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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별을 봐야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12월28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3년12월26일 11시47분

작성자

  • 김동률
  • 서강대학교 교수. 매체경영. 전 KDI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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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이다. 한 학기가 끝났다. 물론 종강 이후에도 캠퍼스에서 문득문득 만나게 된다. 그래도 종강은 헤어짐으로 인해 묘한 느낌을 준다. 사제간의 라뽀르(rapport)를 형성하지 못한 채 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학에서도 그 옛날의 낭만적인 사제지간이란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지식을 수수(授受)하는 관계, 수업이 끝나면 곧 남남이 된다. 

 

세모다. 주변에 우울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열심히 살았든 그렇지 못했든 세밑은 아무래도 쓸쓸하다. 별것도 아닌데도 자주 울컥해진다. 누구는 불행하고 또 누구는 행복한 한 해를 보냈을 것이다. 인간의 불행과 행복에 관해 가장 이해가 쉬운 해석은 영화 노팅힐에 나온다. 

 

평범한 서점주인 월리엄(휴 그랜트)과 세계적인 배우 애니(줄리아 로버츠)가 주인공이다. 그저 그런 멜로영화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대목은 이른바 “불행 털어놓기” 생일파티 장면에 있다. 마지막 남은 브라우니 한 조각을 두고 가장 불행한 사람이 먹는 걸로 하자며 모두가 자신의 불행을 고백한다. 이혼의 상처와 꿈조차 없는 주인공 월리엄의 이야기가 끝나자 브라우니는 당연히 월리엄의 손으로 갔다. 그 순간 애니가 나선다. 다이어트 때문에 늘 굶주렸고 고통스런 성형을 두번이나 했고 잊혀질까 두려워하는 깊은 속내를 털어놓는다. 불행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그녀가 가장 불행한 것으로 정리된다. 마지막 브라우니는 가장 불행했던 그녀에게 간다. “행복한 가정이란 모두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 나름으로 불행한 것이다.” 톨스토이가 이미 장편 소설 <안나 카레니나> 첫 구절에서 명쾌하게 말했다.

 

불행과 행복의 묘한 경계를 나타낸 또 다른 얘기가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다. 아주 짧은 얘기다. 어느 늦가을 저녁, 남쪽을 향하던 제비가 행복한 왕자의 동상 발등에서 잠을 청하는 순간,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살아 생전 불행을 몰랐던 왕자는 죽어 동상이 되어 높은 곳에 자리 잡게 되자 세상의 온갖 슬픈 일을 지켜보게 된다. 왕자는 이제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 제비에게 부탁해 자신의 몸을 치장한 수많은 보석을 떼내어 그들에게 나눠준다. 남으로 날아갈 시기를 놓친 제비는 왕자의 모든 보석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주기를 끝냄과 동시에 동상 발아래 얼어 죽는다. 봄이 오자 마을 사람은 한때 마을의 자랑거리였던 왕자의 동상이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 있다며 부숴버렸다. 이 모습을 지켜본 하느님이 천사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두 가지 즉, 제비와 왕자의 심장을 가져오게 해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게 했다는 것이 줄거리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이 작품은 19세기 말 산업혁명과 함께 불어닥친 당시 영국 사회의 이기주의, 물질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도 노팅힐의 여주인공 만큼이나 행복과 불행이 겹쳐 보인다. 와일드는 동시대의 가장 사랑받는 작가이자 유럽 귀부인들을 열광케 한 댄디 보이였다. 하지만 동성애로 인해 추방당해 파리의 하수구 시궁창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파리 페르 라쉐즈공원 그의 묘비에는 전세계에서 몰려온 광팬들의 키스로 빨갛다. 루즈로 인해 대리석 비석이 산페되자 앞에 대형 유리막으로 설치했고 그 유리막 역시 키스로 덮여 있다. 불행과 행복을 넘나든 작가다. 추리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이 파리 방문 시 기자회견에서 일정을 묻자 답했다. “파리에서의 일정요? 당연히 젤 먼저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오스카 와일드의 비석에 키스부터 해야죠”라고. 

 

나도 행복한 왕자를 좋아한다. 그래서 런던에 갈 때마다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그의 검은 화강암 시비(詩碑)를 찾는다. 비록 생전엔 조국으로부터 배척을 받았지만, 사후 일백여년만인 1998년 영국 노동당 정부의 주도로 트라팔가 광장에 시비가 세워짐으로써 명예를 회복했다. 

 

한 학기를 끝내는 지난 주말 수업이 넘 아쉬웠다. 그래서 마지막 고별사로 칠판에 한줄 썼다.  “We all in the gutter but some of us looking at the stars” (우리 모두 진흙탕에 뒹굴고 있지만 그래도 그 누구는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바라본다). 와일드 시비에 있는 구절이다. 나는 이 구절을 종강의 고별사로 갈음하면서 한 세기 전 와일드나 영화 노팅힐이 주는 행복과 불행의 메시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본다. 한 해가 저물었다. 송구영신(送舊迎新) !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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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12월28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3년12월26일 11시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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