기심, 집단의 이기심으로 인해 코로나 확진자가 많이 발생했다. 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국민에게 주어진 권리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자유만을 위해 행동하여 코로나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은 지나친 이기심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 지나친 이기심으로 인하여 속한 집단이 사회의 악으로 낙인찍혀버린 것은 스스로 발등을 찍는 일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타들어 가기보다 함께 힘을 합쳐 공생(共生)의 길을 추구할 때이다.

 

작품 속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그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안긴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이다. 의지는 상호 간의 믿음과 존중이 있을 때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어지러운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의지하는 모습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공생(共生)의 길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의료인력의 부족함을 느끼고 공공 의대 신설 등 의료인력 보충에 대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의료인들과 합의가 되지 않은 상황이기에 충돌이 계속되고 있고 의사들은 파업을 선언한 상태이다. 이로 인한 피해는 누구에게 가는 것인지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누구를 위한 정책이고, 누구를 위하여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였는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만 요구하기보다 서로 믿고 의지하며 공생(共生)을 위한 행동을 한다면 모두가 작품 속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닐 날이 오지 않을까.

 

수상자 소감은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https://youtu.be/nIiAHNfUqhw


새로운 방송을 소개합니다.

 

대한상상창의 방송을 함께 진행하는 카이전 교수와 장엘리 앵커입니다.

서양화가이면서 교수인 Kai Jun이 연구한 서양문화와 동 서양인의 심리와 사고의 차이를 가지고 한국인이 알아야하는 창조적 사고의 방법을 얘기합니다.

이번 방송은 동서양인의 차이에 대한 개략적 설명을 진행합니다.

 

동양인은 전체, 관계, 변화를 바탕으로 세상을 보고 서양인은 부분, 개별, 불변을 바탕으로 세상을 봅니다. 이런 차이점들이 현재까지 이어지면서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나타나는데 이 차이가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4차산업혁명에서 많은 차이를 내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과거에서부터 내려온 사고의 차이는 무엇이 더 좋다고 판단 할 수는 없으나 4차산업혁명과 관련된 산업을 일으키는 데에는 서양식 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양미술을 통하여 창의적 사고법을 알아보고 한국인의 장점을 더욱 살려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김명곤 / 꿈을 싣고 오는 자동차 / 72.7× 60.6cm / Acrylic on Canvas / 2020

 

 

꿈을 싣고 오는 자동차라는 주제로 전시를 열고 있는 김명곤 작가는 1995년 첫 전시부터 현재까지 희망이라는 무형의 대상과 자동차를 결합한 시리즈물을 연작하고 있다. 희망을 표현함에 있어 이 되기도 하고 선물상자’, ‘풍선이 되기도 한다. 이 시리즈물들에서 나타나는 자동차의 형태, 희망의 대상, 배경의 어우러짐은 각각 차이가 있으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중앙에 압도적으로 거대하게 배치되는 희망을 실은 자동차이다. 이 구도의 설정은 보는 이를 당혹하게 할 정도로 크게 나타나는데 이는 꿈, 희망이라는 주제를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이 벅차 오른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벅찬 감정들이 작가에게 발현된 이유가 궁금해진다

 

김명곤 / 꿈을 싣고 오는 자동차 / 112 × 112cm​ / Acrylic on Canvas / 2020


김명곤 / 꿈을 싣고 오는 자동차 / 117 × 80cm​ / Acrylic on Canvas / 2020

 

작가 노트를 보면 그는 겨울에 앙상한 가지가 봄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 맺는 과정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의 관심과 심리적 표현 속에 나타나는 조각들을 퍼즐처럼 맞추면 생명 존중’ ‘삶의 환희라는 내용이 보인다.
 

 

김명곤 / 꿈을 싣고 오는 자동차 / 117× 91.0cm / Acrylic on Canvas / 2020

 


김명곤 / 비밀의 정원 / 131 × 131cm  / Acrylic on canvas / 2020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시대.

그가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더욱 중요하게 느껴지는 때이다. 

전시는 '갤러리 작'에서 9월24일까지 열린다. http://galleryjhak.com

 

 

 

 

김명곤 / Kim, Myeong - Gon

 

학력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 전공(석사)

전시경력

<주요개인전> (1995 ~ 2017)

2020 꿈을 싣고 오는 자동차 (갤러리 작. 서울)

2017 즐겁지 아니한가! (갤러리 H. 서울)

2016 상상은 현실이 된다 (윤 갤러리. 서울)

2015 꿈을 싣고 오는 자동차 (갤러리 작. 서울)

꿈꾸는 자의 행복이야기 (롯데갤러리. 서울) 20여 회

<주요단체전> (1993 ~2017)

Art 30ists(sia gallery. 뉴욕. 미국) / Red Gate(호감 갤러리. 서울) / SMART EYE : 대중의 새로운 시선 7(슈페리어 갤러리. 서울) 200여회

아트페어 (2007~2017)

ART CENTRAL HK (홍콩), 대만아트페어(대만), CONTEXT Art Miami 2015(마이애미. 미국), Asia contemporary art show (홍콩), 부산 아트쇼 (벡스코. 부산), KIAF (코엑스. 서울), 마이애미 아트페어(마이애미. 미국), LA 아트페어 (로스엔젤리스. 미국), 휴스턴 아트페어(휴스턴. 미국), 찰즈부르크 아트페어 (찰즈부르크, 오스트리아)

 

작품소장처 :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대명리조트, )방태, )메드비젼, 산업은행, 하나은행, 연세 대학교 기념관, 경향신문, 순여성병원, 그람피하우스, 로이코 외 개인 소장 

4차산업혁명에서 창의력은 매우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창의력은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새롭게 창안해 내는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과정입니다. 창의력은 창조성이라고도 말하며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통찰에 힘입어 발휘됩니다. 이 의식과 무의식의 통찰이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훈련이 현대미술감상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1873년 일본의 만국박람회 출품 당시 독일어 쿤스트게베르베(Kunstgewerbe 공예미술), 빌던데 쿤스트(Bildende Kunst조형미술)등의 용어가 모두 미술이라는 하나의 용어로 번역되어 사용되면서 미술이라는 개념의 정확한 접근이 어려워졌습니다. 이런 혼선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진행되면서 미술은 어려운 것이다라는 관념이 생겨났고 이해가 안 되는 난해함 속에서 현재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스스로 한문 뜻으로 해석하여 美術(아름다운 재주) 특히 예쁘고 보기 좋은 것으로 국한시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양의 미술은 사실주의(realism)와 이상주의(idealism)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현대미술은 의식, 무의식의 결합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제작됩니다. 사실주의와 다르게 이상주의는 작가의 관념적 이상의 표현이 주된 것이어서 이런 류의 작품은 오감을 넘어 육감으로 다가가는 깊은 자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름답고 예쁘고 보기 좋은 표현도 좋지만 폭넓은 현대미술을 감상하여 상상력과 창의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4차산업혁명으로 가는 길목에서 국민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높이고 싶은 전완식 드림 

 

 

공모전 주제 작품


 




대상 시상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시 중에서 황찬수 교수의 흥미로운 전시를 소개한다.

