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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개혁적 보수 정책으로 경제 번영 이룬 '수퍼맥'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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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3년08월09일 0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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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0383&cat_code=06&start_year=2013&start_month=06&end_year=2013&end_month=06&press_no=&page=11


개혁적 보수 정책으로 경제 번영 이룬 ‘수퍼맥’
되살아난 강국, 영국의 리더십 ⑦ 해럴드 맥밀런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 제325호 | 20130602

“이 정권은 기껏해야 6주를 지탱하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1957년 1월 영국 총리에 취임한 보수당의 해럴드 맥밀런(1894~1986)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만났을 때 했던 말이다. 같은 당의 앤서니 이든 총리가 수에즈 동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그는 후임을 맡아 사태 수습에 나섰다. 수에즈 동란은 이집트 군사정권이 아랍민족주의를 내세워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운하 지분이 많았던 영국·프랑스가 국익을 명분 삼아 운하 지대를 침공한 사건이다. 당시 보수당 정권은 도덕적으로, 국제법적으로, 군사적으로 ‘제국주의적 발상’에 젖어 있다는 국내외 비판에 직면했다. 이 침공에 반대한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도 사이가 틀어졌다. 하지만 그는 6주도 못 간다는 정권을 맡아 63년 10월까지 무려 6년10개월간 장수 총리로 일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의 치세를 통해 영국은 새롭게 자신감을 회복하고 경제적 풍요를 구가했다.

1차 대전 때 장교로 참전해 심한 총상
여기에는 맥밀런의 노련한 리더십이 숨어 있다. 우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서 국민에게 신뢰를 줬다. 그는 세계적 출판사인 맥밀런사의 창업자 손자인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명문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대를 졸업했다. 하지만 기득권층 엘리트로서 자신의 의무를 솔선수범으로 다한 19세기 귀족 스타일이었다. 그는 옥스퍼드대 학생회 총무를 하며 차기 학생회장을 노리고 있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근위보병대 장교로 참전했다. 솜 전투 등 치열한 작전에 연속 투입돼 세 차례나 부상을 당한 끝에 대퇴부 총상을 입고 혼절 상태에 빠져 후송됐다. 손과 대퇴부의 심한 총상으로 4년 동안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손아귀 악력(握力)을 거의 잃었고 다리는 절뚝거리게 됐다. 이후 뭉개지는 글씨와 힘 없는 악수가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최전방의 가장 위험한 임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한 롤 모델이 됐다. 이는 ‘잃어버린 세대’로 불리는 1차 대전 참전 세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당시 참전 옥스퍼드대 밸리올 칼리지 동기 28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두 명밖에 없을 정도로 그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이런 인물이 지도자가 돼 국민에게 “모두 단결해 영국의 자신감을 회복하자”고 호소하자 보수당 정권은 일단 붕괴 위기를 면했다. 수에즈 동란 개입으로 국제사회에서 추락했던 영국의 이미지도 차츰 호전돼 나갔다.

정치적 고비를 넘긴 맥밀런은 이력이나 이미지로 승부를 겨루는 대신 구체적인 행동과 정책으로 봉사하는 리더십을 구사했다. 한마디로 그는 온정적인 보수파였다. 보수당 동료가 좌파적이라고 비난하는 정책도 과감하게 채택해 이념을 초월한 국민 지지를 얻었다. 보수의 원칙과 중산층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우파 보수당이 아니라 전 계층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개혁 보수, 즉 ‘한 나라 보수주의(One-nation conservatism)’를 주창했다. 온정주의 정책을 통해 계급 갈등이 아니라 계급 협력으로 국가 발전을 이루자는 정치 비전이었다. 대표적인 게 보수당 특유의 시장경제만 고집하지 않고 계획경제를 적절하게 활용한 혼합경제 정책을 펼쳤다는 점이다. 30년대 대공황 시절의 경험을 살려 경제 재건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며, 특히 일자리 확충에 주력했다. 이에 반발해 ‘보수당의 본질에 어긋나는 좌파적 정책’이라며 보수파 경제각료 세 명이 사퇴했지만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공공투자를 확대해 수요를 창출하는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경제이론을 적용하고 내수 시장을 성장 동력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적정 성장률을 유지하고 실업률을 크게 낮출 수 있었다.


그가 57년 어느 연설에서 쓴 “이렇게 좋았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never had it so good)”라는 표현은 당시의 경제 번영을 잘 보여주는 것이어서 보수당의 선거 구호로 활용됐다. 경제발전과 현대화에 앞장서면서 국민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주력한 결과 그는 59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뒀다. 경제가 좋아지면서 노동자 계급의 상당수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며 보수당 지지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현대 정치에서 한 국가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국민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데는 경제 살리기만 한 특효약이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사례다. 그는 58년부터 ‘수퍼맥’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여유가 있고 통 큰 정치를 추구한 큰 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는 이야기다.

미·소 중재해 대기권 핵실험 중단 성과
껄끄러워진 영·미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42~45년 지중해 전선의 미군사령부에 파견돼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와 아이젠하워 당시 미군사령관 사이에서 연락관 임무를 수행한 인연이 있었다. 노련하고 까다로운 정치가와 장군을 만나는 동안 그는 뻣뻣하고 쌀쌀맞은 독불장군 스타일이 아니라 자신감 넘치고 상대방 입장을 배려하는 중재자 스타일을 몸에 익혔다.

