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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전쟁 부른 쌀 산업, 지속가능한 미래의 선택은? <7> 쌀의 선택, 사회적 잉여와 권력의 탄생 ①白의 민족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6월20일 17시11분
  • 최종수정 2023년07월04일 18시49분

작성자

  • 최양부
  • 흙살림 고문,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

메타정보

  • 2

본문

<쌀의 선택과 백(白)의 민족 탄생> 

 

‘쌀은 자신(Rice as Self) 이다’ 1)

 

  UN 총회가 2004년을 ‘세계 쌀의 해’로 선포하면서 ‘쌀은 생명이다 (Rice is Life)’를 주제로 정했다.2) 이 말은 한마디로 “쌀은 우리이고 우리가 곧 쌀이다”란 의미를 함축한다.​3)

  세계 인구 절반 이상이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일용할 양식’으로서 쌀의 중요성을 넘어 동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과 수천 년 역사를 같이하면서 사람을 기르고, 문명을 꽃피우고, 나라를 세워온 ‘영혼의 양식’으로서 쌀의 문화 인류학적 가치를 세계인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한(韓)민족은 예로부터 흰색을 숭상하여 흰색 옷을 즐겨 입는다며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기원전 3세기경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편에는 ‘항상 흰옷을 입는다(在國衣尙白)’라고 적었으며, 수서 동이열전 신라 편에는 고(구)리, 백제와 같이 ‘옷색이 무(흰)색이다(服色尙素)’라고 적었다.4) 


 그렇다면 한민족은 언제부터, 어떤 사유로 ‘백(白)의 색’을 좋아하고, 흰옷을 즐겨 입는 ‘백의(白衣) 민족’이 되었을까? 일설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祭天)의식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태양을 상징하는 흰(白)색과 해(日), 하양 등이 어원이 모두 같은 순 우리 말이란 이유를 든다.5) 

  그러나 혹시 ‘백의의 기원이 백미(白米)에서 기원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본다. 한반도에 터를 정하고 벼(쌀 米)를 선택한 한민족이 벼(쌀)을 붙잡고 수천 년을 살면서 한 톨의 벼, 백미를 얻기 위해 자연과 그리고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며 살아오다 어느 순간 흰쌀(밥)이 자신이 되고 자신이 흰쌀(밥)이 되는 ‘자신과 백미의 일체화’가 일어나면서 ‘백미 민족’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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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에게 흰쌀(밥)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하늘과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를 위해 온 마음과 정신이 깃든 흰 쌀밥과 흰 떡과 술을 준비하고 제사상에 올리며 흰 쌀밥과 자신이 하나가 되면서 옷마저 백의를 지어 입게 된 것은 아닐까?6)

  문득 조선 선비들이 사랑한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뿜어내는 순백의 고고(孤高)함이 온갖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익어갈수록 고개 숙이되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알알이 맺힌 백미와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오늘의 한국인에게 흰쌀밥은 자신을 나타내는 부의 상징이고 척도가 되기도 했다. 흔히 쓰는 ‘밥심으로 산다’는 말 이외에도 ‘밥줄 끊어졌다’. ‘찬밥 신세다’,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 아니다’. 그리고 ‘밥 먹었느냐, 밥은 먹고 다니냐, 밥 한번 먹자’, ‘밥맛 없는 놈’, 등 등은 한국인의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말들이었다. 

  북한에서는 ‘쌀은 공산주의’라고 불렀다고 한다. 참으로 표현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밥(흰쌀밥)에 고깃국’이 아직도 정치적 선동 구호에 그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말대로 ‘인민에 대한 죄악’이 아닐 수 없다. 흰쌀밥을 배 터지게 먹어 보는 그날만을 갈망하는 북한 동포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통일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않는가 싶다. 쌀이 남아도는 데 북한 동포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밥심, 에너지의 샘 

 