 

‘Space and Memory’라는 타이틀로 전시되는 이번 작품들은 가장 많이 읽혀진 서양미술사의 저자인 곰브리치의 유명한 말 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곱씹어 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이 말이 떠오르게 된 이유는 작가의 의식 흐름이 곧 작품인데 이 작품들을 감상하다보면 작가에게 더 집중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동기 부여가 된다. 

 

Space and Memory-2005, acrylic on canvas, 130.3x193.9cm, 2020

 

화면에는 특별한 시각 정보가 담겨있지 않다. 기호도 상징도 없다. 그저 붓의 터치를 일률적으로 남긴 흔적들이 색의 율동으로 하나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단지 색이라는 조형요소와 시각 정보로 작품을 이끌어 가는 작가의 힘은 깊은 사색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도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작품을 감상하다가 다시 전시 타이틀을 떠올려본다. ‘공간과 기억작가가 이 세상에 외치려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Space and Memory-1809, acrylic on canvas, 162x130cm, 2018

  

Space and Memory-2003, acrylic on canvas, 130x130cm, 2020

 

Space and Memory-1905, acrylic on canvas, 45.5x53cm, 2019

 

황찬수작가의 작가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있다. ‘감동과 영감은 도처에서 온다. 자연에서, 여행길에서, 일상에서 이들은 때론 강하게 때론 확실하진 않으나 잔잔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들은 간략한 에스키스나 글귀, 사진으로 저장되어 처음의 감동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장치가 된다. 나는 이들을 억지로 조합하거나 쥐어짜내려 하지 않고 내 몸 안에서 걸러져 자연스레 표출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무척 짧기도 하고 무척 길기도 하다. 나는 작업 중의 자유를 즐기기에 치밀하게 계획된 에스키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한 가지 주제에 매여 작업하기 보다는 이렇듯 도처에서 다가오는 자극과 감동, 영감, 새로운 경험을 자유로이 다룸으로써 내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다.’ 이 글에서 보듯이 그의 글 속에는 자연과 환경, 상황을 자신의 감성으로 재해석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나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을 평론했던 전 대구미술관장 최승훈의 글에도 그에겐 그림의 대상이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건이 아니다. 단지 그림의 동기가 되는 조형충동이 일어나는 우연적 만남 즉, 작가가 만난 어느 시점에서의 정황이 출발점이 된다. 이 또한 직접 현장에서의 작업이 아닌 스케치나 사진 등의 기록에 의한 스튜디오작업을 하므로 순전히 기억에 의한 반추적 사유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즉흥적이고 격정적일 수 있는 현장에서의 일차적 심리상태는 시간을 여과하며 성찰의 과정을 거쳐 보다 정제되어 나타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그림은 만남의 정황에 대한 자신의 심적 반응을 담아내는 것이다. 순수한 감성적 반응이며 타고난 음악적 감흥에 의한 연주를 이루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Space and Memory-2006, acrylic on canvas, 100x100cm, 2020

윗글은 작가가 '본다'는 1차적인 시각정보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자유인의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한 자유인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진전한 재해석의 깊이를 피력하고 있다. 그것은 자유인이 가진 순순한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장소나 상황에서 느낀 감동을 깊이 새겨 숙성된 자기만의 기억으로 풀어내는 것은 우리가 어릴 때 느꼈던 순수한 짝사랑의 메커니즘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하여 만들어진 어떤 형상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다는 느낌으로 다가 올 수 밖에 없다. 황찬수는 이런 순수미의 매커니즘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 시간이라는 숙성 도구를 이용하여 풀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Sunshine-1901, acrylic on canvas, 130x130cm, 2019

 

순수한 마음과 시간으로 숙성된 결과물의 향연인 이번 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작가의 생각을 작품을 통해 소통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전시는 630일까지 서초구에 있는 Gallery Mark에서 진행된다.

 

 

황 찬 수 (b.1956)

 

 

학력

1985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1979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

 

수상

1999 Asian Artist Award / Vermont Studio Center, USA

Residency

1999 Vermont Studio Center, VT, USA

1997 Vermont Studio Center, VT, USA

 

개인전

2020 갤러리마크, 서울

2018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2017 리서울갤러리, 서울

2017 Space 139 Gallery, 서울

2016 Cinematheque Gallery, 서울

2015 갤러리 두인, 서울

2015 Sedec Art Gallery, 서울

2014 이브갤러리, 서울

2014 인사갤러리, 서울

2012 청아아트센터, 서울

2011 하나대투 청담금융센터 갤러리, 서울

2008 가일미술관, 경기 가평

2007 Infusion Gallery, Los Angeles, USA

2006 갤러리 아트사이드, 서울

2006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2005 Gallery Gora, Montreal, Canada

1999 인데코 갤러리, 서울

1999 Red Mill Gallery, VT. USA

1996 갤러리 사각, 서울

1992 신세계미술관, 서울

1989 3갤러리, 서울

1987 3미술관, 서울

 

외 다수의 단체전 참가
 

 

 


 

 

 

본 칼럼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공통되게 묻는 질문이 있다. '미술을 통해 얻은 기쁨 또는 행복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술을 자주 접하지 않았던 일반인들이 미술로 어떤 정신적 만족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김중식 작가에게도 동일하게 물었더니 생각지도 못한 그림을 통해 사랑을 배웠다.”라는 답을 들었다. 언뜻 생각해보면 이성간의 사랑이나 부모 자식 간의 사랑 등등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의 말을 잘 들어보면 작가로서 누리는 작업 과정에서 잉태되는 창작의 환희, 그리고 소재와 자신과의 합치로 생기는 일체감의 만족감 등을 얘기하고 있다.


 김중식/​오드리헵번과 철화백자/ 116x91cm /2019년 /캔버스위에 아크릴릭

 

그의 작가 노트의 일부를 보면 나는 매일 새벽에 붓을 잡는다새벽 햇살에 비친 유리알 처럼 맑은 아침이슬을 바라보고, 작은 우주를 생각하며, 내 작품은 탄생된다.

보석 같은 물방울 속으로 비치는 내 여인들의 모습은 그 무엇 하고도 바꿀 수 없는 순 수함 그 자체이다.

난 그래서 새벽을 좋아한다. 밤새 고통 속에서  잉태한 나의 생명체가 탄생되며, 내가 꿈꿔왔던 여인들이 살아 움직인다.

  ...중략...

난 하루하루가 즐겁고 신이난다. 내주변의 기쁨, 환희, 시기, 질투, 탄생, 죽음을 나의 행복이 가득한 달항아리 속에 가두어 아름다움으로 탄생시키고 싶다.‘ 라고 되어있다.