총리가 된 뒤 맥밀런은 경제 회생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60년엔 징병제를 폐지하고 병력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면서 군대를 효율적으로 재편했다. 그 결과 정부 예산의 3분의 1, 국민총생산(GNP)의 10%까지 차지했던 국방비를 절반으로 줄였다. 허울뿐인 ‘제국의 영광’ 대신 경제 번영과 국민 복리를 우선한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재임기간 중 대영제국은 형식적으로도 종말을 고했다. 60년 아프리카 순방 길에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연설하며 “변화의 바람”이란 말을 한 게 신호탄이었다. 그는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 분리)에 반대하고 나이지리아·카메룬·시에라리온·탕가니카·우간다·케냐 등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대거 독립시켜 영연방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동남아에선 63년 말레이시아가 독립했다. 대영제국 유지의 비용·편익 분석을 통해 냉정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제국 유지 비용을 줄인 뒤엔 그 돈을 국민 생활 향상과 고용 증대로 돌렸다. 시대 변화를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하고 대응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맥밀런은 식민지를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방식으로 영국의 위상을 높였다. 미국과 소련 사이를 중재해 냉전을 완화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그는 59년 소련을 방문해 니키타 흐루쇼프를 만났다. 2차 대전 이후 서방 지도자로선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평화 공존의 가능성을 타진한 것이다. 당시 소련은 핵실험과 인공위성 발사 등으로 국력을 과시할 때였다. 물론 일방적인 유화정책은 아니었다. 맥밀런은 핵전쟁 시대에 맞춰 57년 수소폭탄 실험을 하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확보하는 등 자체 억지력을 최대한 확보한 다음에야 대화·협상에 나섰다.

냉전 완화를 위한 맥밀런의 노력은 63년 8월 부분핵실험금지협정이 성사되면서 결실을 보았다. 대기권 핵실험을 중단하되 지하 핵실험만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맥밀런 시대에 최고의 외교적 성과로 평가된다. 이 협정 덕에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쇼프 서기장 양쪽으로부터 인내심과 외교력을 칭송 받았다. 여기엔 영국의 핵 전력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국제사회에서는 비전과 실력, 그리고 확실한 동맹이 있어야 조정자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그러나 맥밀런식 외교는 정작 이웃 나라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맥밀런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나 영연방 내 교역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영국 경제의 미래 성장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최초의 영국 지도자였다. 그래서 국내 반발을 무릅쓰고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신청을 했으나 63년 1월 드골이 “농(Non)”을 선언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가 일기에 “국내외의 모든 정책이 온통 폐허가 됐다”고 적었을 정도다. 미·영이 공유하던 핵기술을 프랑스에 넘기기를 거부하자 드골이 몽니를 부린 것으로 해석된다. 영국의 유럽 합류는 맥밀런 이후로 미뤄졌다.

대처에게 “전쟁내각에 재무장관 넣어라”
맥밀런은 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격식 있는 정치를 편 마지막 영국 총리로 기록된다. 19세기에 태어나고 1차 대전에 참전한 최후의 총리이기도 하다. 이는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었다. 한때 각료의 과반수를 자신의 출신학교인 사립학교 이튼 칼리지 졸업생으로 채웠을 만큼 그는 비슷한 배경의 인물을 선호했다.

그러나 정작 맥밀런을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한 것은 부하의 섹스 스캔들이었다. 63년 각료 존 프로퓨모가 소련 스파이와 내연관계에 있는 성매매 여성과 관계를 맺은 게 대중지에 폭로되면서 결정타를 얻어맞은 것이다. 케임브리지대 출신으로 차기 정보수장으로도 거론되던 킴 필비라는 인물이 오랫동안 소련 스파이로 암약하다 그해 초 망명한 사건도 영향을 미쳤다.

맥밀런은 전립선암 진단(훗날 오진으로 밝혀짐)을 받고 하원의원마저 사임하고 은퇴했다. 이후 가업인 출판사 회장과 옥스퍼드대 이사장을 지내면서 두고두고 후임 총리들에게 시어머니 노릇을 했다. 82년 포클랜드 전쟁이 터지자 마거릿 대처 총리에게 “전쟁내각에 반드시 재무장관을 포함하라”는 충고를 했다. 대처는 승전 뒤 “이 조언 덕분에 군이 원활하게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며 맥밀런에게 감사를 표했다. 맥밀런의 리더십과 통찰력은 은퇴 20년이 지난 뒤에도 빛을 발휘한 것이다.

맥밀런은 젊은 시절인 1차 대전 당시 목격한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삶을 개선하기 위해 경제·사회 개혁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자유당에 입당했지만 1920년 한 해에 16명의 하원의원을 배출한 세도가인 캐번디시 집안의 여인과 결혼하면서 보수당으로 말을 갈아탔다. 보수당 간판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에도 그는 평생 당내 개혁파로 활약하며 초지일관의 신념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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