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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넬슨 록펠러 <3> 흑인 민권운동지지와 뉴욕주 ‘복지병’ 부상(浮上)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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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10월21일 16시00분
  • 최종수정 2021년10월19일 13시58분

작성자

  • 이상돈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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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록펠러는 자본주의의 폐단을 시정하고 민권을 수호해야 자본주의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뉴욕 주지사로서 그런 철학을 실천에 옮겼다. 또한 그런 기치를 내걸어야 자기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뉴욕 주지사로서 세금을 인상하고 복지 후생 교육 분야에 대한 지출을 과감하게 증가시켰다. 록펠러는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했는데, 특히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4. 4) 목사의 잠재력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지지를 보냈다. 록펠러는 첫 임기 중 마틴 루터 킹을 올바니로 초청해서 만나 격려했는데, 킹에 대한 록펠러의 지지는 단순히 심정적인 데 그치지 않았다. 

 

1963년 5월, 알라버마 버밍햄에서 있었던 흑인 민권시위로 인해 많은 참가자들이 체포됐는데, 이로 인해 시위 행진을 주도한 킹 목사는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 이때 록펠러는 비서를 통해 체이스 맨해튼 은행 지하 사무실에서 마틴 루터 킹의 변호사인 클라렌스 존스를 만나서 현금 뭉치가 가득 들어있는 가방을 전달토록 했다. 킹 목사 측은 이 돈을 보석금으로 내고 시위 참여자들을 석방시킬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50년이 지나서 확인됐는데, 실제로 마틴 루터 킹은 “남부에 록펠러 같은 주지사가 한두 사람 만 있었더라도 흑인 문제는 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1965년 킹 목사가 알라버마 셀마에서 두 번째 시위행진을 할 때에 록펠러는 자신의 사촌인 알렉산더 올드리치를 보내서 참여하도록 해서 지지를 표명했다. 킹 목사가 세운 간디 인권센터에도 록펠러는 25,000달러를 기부했다. 1968년 4월 킹 목사가 암살되자 록펠러는 뉴욕 주정부 청사에 반기(半旗)를 걸어서 조의를 표했고, 조문사절단을 파견했으며 장례비용을 지불했다. 

 

그러나 이 같은 록펠러의 행보는 공화당 내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1968년 대선에도 도전했으나 공화당 내에서 록펠러의 입지는 전과 같지 않았고, 결국 리차드 닉슨이 공화당 후보로 선출됐다. 록펠러의 두 번 째 부인 해피 여사는 1970년 주지사 선거에 나서지 말고 은퇴하자고 주장했으나 록펠러는 다시 선거에 나섰고 당선돼서 4선을 기록했다. 

 

그러던 중 록펠러의 주지사로서의 업적에 큰 오점을 남긴 사건이 발생했다. 1971년 9월 9일, 애티카에 있는 뉴욕 주립 교도소에서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간수 39명을 인질로 잡는 일이 발생했다. 협상이 지연되자 사흘째 되던 날, 록펠러는 주 경찰과 주 방위군에게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치열한 총격전이 일어나서 인질로 잡혀 있던 간수 10명과 죄수 29명이 사망했고 100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대부분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주 경찰과 방위군이 발사한 총격에 의해 발생해서 진압을 명한 록펠러 지사에 대한 비난이 일었다. 그럼에도 록펠러는 진압이 정당했다고 주장했는데, 이 사건은 뉴욕 주지사로서 록펠러가 겪은 최악의 사건이었다. 

 

또한 록펠러가 도입한 복지 정책은 부작용이 드러났다. 뉴욕 주는 부채가 폭증했고, 복지 혜택을 둘러싼 사기와 불법이 만연했고 마약 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록펠러는 마약거래범에 대해 강제적 종신징역을 부과하는 법안을 제안했고, 복지 사기가 횡행하는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일찍이 복지를 확대시킨 뉴욕주는 복지병(病)도 일찍 앓았고, 이런 현상에 대해 록펠러는 심한 좌절을 느꼈다. 

 

1970년 선거에서 넬슨 록펠러는 4선에 성공했지만 같은 날 치러진 상원의원 선거에서 뉴욕 유권자들은 뉴욕보수당(Conservative Party of the New York State) 후보로 나온 제임스 버클리(James Buckley 1923~ )를 당선시켰다. 보수를 내건 제3당 후보가 뉴욕을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것이니 록펠러가 이루어 놓은 뉴욕 주의 진보 정책에 대한 비판과 염증이 늘어났음을 보여 준 셈이다. 

<제임스 버클리는 내셔널 리뷰지의 창립자인 유명한 보수 논객 윌리엄 버클리 2세(William Buckley, Jr. 1925~2008)의 친형이다. 윌리엄 버클리는 1965년 뉴욕 시장 선거에  진보성향의 공화당 후보 존 린지에 대항해서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패배한 적이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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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 1961년 뉴욕 주 수도 올바니에서 만난 록펠러와 마틴 루터 킹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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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71년 9월 애티카 교도소 폭동을 보도한 타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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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70년 뉴욕 주 선거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제임스 버클리(오른쪽)과 그의 동생 윌리엄 버클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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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10월21일 16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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