 김중식/ ​마릴린먼로와 달항아리 /130x130cm /2010년/캔버스위에아크릴릭

 

그의 작품 속에 주로 나타나는 대상은 대중적으로 익숙한 인물들과 달항아리이며 미려하게 정리된 형식으로 본다면 팝아트의 유형과 같다. 그러나 다른 점이 많이 나타난다. 기존에 많이 알려져 있는 팝아티스트들은 일상의 이미지를 인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을 미학화하고 사회 체계화하여 기호체계로 사용한다. 특히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스타인, 클래스 올덴버그 등은 사회가 익히 알고 있는 마릴린 먼로의 얼굴, 미키 마우스의 이미지, 세븐 업의 마크, 코카콜라병, 지폐 따위를 작품에 도입함으로써 기호체계와 그들 자신의 테마를 겹쳐서 표현했다. 또한 팝아트가 개방비개성을 특징으로 하는 점도 김중식 작가의 작품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김중식/​진주귀걸이소녀와달항아리 /90x73cm /2019년 /캔버스위에아크릴릭

 

팝아트 작품이 인쇄물이 가진 망점을 표현하여 일반의 미학화를 추구하는데 반면 김중식 작가의 망점은 달항아리를 구성하고 달항아리와 하부의 인물이 공간 속에서 분리되기도 하고 겹쳐져 보이기도 하는 현상을 포착하게 구성 되어있다.

점이라는 시각요소는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그 의도와 현상은 전혀 다른 미를 추구하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일반적인 팝아트와 다른 또 하나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원근감과 공간감이다.

점들의 크기와 미세한 명도 차이를 이용하여 아련한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미묘한 공간의 접합과 분리 현상 속에서 감상자는 시각적 감각을 넘어 심리적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감상자의 감성 터치를 의도한 구분법으로 보인다.

이렇게 전혀 다른 미의 가치의 구성이 결국 사랑이라는 추상적이며 감성적인 개념을 겹쳐서 나타내는 김중식만의 특별한 방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김중식/​오드리헵번과 비너스/ 112x112cm/ 2019년/캔버스위에아크릴릭

 

팝아트가 196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현재까지 발전해오면서 수많은 작가들이 있었고 그에 따른 수많은 작품들이 있었으나 사랑을 품은 팝아트는 확연히 차별되는 작품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하였다. 

 

김중식 KIM JOONG SIK  작가 경력

 

 

.충남 공주출생

.추계예술대학

.프랑스국립미술학교

.파리그랑쇼미에르아카데미

 

.현재     

. 한국미술협회 회원 / 버즐국제미술협회 회원  / 국제창작예술가협회 회원(ICAA) 

. 프랑스재불작가협회 회장

. 환경일보- 서양화가 김중식이 만난 뻔FUN한 예술가 칼럼 저자

. 개인전  45회전 (도쿄,홍콩,베이징,파리,LA)

.국제아트페어 KIAF,서울오픈아트페어 SOAF, 화랑미술제,대구아트페어, 부산비엔날레, LA아트쇼,동경아트페어,아트아시아 인 마이애미,홍콩아트페어,싱가폴아트페어 외 다수

.국제,국내 단체전 300여회 전시

 

.작품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말레이시아대사관, 박영사, 강원대학교, 대검찰청,남송미술관,도곡동타워팰리스,성남토마토저축은행,안양지방검찰청, 올포스킨피부과대구본원점,대원고,북경외교관저,여주지방검찰청실, 선화예고명예의전당,양평군청,고려대,서강대,건국대,우리은행국방대학교외200여곳

 

.  2016 대한민국 최고 국민대상-국제문화예술공로대상 수상  2016 글로벌 자랑스러운 인물대상-문화예술부문 수상

작품 소개

이중섭 선생님을 그리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마치 '한국의 고호' 같다. 전쟁, 아들의 죽음, 가족과의 별거, 조현병 등등 불행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가 <'은지화'라는 독특한 그림을 그렸고 당시에 보기 힘든 야수적이며 특별한 거친 표현들이 신선했고> 하는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들이 많지만 그의 위대함은 개인에게는 최악의 상황인 가운데에서도 가족과 한국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 내게 위대함으로 다가온다.

 

그는 일본 유학을 했으며 미국과 프랑스에서 유학한 선생님께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 에너지를 오롯이 한국적이며 향토적인 소재로 가득 채웠다. 나는 이런 그의 정신세계가 훌륭하게 느껴진다. 작가는 자신의 정신을 온전하게 예술로 변환할 수 있어야한다.

그는 한국 정서를 온전하게 미술로 변환한 위대한 작가이다.

그가 있어서 감사하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의 위대한 화가 시리즈 NO.1- 이중섭/ 유화/ 72.7cm X 60.6cm/2018

 

제작 방식

방식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테네브리즘적인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질감 효과를 내는 임파스토 기법을 주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테네브리즘 : 서양 17세기 화파. 카라바조 작품의 영향을 받아 격렬한 명암대비로 극적인 연출을 하는 방식을 말한다. 대표화가로는 만프레디, 칼라치오로, 혼트호르스트, 피테르 판 랄, 조르주 드 라 투르, 호세 데 리베라 등이 있고, 벨라스케스와 귀드 레니도 일시적으로 그 영향하에 있었으며 렘브란트 역시 이 영향 하에 있었다. 

 

키아로스쿠로 : ‘명암이라는 뜻. 빛에 의해 사물이 밝은 면에서 어두운 면까지 점진성을 가지며 변하는 변화를 통하여 삼차원성을 획득하는 방식을 말한다. 고대에도 사용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 이후부터 많은 활용이 있었으며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활용이 되었다.

 

임파스토 : ‘반죽된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유화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기법을 일컫는다. 붓이나 팔레트 나이프, 또는 손가락을 사용해 색을 칠하거나, 직접 튜브에서 물감을 짜 바르는 방식으로, 붓자국 등을 그대로 남겨 표면과 질감에 다양한 변화를 주려할 때 이 기법을 사용한다. 렘브란트, 루벤스, 넬러의 작품 중에서 중요 부위는 이 기법을 활용하여 강조성을 주었다. 

 


 


그림의 자료로 활용된 이중섭 선생님 사진과 작품의 부분​ 확대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20183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최대규모의 인물화전을 열었으며 ‘KOREA Renaissance Art’를 선언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본 작품은 2018424일부터 428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2018대구아트페스티벌에 초대되어 전시된다. 

작품 소개

지구촌은 매년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한다. 10여년 이상 진행되고 있는 중동의 전쟁은 중동뿐만이 아니라 유럽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의 피난 과정을 보며 슬픔과 아픔을 공감한다.