  한국인에게 ‘무슨 힘으로 사느냐’ 물으면 모르긴 해도 십중팔구는 ‘밥심’이라고 했던 때가 엊그제 같다. 흰쌀밥은 한국인의 마르지 않는 기운, 힘, 에너지의 샘이었다. 에너지인 ‘정기(‘米+靑, 气+米’)는 쌀(밥)이다‘ 라고 글자가 말하고 있다. 그렇게 쌀(밥)은 한국인의 주곡(主穀)이고, 주식(主食)이요, ‘보약’이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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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프랑스에서 유통되던 한국 관련 사진 엽서, 사진 아래에 'COREE, Bon appetit!(한국인, 많이 드십시오)‘라고 적혀 있다
.8)>

  

  실제로 쌀밥 한 공기(210g)는 270~300kcal의 높은 열량과 탄수화물 65.2g을 가지고 있어 먹으면 일찍 기력을 보충하고 포만감을 가지게 한다. 이외에도 단백질 5,7g, 지방 1.0g, 무기질(인, 칼륨, 마그네슘 등), 바타민(B1, B2, B3, B6 등) 등 다양한 영양소를 고르게 갖추고 있어9)한국인의 에너지, 건강과 영양을 책임져왔다. 

  그러나 위의 <사진>처럼 “조선 말기 한국인은 밥 많이 먹는 다식가(多食家)로 세계에 알려졌다. 한국을 방문한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밥을 많이 먹는 것을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고, 한국인은 밥을 엄청나게 많이 먹는다는 기록을 많이 남겨 놓았다”고 한다. 10)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多食)에 힘쓰는 것은 천하에서 으뜸이다”라고 적었기도 했다.11)

 

  더욱이 한국인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쌀밥을 중심으로 육류와 생선류, 김치와 나물류 등의 다양한 계절 혹은 제철 반찬을 한 상 가득 차리는 ‘반상(飯床)의 식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쌀을 다양한 잡곡과 혼합한 오곡밥, 잡곡밥, 찰밥, 감자밥, 옥수수밥 등등 흰 쌀밥의 부족한 영양소와 부족한 쌀을 보충해왔다. 쌀을 재료로 하는 술, 인절미와 찰떡, 송편, 약과, 다식, 엿, 조청, 식혜 등 전통 음식과 비빔밥, 김밥, 떡볶이, 막걸리, 청주 등등이 고추장, 쌈장, 그리고 김치와 함께 ‘K-푸드’를 상징하는 대표 음식이 되었고 이제는 한식 세계화의 첨병이 되어 세계인의 입맛까지도 홀리기 시작한 것은 참으로 금석지감이 있다. 

  요즈음은 한식만이 아니다. 한반도의 들판을 덮고 있는 논은 생물 다양성을 보전하는 생태계가 되었으며, 여름의 초록 들판과 가을의 황금 들판은 한국을 대표하는 자연경관이 되었다. 모두가 벼농사가 연출하는 구조물이고 색이고 경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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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어 쌀농사를 위해 노동의 고통을 달래주던 새참의 막걸리 한잔에 읊조리는 노동요와 풍물의 넘치는 흥은 한국적 신명과 풍류가 되었으며 이제는 사물놀이가 되어 ‘K-POP, K-국악’이란 이름으로 세계인의 흥을 돋구고 있다. 모두가 쌀농사가 만들어낸 소리의 유산들이다. 

 

쌀을 위한, 쌀에 의한, 쌀의 나라 

 

  그러나 한 톨의 쌀을 만들기 위해 한민족은 팔십팔(米, 八十八) 번의 손품을 팔아야 했다. ‘농사짓는 소설가’를 자처하는 최용탁이 “수천수만 년 동안 쏟아부은 쌀을 얻기 위한 노력, 그것은 차라리 위대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더딘 전쟁에서 얻은 소중한 전리품이 바로 논(畓) 이다”라고 한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12) 

한반도에 볍씨가 전해진 이후 오늘까지 한민족은 야생 벼를 길들이고, 개량하고, 이앙(移秧)을 하고, 피를 뽑고(피사리), 벼 이삭을 잘라 말리고 털고 찌어서 마침내 한 톨의 하얀 쌀을 얻었다. 한민족은 쌀을 위해 살아야 했다. 한민족은 산과 들을 개간하고, 갯벌을 간척하여 새 논(畓, 水+田)을 만드는 ‘개답(開畓)’을 했다. 논을 표현하는 답(畓)은 ‘물(水)아래 있는 밭(田)’이란 순전한 우리말이고 우리식 한자 말로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13)  

