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의 행복한 지혜 산책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선비정신”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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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생가’를 방문했다.
생가는 넓은 공간에 보존이 잘 된 아름다운 고택이었다. 역사학자이며 『역사에서 길을 찾다』의 저자인 이배용 이화여대 전 총장은 함께 고택을 탐방하며 추사 김정희의 인생행로에 대한 해설을 명쾌하게 들려주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년)는 태어날 때부터 화제의 인물이었다.
“어머니가 추사를 임신했을 때 뒤뜰의 우물물이 마르고 뒷산의 초목이 말랐는데, 추사가 태어나니 샘물이 다시 솟고 초목이 생기를 찾았다고 해요.”
신동으로 소문난 추사가 어린 시절 대문에 써 붙인 입춘대길(立春大吉) 글씨를 본 재상 채제공이 아버지에게 충고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아이는 글씨로써 대성하겠으나 그 길로 가면 인생행로가 몹시 험할 것이니 다른 길을 선택하게 하시오.”
추사는 24세에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동행하여 ‘연경’에 머무르면서 명망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추사는 당시 최고의 학자였던 완원(阮元)과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배울 수 있었다. 이들도 조선 젊은이의 학문의 깊이와 열정에 감동하여 정성을 다해 가르쳐 주었다.
북경에서 돌아온 후 추사는 청나라의 신학문과 고증학을 공부하여 비문(碑文)을 연구하는 금석학(金石學)을 개척했다.
‘실사구시파’의 태두가 된 추사는 비문이 있는 현장을 찾아다녔다. 먼저 북한산에 올라 ‘무학대사비’로 알려졌던 비문의 탁본을 해서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냈다. 경주에도 내려가서 ‘무장사비’ 등의 비문을 찾아냈다.
그는 중국에 있는 스승에게 편지로 질문하고 배우면서 학문의 열정을 살려 나갔다. 스승들 역시 가까이 있지 않아 더 자세히 알려줄 수 없어 안타까웠으나 서찰을 통해서나마 최선을 다해 가르쳐주었다.
그는 대과에 급제하여 관료로서도 탄탄대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병조참판까지 올라갔다. 명문가로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게 없는 그에게 인생의 먹구름이 몰려왔다. 당쟁에 휘말려 문초를 당했다. 죽음을 겨우 면했으나 1840년 그의 나이 55세에 제주도 위리안치 형이 내려졌다.
위리안치는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바깥에서의 활동은 제한되는 것으로 유배 중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이다. 다산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 유배되었으나 그 지역 내 이동은 자유로웠던 반면 추사는 그렇지를 못했다.
추사는 그 서러움을 학문연구와 붓글씨로 달랬다. 부인에게 한글 편지를 자주 보냈으나 귀양살이 3년째, 부인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다행히 그는 인복이 있어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역관 이상적은 중국에서 매년 귀한 책을 구해와 보내주었다. 추사는 제자의 의리에 감동하여 1844년에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을 그려주었다. 〈세한도〉는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해 ‘나무 네 그루와 집 한 채’만을 그려 넣어 추운 겨울의 스산한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국보 180호로 지정된 〈歲寒圖〉는 조선시대 인문화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추사는 발문에 이상적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 적었다.
“세상 사람들은 도도한 물살처럼 오직 권세와 이익이 있는 곳에 수없이 찾아가서 잘 보이려고 하는데, 이 남쪽 끝에 떨어져 늙고 초라해진 노인에게 보내는 그대의 마음을 보니, 흡사 공자 말씀에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 잎이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구나. 그대가 나에게 한 일이 귀양 오기 전이나 후나 변함이 없으니.”
이상적은 〈세한도〉를 중국에 가지고 가서 감상회를 열었다. 당대 청나라의 쟁쟁한 학자와 문인 16명이 감상문을 썼다. 세한도는 중국학자들의 감상문까지 더해지면서 유명해졌다. “명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다”고 했던가? 〈세한도〉는 추사가 처한 극한적인 상황과 청나라 나들이로 인한 국제적인 명성까지 더해지며 명작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세한도〉는 추사 연구가인 일본인 후지즈카 치카시 교수가 소장하고 있었으나, 서예가 손재형이 일본까지 건너가서 몇 달 동안 집으로 찾아가 “이 작품은 한국에 꼭 있어야 한다”고 지성을 다해 설득했다. 손재형의 정성과 집념에 감명 받은 치카시 교수는 “그대의 나라 물건이고, 그대가 나보다 이 작품을 더 사랑하니 가져가라”고 하면서 돈 한 푼 받지 않고 작품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집이 폭격으로 전소되었는데 만약에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재로 사라질 뻔한 작품이었다.
추사는 유배 생활이라는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고 추사체를 완성하여 학문으로 승화시켰다. 추사체는 역대 중국 문필가들의 글씨체를 연구하고 습득하여 그들의 장점들을 살려서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창의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9년 만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추사는 대흥사에 들러 오랜 친구 초의선사를 만났다. 서울로 올라와 지내다 67세 때 다시 정쟁에 휘말려 북청으로 2년 동안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인생의 말년에는 경기도 과천에서 지냈다. 마지막 작품으로 봉은사의 <판전(版殿)>을 남기고 71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작은 이익과 권력 앞에 눈이 어두워 진리에도 눈을 감는 현실 앞에서 조선 선비정신의 절정을 그려낸 〈세한도〉의 고고한 모습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배용 총장은 “추사 김정희와 제자 이상적이 보여 준 역지사지, 포용과 상생의 선비정신이 오늘날 더욱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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