작년 가을 파주에 볼일이 있어 가던 중에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들린 적이 있다. 이제 연세가 80세 이상은 되어 보이는 어르신이 잘 보이지도 않는 북녘 땅을 멍하니 쳐다보고 계셨다. 그 모습과 TV를 통해 자주 접하고 있는 피난민의 모습이 겹쳐지며 그분의 눈 속에 고인 연한 눈물이 아프게 느껴졌다. 그분의 슬픈 눈을 바라보는데 나를 의식하였는지 시선을 피하고 다시 멍하니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분이 보이고 싶지 않았던 슬픔과 아픔이 가슴에 남는다.

 

우리는 3세기 초 고조선과 연나라의 전쟁을 시초로 2천여 번의 전쟁을 겪었다. 4세기부터는 3, 5, 10만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병력이 동원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술이 있다. 심지어 100만대군 이라는 형용할 수 없는 숫자의 병력도 서술되어있다. 이런 규모의 병사가 동원되고 전쟁이 치러진다면 그 피해와 아픔은 그 어떤 표현으로도 다 기술할 수 없을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북한의 미사일 실험이 중단되었고 대화의 채널이 가동되고 있다. 너무나 다행스럽고 좋은 일이다. 이제 2천여 번의 전쟁 횟수에 수를 더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병자호란의 아픔과 이에 대한 심리를 통일전망대에서 본 어르신의 눈빛과 이재민의 피난 과정을 보도한 여러 뉴스의 영상에서 받은 인상을 적용하여 제작하였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9- 망향/ 유화/ 72.7cm X 60.6cm/ 2017

 

제작 방식

방식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테네브리즘적인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질감 효과를 내는 임파스토 기법을 주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테네브리즘, 키아로스쿠로, 임파스토 : 한국인 시리즈NO.1 이순신 장군 편 참고 

 


한국인 시리즈 NO.9- 망향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2018년 3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최대규모의 인물화전을 열었으며 ‘KOREA Renaissance Art’​를 선언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작품 소개

정조 이산이 살던 시대에 대한 궁금증으로 그 시대의 실상을 보여주는 신윤복의 그림을 여러 번 살폈던 적이 있다. 신윤복은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때 태어나서 정조때에 왕성한 활동을 했던 화원이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로 지칭된다. 특히 양반층의 풍류와 남녀 간의 연애, 기녀와 기방의 세계를 보여주는 그의 그림은 현시대에서 당시를 이해하는데 매우 큰 자료가 된다. 그의 아버진 신한평도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원이다. 영조, 정조, 순조 초년까지 활동했으며 특히 초상화와 속화에 빼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신한평의 이름이 정선강세황김홍도심사정등과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 정조 시대의 생활상을 알고 기뻐했던 감흥을 그에 대한 오마주로 미인도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였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8- 신윤복 미인도 재해석/ 유화/ 162.2cm X 130.3cm/ 2018

 

신윤복 [申潤福]

1758 ~ ?

"신윤복(申潤福). 자 입보(笠父), 호 혜원(蕙園), 고령인(高靈人). 첨사(僉使) 신한평(申漢枰)의 아들, 화원(畵員). 벼슬은 첨사다. 풍속화를 잘 그렸다."는 오세창(吳世昌)[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기술되어있는 것이 신윤복에 대한 문헌상 기록 내용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와서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아마도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춘화와 기생 그리고 양반의 이탈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해학적 표현을 거침없이 했다는 틀에 박힌 조선시대를 깨보려는 그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림의 수준은 그 누구와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그렸으며 다른 화원들과 다르게 색채의 다양성과 표현의 섬세함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신윤복은 아버지 신한평과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친척들이 중인이어서 다양한 계층의 일을 한 것도 영향을 받은듯하다. 특히 구하기 어려운 채색 안료를 사용한 점도 친척들의 지원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과거보다 오히려 현대적 감각이 넘쳐나는 그의 표현은 해학적 구성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가늘고 유연한 선과 원색의 산뜻하고 또렷한 색채사용, 현대적인 구도와 독특한 상황 설정으로 조선시대 풍속화의 격과 영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제작 방식

신윤복의 미인도를 좌측 벽면에 배치하고 방안에 미인이 환생한 것과 같은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보이는 복식과 포즈를 동일하게 하였으나 인체 비례의 안정감을 만들기 위하여 두상의 크기는 일반적인 서양화 방식과 유사하게 7등신으로 하였다. 얼굴 내부의 눈코입 비례도 가능한 선에서 동일 비율로 구성하였으나 모양의 마무리는 현재 인기 아이돌들의 눈코입 모양을 활용하였다.

배경인 방은 중인 가정의 방을 상상하여 표현하였다. 화려함이 없이 수수한 방안 가구 등으로 배치하였으며 핵심인 신윤복의 미인도와 환생한 여인의 모습이 크게 부각되도록 구성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화원 : 도화서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에 종사하는 잡직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도화서의 화원들이 실제로 맡아서 그려낸 일들은, 감계화(鑑戒畵교민화(敎民畵장식화(裝飾畵사대의례도(事大儀禮圖제례도(祭禮圖의장도(儀仗圖세화(歲畵경직도(耕織圖지도(地圖불화(佛畫포응견본도(捕鷹見本圖초상화(肖像畵지형실경도(地形實景圖실경산수사생도(實景山水寫生圖감상화(鑑賞畵모사(摹寫사생(寫生) 등이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가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그들을 현재와 비교해보면 다큐멘터리 작가나 사진가 등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인 시리즈 NO.8- 신윤복 미인도 재해석작품의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2018314일부터 20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Kai Jun의 인물전'을 한다. 본 연재 작품도 포함된 전시이다. 

작품 소

수원화성 옆의 수원문화재단에 수년 전 심사를 몇 차례 가며 수원 화성의 가치를 새삼 느꼈던 적이 있다. 치밀해도 이렇게 치밀할 수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계획 도시였다. 이상이 높았던 정조는 화성을 만들면서 이상실현을 하려했던 것 같다. ‘정조가 만약 장수를 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도 그의 치밀함과 군사(君師)를 자처하는 것처럼 국가와 백성을 위한 수많은 노력과 방안이 있었기에 아쉬움으로 다가 온다. 정말 49세가 아니라 70세 정도까지만 살았더라도 조선의 미래와 현재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 같다. 화성을 거닐면서 세종대왕 52, 정조대왕 49라는 안타까운 혼잣말을 하며 걸은 기억이 난다. 그가 일차적으로 시행 했던 일은 조정의 안정이었다. 그 안정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장용영(壯勇營)’의 설치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이었다. 왕권의 강화에 큰 역할을 했다. 정조가 이루려했던 꿈의 일환인 무예도보통지 24()는 수원화성에서 지금도 시연되고 있다. 그중 마상쌍검을 통해 정조를 생각해 봤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7- 정조대왕의 꿈/ 유화/ 162.2cm X 97cm/ 2018

 

정조[正祖

조선 제22대 왕(재위 1776~1800) 이름 이산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나 할아버지 영조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기행으로 인해 죄인의 아들로는 왕위에 오를 수 없기에 1764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양자로 입양되어 종통을 잇게 한다. 1775년 영조는 노환으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 1776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상황에는 당파싸움이라는 강력한 문제의 소용돌이 안에서 진행되었다. 정조는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조정의 문제와 국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개혁과 선진화에 눈을 뜨고 개혁군주로써의 꿈을 꾸었다. 당시 세계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미국의 독립, 프랑스 혁명 등의 큰 바람이 불던 시기이다.