  그들은 가뭄에, 홍수에 벼를 돌보고 지켜야 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벼농사를 위해 논을 기름지게 유지하기 위해 모든 지혜를 모아야 했다. 1909년 한국을 비롯 중국과 일본을 방문한 미국 농림부 토양관리국장을 지낸 프랭크린 H. 킹은 다음과 같은 방문 조사 기록을 남겼다.14)  그는 100여 년 전 우리 조상들이 나와 가족과 나라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했는가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5억 명쯤 되는 이들이 4천 년이란 긴 세월을 거치면서 고스란히 간직해온 그들의 농업기술...수많은 역경과 경험을 통해 습득한 농사법과 기술...4천년이 지난 후에도 어떻게 땅이 수많은 사람들을 변함없이 먹여 살릴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수십 세기 동안 자연자원을 사용하고 보존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땅에서 난 것을 다시 땅으로 돌려보내는 그 위대함에 놀랐으며...중국, 한국, 일본이 모두 인구밀도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좁은 땅에서 삶을 지속시켜 왔는지... 쌀과 조를 기본 작물로 선택한 것과 그들이 발전시켜온 농업시스템은...생각해볼 만한 본질적이고 중요한 원칙을 일깨워 준다...

  동아시아인들은 농사에 있어 물의 중요성을 수십 세기 전부터 인식하고 있었다는 걸 알수 있다. 이들은 땅을 가장 기름지게 하고, 가뭄 때나 홍수 때나 가장 많이 나는 곡물, 즉 벼를 찾아낼 때까지 끊임없이 환경에 맞는 곡물을 찾아왔고 또 곡물에 맞게끔 환경을 개선 시켜 왔다. 서구의 농법으로는 아무리 기후가 다습해도, 아무리 완벽하게 비료를 준다고 해도 물을 이용해 수확량을 조절할 수가 없다. 쌀 문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수로 체계의 중요성을...잘 알고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땅을 집약적으로 이용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고 있다.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모든 산과 언덕에서 땔감과 목재, 풋거름 및 퇴비 재료를 구할 수 있다. 땔감과 목재를 쓰고 남은 재는 땅에 비료로 뿌린다...사람이건 동물이건 모든 종류의 배설물은 잘 처리해 땅에 뿌리는데 농사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아주 좋다...     무엇보다 이들 국가가 농업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생산계층의 삶의 모든 부문에서 실천해온 모범적인 생활태도 때문일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땅은 먹을 거리와 연료, 옥감을 생산하는데 남김없이 쓰인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사람과 가축의 입으로 들어간다. 먹거나 입을 수 없는 모든 것은 연료로 쓰인다. 사람의 몸과 연료, 옷감에서 나온 배설물과 쓰레기는 모두 땅으로 되돌아 간다...한 시간, 또는 하루의 노동이 조금이라도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면 일을 놓지 않고, 비가 오거나 땡볕이 쏟아져도 일을 게을리하거나 미루지 않는 것은 이들에게 적어도 불가침의 원칙으로 보인다” ed4b89c31f14e8bcf90518690197ed0a_1687236

   한반도는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봄가을로 찾아오는 모내기, 추수기의 농번기 에는 ‘농촌일손돕기운동’이란 이름으로 전 국민이 동원되는 거국적 행사가 열렸다. 한국인이 벼농사의 중노동에서 해방된 것은 모내기 작업을 위한 이앙기가 개발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가을 추수도 기계가 하기 시작한 1990년대이니 불과 30년 안짝의 이야기다. 요즈음은 시골 노인들마저 농사짓기가 가장 수월한 것이 쌀농사라고 말하는 시절이 되었다. 지금은 그 모든 작업을 기계가 하고, 전화로 농사짓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답작(畓作)사회와 전작(田作)사회의 탄생

