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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언론의 대학평가, 끝나지 않는 줄 세우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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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9월28일 18시02분
  • 최종수정 2018년09월29일 17시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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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이 지났다. 2014년 여름 대학가에서 중앙일보 대학평가에 반대하는 보이콧이 일었다. 고려대, 경희대, 국민대, 동국대, 서울대, 성공회대, 연세대, 한양대 총 8개 대학의 총학생회가 나섰다. 학생들은 천편일률적인 평가와 서열화를 조장하는 언론사의 평가에 문제를 제기했다. 4년이 지난 2018년 여름에도 언론사 대학평가는 연례행사처럼 발표되었고, 줄 세우기의 그늘은 여전히 드리워져 있다. 언론의 대학평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알 권리는 누가 무엇을 알 권리인가. 

  

대학평가의 목적

 

 ‘평가’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줄어가는 학생 수를 고려할 때, 대학의 수가 늘어가는 것을 방관할 수만은 없다. 평가에 따라 상위 60% 대학은 3년간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고 하위 40% 대학은 정원을 감축하는 등 제한을 받는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맞춰 대학 수를 조정하고, 부실하게 재정 운영을 하는 학교에 대해서는 정원을 감축하는 등 제재가 필요하다. 정부 주도로 교육부가 매년 실시하는 ‘대학 기본역량 진단평가’의 정당성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더해, 배움의 목적에서 벗어나 취업사관학교로 변질되는 오늘날의 대학문화에 대응해 적절한 규제가 이루어져야 함은 자명하다. 

 

 교육부가 주도하여 한국교육개발원의 대학역량진단센터가 ‘대학 기본역량 진단’을 실시한다. 평가의 주요 추진 배경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구구조의 변화에 대응해 부실한 대학을 개혁해 책무를 다하게 하고 정부는 지방과의 균형발전에 정책적 대비를 하는 것. 둘째,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다해 고등교육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 목적에 다다르기 위해 평가를 실시한 뒤 일부 대학에는 컨설팅이 실시되며, 후속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등 후속조치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 뒤, 부실 대학으로 분류된 대학에서는 총장이 사퇴하는 등 급격히 흔들리게 되고,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평가기준이 지역 대학들에 불리하다는 비판도 있다.

 

언론의 대학평가, 왜 존재할까?

 

 이외에도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사가 주도하는 대학평가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지표인 중앙일보의 대학평가가 내세우는 추진 배경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세분화된 평가 기준을 통해 학생과 학부모에게 대학 정보를 제공하는 알 권리의 실현. 둘째, 지표 공개를 통해 대학의 경쟁력 강화 계기를 마련. 중앙일보는 종합평가와 학과평가로 나누어 점수를 부여한 뒤 최상, 상 등에 해당되는 학과를 분류해 발표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언론사의 대학평가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앞으로도 지금 같은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전제하에, 언론사의 대학 줄 세우기는 이미 불이 나 활활 타오르는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기 때문이다. 언론사의 대학평가는 종합지표와 학과지표를 나누어 평가할 뿐 어떠한 후속조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질적 가치를 더해 평가했다고 말하지만, 그 평가 기준을 살펴보면 논문개수, 교환학생 수, 외국학생의 다양성 등 양적인 것 위주의 평가가 이루어져 여전히 줄 세우기 그 이상의 목적에 다가가지 못한다. 대학의 서열화, 학벌주의 문화를 강화하는 부작용이 알 권리 실현이라는 일말의 긍정적 효과보다 훨씬 크게 느껴진다.

 

불이 난 학벌주의 사회

 

 4년 전 대학평가에 대한 보이콧을 보며 학생들의 용기 있는 문제제기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특히나 소위 말해 서열문화의 위쪽에 위치하는 학교에서 나섰다는 것은 학벌주의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특정 언론사의 평가에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쳤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진단하고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차별화 되지 않는 대학평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평가는 왜 현재진행형일까?’라는 물음 뒤에는 학벌주의의 병폐가 있다.

 

 학벌주의의 병폐는 획일적 입시문화를 낳았다. 예비고사와 학력평가 세대를 거쳐 지금은 대학수학능력평가(수능) 세대다. 수험생들은 진로와 철학에 대해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국영수’ 기계가 되어 대학에 진학한다. 학벌주의는 학교 이후 사회에서 더욱 기승을 부린다. ‘서오남’(서울대 오십대 남성),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출신)이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로 학연과 지연의 벽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미 대학에서부터 SKY를 중심으로 동아리와 학회가 생겨나고, 로스쿨에 진학할 때도 자교 이상의 학교를 가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진입장벽은 견고해져만 간다. 줄 세우기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대학평가는, 이미 불난 사회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뿐이다.

 

껍데기가 아닌 방향을 바꿔라

 

 2014년 학생들의 중앙일보 대학평가 보이콧 움직임이 인 뒤, 평가 기준을 수정하는 등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방향은 그대로였다. 학생들은 대학의 서열화를 조장하는 지표를 비판했으나, 여전히 숫자와 순위가 맴돌고 있다. 언론사 대학평가가 내세웠던 알 권리의 실현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실현하고, 각 대학에는 경쟁력 강화 계기 마련이라는 그럴듯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숫자가 반영하지 못하는 이면을 보여줄 때 비로소 존재에 대한 물음에 당당히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평가 기준인 논문 개수보다 궁금한 것이 있다. 평가지표에 맞추기 위해 논문을 쥐어짜내는 문화가 있지는 않은지, 부당한 요구는 없었는지 궁금하다. 논문의 저자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쓴 것인지, 행적직원들이 밤을 세워가며 대학평가지표를 맞추려 전전긍긍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알 권리는 정보의 제공자가 말할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제공 받을 이들이 정말로 궁금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논문 개수보다 무엇이 그 많은 논문을 쥐어짜냈는지가 궁금하다. 취업자 수나 취업률보다 제대로 된 윤리의식 없이 직업만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대학은 평가지표에 맞춰 질적인 가치를 소홀히 할 필요가 없고, 우리는 논문 개수 이상을 담아내지 못하는 지표에 눈길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최상-상-중’으로 학교를 줄 세우는 평가는 알 권리 실현이 아니다. 부정적 입시문화, 학벌주의 문화를 조장하는 ‘폐단’이다. 교육부가 실시하는 것과 차별화되는 것이 없으면서 숫자만 공개하는 언론사의 대학평가는 학벌만능주의의 분위기를 심화시킬 뿐이다. 언론사의 대학평가가 논문 개수, 교환학생 수가 담아내지 못하는 교육의 가치를 담아내 진정한 알권리를 실현하기를 기대해본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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