 

정조는 세종대왕과 더불어 준비된 왕이었으며 노력을 아끼지 않은 왕이었다. 학자군주로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10010갑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弘齋全書)로 간행되었고 그림을 잘 그렸으며 의학에도 밝아 본인의 병을 스스로 치료하기도 했었다. 또한 과학, 문학, 미술, 음악 등의 문화적인 발전도 꾀했다. 왕권의 강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기 위해 사도세자가 체계화 했던 무예18기를 무예도보통지 24()로 만들었다. 또한 노비제도 폐지를 추진하고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 실학자를 등용해 상업과 유통을 발달시키는 등 조선근대화의 싹을 틔운 임금이기도 하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정치를 구현하였으며 영조의 탕평정책을 계승 발전시켰다. 청류(淸流) 세력을 끌어들이고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남인과 정치적인 정적 세력인 벽파세력까지 끌어안으려했었다.

 

 

정조는 이상의 실현을 위해 수원 화성을 건축하였고 화성을 건축하는 과정에서도 국고의 지출을 최소화하면서도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만들어 10년의 공사를 단 33개월의 기간으로 단축시키기도 했다. 정약용과 채제공 등 정조의 측근들이 대거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완벽한 방어전략을 갖춘 당시로서는 최고의 근대적 성곽이었으며 자족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수원읍의 4개 구획을 따라 상업시설을 조성하고 통공정책을 마련해 자유로운 상행위가 일어나게 하여 인구를 끌어들였으며 저수지를 축조하고 국영농장인 둔전을 설치하여 새로운 농업경영제도를 도입했다.

화성에는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이 배치됐다. 한양에 내영, 화성에 외영을 설치해 화성에만 5천명의 병사를 배치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정조는 개혁과 이상 실현을 위한 선포를 한다. 그러나 그는 한 달 뒤 병으로 죽게 되고 그가 그토록 헌신적으로 준비한 개혁의 산물과 그를 따르던 세력, 장용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급변하는 세계에 맞설 수 있는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정조와 정조를 따르던 세력만의 안타까움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안타까움이다. 

 

제작 방식

달리는 말의 속도를 표현하기 위해 어둠속을 뚫고 나오는 느낌을 주었으며 낭만주의 화가들이 추구했던 특별한 감정의 표현과 윌리엄 터너의 빛에 의한 배경 연출과 같은 효과를 주었다. 양손에 들고 있는 칼은 전체 그림의 역동성을 위하여 사선의 연결선상에 놓이도록 배치하였다. 또한 말과 연결하여 역삼각형의 구도를 이뤄 전체적으로는 불안정과 안정의 접점에서 바라보도록 하였다. 칼은 속도감을 표현하기 위해 형태가 연속성을 가지며 사라지게 하였으나 주인공의 얼굴과 말의 얼굴은 선명하게 묘사하여 극적 대조를 이루었다. 이 극적 대조를 통해 주인공의 감정 표출을 더 강렬하게 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낭만주의 : 고전주의와 대비되는 사조로 고전주의가 보편적인 미의 관념에 입각한 엄격한 규율과 정적이며 우아하고 균제미로 정형화된 방식을 추구한다면 낭만주의는 격정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직관적인 측면의 감성을 중심으로 생각했다. 이런 관념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계몽주의로 비합리적인 정치체계의 타파를 이루었고 혁명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취약한 면을 자신의 심성에 맞는 문화로 이룩하려는 정신적인 욕구의 결과이다. 낭만주의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났는데 미술에서도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낭만주의 미술은 어떤 기법이나 형식이 낭만주의 미술이다.’ 라고 규정하기는 어렵고 이러한 관점으로 대상을 이해하고 표현한 작품들이 낭만주의 미술로 분류된다. 특정지어 구분한다면 사물을 바라볼 때 화가의 감정에 이끌린 표현이 형태나 색상에 구애받지 않고 화면상에서 자유롭게 표현된다는 점이 다른 점이라 볼 수 있다. 윌리엄 터너의 풍경화 작품이나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이 이에 해당된다. 


윌리엄 터너 노예선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


한국인 시리즈 NO.7- 정조대왕의 꿈작품의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2018년 3월14일부터 20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Kai Jun의 인물전'을 한다. 본 연재 작품도 포함된 전시이다.


 

작품 소개

인물화를 그리며 우리나라 미녀에 대한 생각을 했었다. 우리는 미녀를 논할 때 남남북녀(강계·회령·함흥미인)라는 속설을 말한다. 그런데 전래되어 내려온 속설과는 별개로 현대적 미의 기준으로 보면 대구미인이 으뜸으로 뽑히고 있다. 근대 이후 연예계나 미의 사절 역할을 휩쓸고 있다.

? 속설과 다르게 대구미인이 주목받는지에 호기심이 생겼다. 과학적 검증이나 역사적 검증이 안 된 시절에는 사과를 많이 먹어서 사과 미인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역사서를 보면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신라의 자장이 중국유학시절 문수보살에게 불법을 전수받을 때 문수보살이 한 말을 보면 신라의 왕족은 인도의 왕족이라는 말이 나온다. 문수보살이 황룡사에 9층 석탑을 지을 것을 권유하여 자장이 이를 전하고 선덕여왕이 건설한 일화는 삼국유사황룡사찰주본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또한 KBS방송으로도 널리 알려진 신라인은 흉노족의 후예인가?’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신라인의 지배계층이 스키타이인과 매우 흡사한 DNA구조를 가졌다고 방영하기도 했었다.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의 중심 내용은 멸망한 페르시아의 왕족이 망명생활을 하다가 연관성이 있는 신라로 와서 신라공주와 결혼하고 그의 아들이 지금의 이란으로 돌아가 전쟁을 일으켜 다시 왕권을 회복한다는 내용이다. 쿠쉬나메를 연구하는 한양대 이희수교수의 경향신문 기고를 보면 매우 흥미롭다. 이뿐만이 아니라 삼국사기를 보면 서기 342년 흉노족의 일파인 선비족 모용황55천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북쪽으로 침공 15천 남쪽으로 침공한 4만 중 북쪽 부대가 남하하여 신라의 김씨 왕조를 만들었다는 가설도 제기되고 있다.

