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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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父情)과 부정(不正) 사이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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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8월09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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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은혜는 드높았다. 곱게 키운 자식이 행여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고생할까, 직접 이력서를 지인에게 건넸다. “우리 딸 스포츠학과 나왔다”는 한 마디에 사장은 알아서 계약직 자리를 마련했다. 급여도 본래 기준보다 높게 책정됐다. 그 딸은 이듬해 대졸 신입사원 공채에 합격했다. 대다수 청년들이 꿈에 그리는 정규직이 됐다. 다만 하나 다른 점은, 접수 마감 한 달이 지나서 서류를 제출했다는 사실이다. 인성검사 기준에도 미달했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공채에 도전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곤 상상하기 힘들다. 상식의 마지노선을 넘었다. 그러나 부정(父情)은 상식을 가볍게 뒤틀었다. 아빠가 김성태 국회의원, 최고의 스펙이었다.

 

부정채용 문제가 불거졌다. 언제까지고 숨겨질 건 아니었다. 늦게나마 터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하나, 그래도 공개채용은 공정하다는 믿음이 부서졌다. 회사 고위직 마음대로 자리를 만들고, 전형을 생략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의사로 회사가 작동함을 알았다. 굴지의 대기업이 마치 구멍가게처럼 운영됐다. 당시 공채 경쟁률은 81대 1이었단다. 그러나 국회의원 아빠를 둔 덕에 그것은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

 

사과는 없었다. 김 의원은 불구속 기소되면서도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대신 눈물을 흘렸다. 다른 지원자나 국민들에 사과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보다 검사의 ‘피의사실 공표’에 분노를 표했다. 서울남부지검 앞에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였다. 전형적인 물타기다. 피해봤다면 그건 그것대로 다투면 될 일이다. 설령 피의사실 공표가 인정된다 해도 청탁한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억울할 수도 있다. 본인은 청탁이 아니라고 믿었을 수 있다. 국회의원인데 그 정도야 할 수 있지 뭐, 라는 지독한 오만이었겠다. 아니 오히려 무지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으로 ‘사유’를 말했다. 사유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것일까, 올라가고 나니 그렇게 된 것일까. 무엇이 됐든, 정상이 아니다.

 

김 의원은 KT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알까. 취준생들이 어떤 기회비용을 치르면서 사는지 생각해봤을까. 올해 대졸 실업자 수가 2년 만에 60만 명을 넘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대 실업률은 2009년 8월 8.0%에서 올해 8월 10.5%로 급상승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사건은 취업준비생들에게 박탈감을 넘어 허탈감을 안긴다. 노력해도 넘어설 수 없는 벽의 존재를 실감케 한다. 대다수 취준생이 최종합격까지 서너 차례의 전형마다 숨죽이며 결과를 확인한다. 떨어져도 그 이유조차 알 수 없다. 스스로의 부족함만 찾을 뿐이다. 9가지 장점보다 1가지 단점에 좌절한다. 국회의원 아빠를 두지 못한 탓인가. 

 

이번 사건은 그저 단발성 채용비리가 아니다. 정치권력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은 국기문란 사건이다. 사유하지 않는 위정자와, 회장 말 한마디로 굴러가는 기업 구조의 오래된 짬짜미다.  ‘특수한 권력’을 가지니 ‘특별한 사람’이 됐다고 착각했다. 권력은 사회적 권리의 형태일 뿐이지, 특정 개인에게 귀속되는 소유물이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는 이런 행태가 만연하다. 암처럼 퍼져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하다. 과감히 도려내야 한다. 기준을 세워야 한다. 기준은 명확하다. 자연인이 아닌 권력자로서 자식에게 도움을 주는 순간이다. 그의 부정(父情)은 부정(不正)했다. 그는 아버지로서도, 공직자로서도 탈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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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8월09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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