 

각설하고 현재 경상도에 미인이 많고 빼어남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법 한데 이런 저런 이유를 생각하여 신라의 미인 설화 중 선덕여왕을 사모한 지귀전설을 모티브로 신라의 미인을 그려보았다. 골격과 기본적인 인체 구조는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 당염립본왕회도의 신라 사신도를 참고하였다. 신라사신의 모습은 다른 사신보다 젊고 오뚝한 코와 큰 눈, 두상 및 골격 구조가 조금은 서양인스럽다. 지귀설화의 등장하는 선덕여왕의 나이는 50세이지만 매우 뛰어난 미모로 지귀가 짝사랑했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동안으로 제작하였다. 배경 및 전체적인 색상은 지귀가 불의 화신이 된 모습을 연결하여 표현하였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6-신라의 미인/ 유화/ 90.9cm X 72.7cm/ 2018

 

선덕여왕과 지귀 설화

선덕여왕은 너무나 많은 자료가 나와 있으므로 생략하고 본 작품의 모티브인 지귀 설화만 요약한다.

 

지귀가 서라벌에 갔다가 지나가는 선덕여왕을 보았다. 그런데 여왕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그는 단번에 여왕을 사모하게 되었고, 끝내 미쳐버렸다.

어느 날 여왕이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 도중 지귀가 쫓아오고 여왕은 지귀가 자신을 사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귀를 절에 함께 가도록한다. 여왕이 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지쳐있던 지귀는 탑 아래에서 잠이 들고 만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여왕은 지귀의 잠자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금팔찌를 지귀의 가슴에 놓고 간다.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발견하고 더욱 더 사모의 정이 불타올라 불귀신으로 변한다. 지귀가 불귀신이 되어 선덕여왕의 지나간 자리를 떠돌아다니다가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고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에 선덕여왕이 불귀신을 쫓는 주문을 지어 문에 붙이도록 하였다.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志鬼心中火, 燒身變火神, 流移滄海外, 不見不相親)’ 이후 선덕여왕의 뜻을 따른 지귀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당염립본왕회도>에 나타난 신라 사신도와 신라의 미인 작품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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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우리나라의 의로운 여성의 대표격인 논개’.

예전 진주성을 방문했을 때 논개의 일화를 알고 있었던 터라 그런지 촉석루에 올랐을 때 전율이 왔었다. 촉석루에서 바라보는 남강은 예사롭지 않게 흐르는 것 같았고 진주성의 성벽에도 수많은 주민이 장맛비에 무너지는 성벽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보이는듯했다. 한걸음 한걸음 진주성에서 발을 떼어낼 때마다 420여 년 전에 벌어졌던 그때의 상황이 상상되었다.

20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격어야만 했던 비애가 가슴 아팠다. 국가의 존망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지아비마저 눈앞에서 잃어야하는 슬픔과 6만 명의 도성사람들이 살육당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피눈물이 그녀의 가슴에서 남강까지 이어져 흘렀을 것이다. 안타깝고 안타까웠다.

깊은 숨을 몰아쉬고 진주성을 나와 차에 탔을 때 나얼의 바람기억이라는 노래가 나왔다. 바람기억의 가사가 마치 논개의 얘기인 것처럼 느껴져서 감정이 북받쳤다. 전혀 관계없는 노래였음에도 그 때는 그랬다. 지금도 바람기억을 들으면 무척 슬프다.

 

슬프고, 숭고하고, 고맙다. 그녀의 삶과 결단을 본받아 다시는 그녀와 같은 결단을 내릴 일없도록 해야겠다. 앳된 20살 여인의 비장함을 표현하기 위해 표정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결연한 의지가 보이도록 피부 표현을 점묘화처럼 아주 작은 터치를 찍어가며 그렸다. 눈동자는 눈물이 고인 것처럼 하였으며 손은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할 때 뿌리치지 못하게 손가락마다 가락지를 끼고 있었던 모습을 강조하기위해 명암의 대비를 심하게 주어 밝게 표현하였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5- 최경회의 여자. 논개/ 유화/ 116.8cm X 91cm/ 2017

 

주논개

최경회에 관한 기록은 많이 있으나 논개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매우 미흡하다. 그 부족한 부분을 해주 최씨 승지공파의 17세손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기록 된 족보와 최경회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논개의 구전 내용을 결합하여 구성하였다.(최경회의 설명은 4편 참고)

 

주논개(朱論介) 義岩婦人. 신안주씨 전주파 중파손

15741593

논개는 주씨성이며 전라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훈장을 하던 주달문이며 논개가 14세 때 돌아가신다. 논개의 어머니는 자신과 딸의 생계를 시동생인 주달무에게 의탁하나 도박에 가산을 탕진한 주달무는 어린 논개를 김풍헌의 민며느리로 팔아넘기고 달아난다. 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논개의 어머니는 친정으로 도망을 가고 김풍헌은 관아에 고발하게 된다. 김풍헌의 고발로 당시 장수 현감이었던 최경회에게 심문을 받는다. 논개 모녀의 심문 결과 최경회현감은 무죄방면하며 갈 곳이 없는 논개 모녀를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현감의 부인을 시중들게 한다. 논개의 시중을 받던 최씨부인은 논개의 재색이 뛰어남에 감탄하여 지병으로 숨을 거두기 전에 부실로 받아들일 것을 권유한다. 이후 최경회공과 함께하며 의병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그를 돕게 된다. 159369일간의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한 뒤 최경회장군과 함께하던 장군들이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게 된다. 성의 함락과 승리를 자축하기 위한 왜군들의 잔치가 159377일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장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고 참석한다. 주연에서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장마철이라 물이 많이 불어있는 남강의 바위에 올라 그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다. 논개는 10 손가락마다 가락지를 끼고 깍지를 끼었을 때 손이 빠지지 않게 한 상태였다. 논개와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죽게 되고 이후 진주성전투에서 살아남은 의병들이 강 하류에서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건져 고향땅에서 장사를 지내주려 운구하다가 왜군의 감시로 인해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골짜기에 묻었는데 1976년 발견되어 현재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묘소가 마련되었다.

 

논개가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이라하며 1721년 경상우병사 최진한은 목숨을 바친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건립한다.

1739년에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지면서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 절차가 진행되었다.

1868(고종 5)에는 진주목사 정현석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 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 절차만이 교방가요(敎坊歌謠)에 전해질 뿐이다.

 

참고문헌

최경회 후손 기록 https://blog.naver.com/yschoimd/20137770329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3814&cid=46622&categoryId=46622 


제작 방식

방식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테네브리즘적인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질감 효과를 내는 임파스토 기법을 주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초상화 표현 특징인 전신사조(傳神寫照)로 표현하였다. 얼굴 및 부분적 표현에 점묘화 기법을 활용한 병치 혼합적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테네브리즘’, ‘키아로스쿠로’ ‘임파스토1편 이순신장군 설명 참고

전신사조(傳神寫照)’2편 별을 바라보는 염근리 설명 참고

 

점묘화 : 점을 찍어서 표현한 그림을 말하며 신인상주의 화가 쇠라와 시냐크 등이 광학을 활용한 과학적 접근으로 만들어진 기법이다. 점묘화는 색과 색을 혼합하여 중간색을 만드는 방식이 아닌 각각의 색을 나란히 화면에 배치하여 색의 선명성을 유지하되 멀리 떨어지게 되면 두 색이 혼합된 것처럼 보이게 되는 병치 혼합의 방식을 활용한 것이다. 신문, 잡지의 인쇄물도 각각의 망점이 색을 가지고 있고 이 점들이 모여 입체적인 그림이나 이미지가 되는 점묘화 방식을 활용한 것이다. 이방식의 강점은 매우 선명한 색의 느낌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한국인 시리즈 NO.5- 최경회의 여자. 논개작품의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작품 소개

 의로운 한국여성을 생각했다. 여러 여성인물 중 과거 진주성 방문에서 느꼈던 논개가 가장 강열하게 떠올랐다. 논개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표현을 하던 중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의병의 활동이 매우 많은 의병의 역사이다. 논개가 의로운 여인의 대표격이라면 그와 함께한 사람의 정신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논개를 그리다말고 논개의 남자를 떠올렸다. ‘최경회대단한 업적과 인품을 가진 사람이다. 작품은 최경회 장군의 의병 시절 무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내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던 상황을 상상하여 그렸다. 관군이 아니기 때문에 사복으로 만든 군복이었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의 나이가 60이었지만 평소 활쏘기에서 능하여 선조 앞에서 활쏘기 시합을 할 때 장원을 한 사례와 진법에도 능했던 것을 보면 신체 단련도 상당히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외모를 강인하고 조금은 젊은 느낌으로 제작하였다.

 

1편에서 이순신 장군을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이순신 장군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최경회 장군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못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경회와 같은 의로운 사람들이 있어 우리가 있다는 고마움을 느낀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4- 논개의 남자. 최경회/ 유화/ 72.7cm X 60.6cm/ 2017

 

최경회 소개

최경회에 관한 기록은 많이 있으나 논개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매우 미흡하다. 그 부족한 부분을 해주 최씨 승지공파의 17세손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기록 된 족보와 최경회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논개의 구전 내용을 결합하여 구성하였다.(논개의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 편에)

 

최경회(崔慶會) : 선우, : 삼계, 별호: 일휴당

1532년 화순 삼천리 태생/1561년 신유 식년시 생원 급제/1561년 신유 식년시 진사 급제/1567년 정묘 식년문과 을과 급제/1574년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옥구현감(송덕비 건립)/1577년 장수현감(선정비 건립)/1579년 무장현감(송덕비 건립)/1582년영암군수(송덕비 건립)/1584년 호조정랑, 형조정랑, 영해부사(영해고을민이 생사당을 세움)/1587년 사도시정, 담양부사(선정비 건립)/1590년 모친상으로 관직 사직/1592년 임진왜란 전라우의병장/1593년 경상우도병사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

최경회는 문신이며 의병장이다. 그의 생은 백성을 위한 삶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옥구현감 시절부터 고을민들이 자진하여 송덕비와 생사당을 지을 만큼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국난이 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목숨을 바쳐 싸웠으며 혁혁한 전과를 이룬 대장군이다. 그의 충의에 대한 신념과 실천은 주변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함께 동참 할 수 있는 큰 믿음을 주었던 훌륭한 리더임이 분명하다.

 

그의 업적과 관련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590년 모친의 상으로 낙향하여 지내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그는 이제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으니 내 몸을 나라에 바쳐도 된다. 부모에게 하던 효도를 나라에 충성으로 바치리라.“하며 형 최경운, 최경장, 아들 최홍기, 조카 최홍재, 최홍우 6명이 힘을 합쳐 화순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고 전라우의병이라 칭하였다. 조카 최홍재를 금산의 고경명(高敬命. 문인·의병장) 휘하로 보냈으나 고경명장군이 이미 전사한 후로 그의 휘하였던 남은 병력 800여명을 수습하여 전라우의병에 편입시켰다.

전라우의병은 한양으로 가서 근왕하려하였으나 전라감사 권율으로부터 전라도 방어를 책임져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전라우의병은 장수를 주둔지로 하여 금산, 무주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둔다. 금산전투에서는 짙은 밤안개를 이용하여 볏짚을 병사로 위장하고 적의 화살과 탄환을 소비하게 했다. 어둠이 개이고 날이 밝아올 때 공격하여 크게 승리한다. 그는 탁월한 감각과 현감 시절 고을의 안녕을 위한 노력으로 각 고을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던 경험으로 지리에도 밝았다. 그는 장사진, 어관진, 조운학익진 등의 진법을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기습작전 및 매복 작전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1592년 왜군이 진주방향으로 진격한다는 첩보를 받고 의병을 매복시켜 공격하며 큰 타격을 입힌다. 이 전투를 무주대첩이라 한다. 이 승리 이후 장수에서 남원으로 주둔지를 옮긴다. 남원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을 때 영남의병장 김면과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이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그의 부장들과 고을민들은 적군의 기세가 사방으로 뻗치고 있는데 호남을 버리고 멀리 영남으로 간단 말입니까라는 말을 하였다. 이에 영호남의 마음을 하나로 잇는 위대한 말을 남긴다. “嶺右我國之地 湖南我國之地 영남도 우리 땅이요, 호남도 우리 땅인데 의로써 일어난 사람들이 어찌 영호남을 가리겠는가.' 라며 영남으로 출병하여 159210월 진주성 1차 전투 외곽 지원담당을 맡는다. 왜군 2만 여명을 상대로 진주목사 김시민과 진주성 군사(38백명) 주민(수만명), 정유경(300), 조응도/최강/이달(500), 정기룡(300), 상대승/정언충(200), 최경회/임계영/김준민(2000)의 관군과 주민 의병이 힘을 합쳐 진주성 1차 전투(진주대첩)를 대승리한다.

 

전라우의병은 거창에 주둔하며 영남의병장 김면과 합동 작전으로 개령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1593115일에 성주성을 탈환한다. 이후 고령의 김면과 김성일이 전염병으로 죽자 조정에서는 421일 조정에서는 최경회를 경상우도병사로 임명한다. 선조실록 371593421일의 기록을 보면 비변사가 말하기를 최경회는 무신이 아니지만 이미 여러 번 전공을 세워 명성이 크게 드러나고 재능도 책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그리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호남의 의병이 이미 그와 친숙해 있으니 사변이 안정될때가지 직을 맡겨도 되겠습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렵 조선에서는 구원군인 명나라와 1년간 전쟁으로 피폐해진 왜군사이에 화의가 성사된다. 그 결과 왜군은 북부 및 수도권 지역에서 철수, 남해안까지 물러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과정에서 왜군 전군에 진주성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1차 전투에서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6월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히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경상남도 함안, 반성, 의령 일대를 점령하고, 19일에는 37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한다.

 

거의 모든 왜군 병력이 진주성 한 곳에 집중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진주 근처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명군은 진주성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왜군 측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의 의지가 확고하여 진주성만은 함락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차라리 자신들이 공격하기 전에 민간인들을 모두 내보내라고 권고할 정도였다.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 조선군도 진주성 근교까지 갔다가 절대적인 병력차를 확인하고 진주 구원을 포기했다. 그러나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은 진주는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이기에 진주만 공격하고 돌아간다는 왜군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성을 포기하라는 명군과 왜군의 권고를 거부했다.

 

진주성을 향해 총공세를 전개하려는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 관군으로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 사천현감 장윤 등이 진주성으로 들어 왔고, 고종후, 강희열, 이계련, 변사정, 민여운 등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왔다.

 

불행한 것은 당시 진주목사 서예원은 원병으로 와있던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다가 급히 전투에 참가하느라 진주성을 지휘할 채비를 갖추지 못하였다. 진주성의 대대적인 공격을 막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관군 22백여 명, 의병 6백여 명 그리고 주민도 6만여 명이 되었지만 모두 의기로 뭉쳤을 뿐 잘 훈련된 왜군에 대항하기는 처음부터 열세적인 입장에 있었다.

 

621일부터 627일까지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621일 왜군 기마병 2백여 기가 출몰하여 진주성을 살피고 돌아갔다.

622일에는 처음 교전이 일어나 왜군 30여 명을 쏘아 죽이니 퇴각을 하였다가, 초저녁과 2, 3경에 다시 공격을 해왔다가 퇴각을 하였다. 조선군은 남쪽에는 남강이 흐르기 때문에, 침입이 예상되는 서북쪽에 해자를 파고, 물을 흘려 호를 만들었으나, 왜군은 해자에 흙을 메워 길을 만들었다.

623일 낮에 3, 밤에 4회를 공격을 하였다.

624일에는 적의 증원군 1천여 명이 동서로 진을 쳐서 포위하였다.

625일 왜군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흙으로 만든 대를 세워 성안으로 사격을 퍼부었다. 이에 충청병사 황진도 성안에 다시 높은 언덕을 쌓아 대처를 하였으며, 낮의 세 차례 공격과 밤의 네 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하였다.

626일 왜군은 방책을 만들어,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화전 공격을 하여 성내의 초옥을 불태우면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고 다시 전서를 보내 항복을 독촉한다. 이 날도 밤낮으로 일곱 차례를 싸워 적을 격퇴하였다.

627일 왜군은 동문과 서문 밖에 다섯 군데의 언덕을 축조하고 거기에 공성용 대나무 대를 세워 하향 조준으로 사격을 하여 조선군 300여 명을 죽였고, 철갑을 입고 사륜거라는 장갑차를 끌고 와, 철추로 성문을 뚫으려 했다. 장사였던 김해부사 이종인이 연거푸 적을 베어 물리치고, 조선군은 기름과 횃불을 던져 왜군에 대항하여 격퇴시켰다.

628일 야간 경비가 소홀하여 적이 몰래 와서 성을 뚫으려하는 것을 힘들게 방어를 했으며, 1천여 명의 적이 죽었는데 황진도 적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를 하였다.

629일 전사한 황진을 대신하여 목사 서예원이 경비대장을 맡았으나, 겁을 먹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자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직을 파하고, 장윤에게 그 직을 맡겼으나 장윤도 탄환에 맞아 죽게 된다. 오후에 비가 내려 동문의 성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노도와 같이 밀려왔는데, 활과 화살로 대응을 하지 못하므로 창과 칼로 육박전이 일어나게 되고, 이종인도 왜군의 탄환을 맞고 죽게 된다.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는 조복 한벌과 무주대첩에서 왜장에게서 빼앗았던 보검과 공민왕의 그림을 조카 최홍우에게 맡기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둘째형 최경장에게 전하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둘째 형님이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의병을 일으킬 것인데 이것으로 표지를 삼고 이 옷으로 내가 죽은 후 장례를 치러 달라.”고 말한다.

 

이후 끝까지 저항하던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와 함께 촉석루에 오른다. 최경회는 시 한 수를 읊는다.

 

촉석루 위에 올라 있는 세 장사

한 잔 술에 웃으면서 장강 물을 가리키네.

장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저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우리 넋도 죽지 않으리.

 

마지막으로 최경회는 북쪽을 향해 4배하고 외로운 성이 포위당했는데 밖에서 지원군은 오지 않고 형세도 불리하고 힘도 다했으니 한 번 죽음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인장과 병부를 가슴에 안고 남강에 투신을 한다. 이때 함께 있던 여러 장군도 남강에 투신하여 죽게 된다.

 

이후 159377일 일본군 장수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 장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한다. 논개는 깍지를 끼었을 때 빠지지 않게 열손가락 마디마다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 끌어안아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죽게 된다. (논개에 관한 내용은 다음 편에 좀 더 자세히 다룹니다.)

 

진주성 2차 전투는 조선군이 패한 전투이지만 결코 패전이라 할 수 없다. 왜군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주어 진주성 전투이후 왜군은 이렇다 할 전적 없이 부산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막부 몰락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였다.

이 전투는 지방의 성 하나를 놓고 싸운 전투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가치가 남은 전투였다. 진주성 전투는 조선인이 얼마나 강인하고 충, 의가 있는 사람들인지를 보여준 전투였다. 고립된 성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하게 싸웠다. 최경회와 의병들은 1년간 노숙을 하며 국가를 위해 헌신했으며 과거부터 있었던 호남과 영남의 간극을 없애는 모범을 보였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왜군이 호남이나 한양으로 다시 진군하지 않도록 사수하겠다는 생각은 국가와 백성을 사랑하는 깊고 큰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것을 예측하고도 감행했던 그들은 우리역사에서 소중히 생각해야하는 위인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40, 26(1593710)(1593715)(1593716)

선조실록 42, 26(159396)

김세곤 http://blog.daum.net/segon53/15860230

위키백과 제2차 진주성 전투https://ko.wikipedia.org/wiki/%EC%A0%9C2%EC%B0%A8_%EC%A7%84%EC%A3%BC%EC%84%B1_%EC%A0%84%ED%88%AC

최경회 후손 기록 https://blog.naver.com/yschoimd/20137770329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33741&cid=51942&categoryId=54817

세계일보 기사 http://www.segye.com/newsView/20120807022391

 

제작 방식

방식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테네브리즘적인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질감 효과를 내는 임파스토 기법을 주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초상화 표현 특징인 전신사조(傳神寫照)로 표현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테네브리즘’, ‘키아로스쿠로’ ‘임파스토1편 이순신장군 설명 참고

전신사조(傳神寫照)’2편 별을 바라보는 염근리 설명 참고 



한국인 시리즈 NO.4- 논개의 남자. 최경회작품의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칼럼리스트 Kai Jun(전완식) 소개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를 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문재인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운영위원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