 

  이처럼 한민족이 한반도에 거처를 정하고 쌀(밥)을 생명의 양식으로 선택하는 결단을 내린 이후 한반도가 가진 기후와 지형 지세 등을 따져 쌀을 위한 국토 개조의 대장정에 나선 것은 ‘운명의 힘’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쌀을 얻기 위해 논을 만들고 벼를 재배하는 일은 고된 노동일뿐만 아니라 운명적으로 혼자서는 할 수 없어 이웃과 힘(力)을 모아야(協) 하고 온 나라가 나서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한민족은 벼농사를 위한 답작 공동체 사회를 만들었다.  

  모르긴 해도 그런 유사한 결정을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와 한국을 비롯한 중국 양쯔강 유역, 일본등 동북아시아인 들도 내렸을 것이다. 그들도 벼(쌀)를 붙잡고 동남북 아시아를 ‘논(畓作) 농업사회’로 발전시켜왔을 것이다. 다만 기후 등 환경의 차이로 한국과 일본 등 동북아시아인은 찰기가 있는 ‘쟈포니카’라고 부르는 ‘단립종(短粒種)’ 벼를, 동남아시아인은 ‘인디카’라고 부르는 ‘장립종(長粒種)’ 벼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럽과 멕시코 등 아메리카인들은 밀과 옥수수를 붙잡고 ‘밭(田作) 농업사회’를 발전시켜왔을 것이다. 그 결과 논 농업의 벼농사를 지은 동아시아 사회는 집단주의적 공동체 사회가, 밭 농업의 밀, 옥수수농사를 지은 유럽과 아메리카 사회는 개인주의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15)

 

  “벼농사는 물이 많이 필요 하기 때문에 대규모 관개시설이 필요했고 농사를 지을 때도 이웃 간에 물을 잘 나눠 써야 했다. 또 피를 뽑는 작업 등 밀 농사에 비해 두 배 이상 손이 많이 들었다. 결국 벼농사는 개인(부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벼농사 권에서는 상부상조하는 관습이 이어져 왔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밀과 옥수수 농사는 자연 강우에만 의존해도 되고, 일이 고되기는 해도 나 혼자 힘으로... 큰 어려움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에 농사의 독립성이 컸고 그만큼 다른 사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16) 


쌀 선택이후 당면했던 7대 난제(難題)

 

  ‘인간은 먹을거리’라는 말처럼 먹을거리가 사람을 만들고 정신을 만들고 정체성을 만든다.17)  흰쌀(밥)을 한민족, 아니 한국인 자신이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반도를 살 터로 정한 후 내린 벼(쌀)를 선택하는 결단은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적 선택이고 결단이었다. 

  한민족은 ‘답작(畓作) 사회’를 만들고 고조선, 고구리, 백제, 신라, 고려, 조선과 일제식민지를 거쳐 마침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살면서 한반도를 쌀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은 계속되었고 점차 한민족 자신이 쌀에 붙잡힌 사람이 되면서 ‘한민족다움(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벼농사의 고된 연단 속에서 한민족의 공동체 의식, 집단의식과 단결심, 권위주의, 은근과 끈기 등 한민족의 정체성이 만들었고, 한민족의 유전자가 생겨나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렇게 백미민족이 되었고 백의민족이 되었을 것이다. 벼와 논과 쌀(밥)은 한반도를 만들고 한민족과 한국인을 만들고, 마침내 한반도와 한민족을 쌀의 나라, 쌀의 민족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랬던 한국이 이제는 쌀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반도체가 쌀(밥)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 한국 정치를 강타한 ‘양곡관리 입법전쟁’도 그러한 국민적 정서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오늘이 있기까지 한민족이 한반도를 쌀의 나라로 만들어 온 역사의 여정은 험난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들은 한반도에서 쌀농사가 지속가능하게 하기까지 수 없는 시행착오와 난관에 봉착했을 것이며, 절대적으로 부족한 양곡 확보를 위해 한 톨이라도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서로의 지혜를 짜 모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때그때 부딪친 난제들을 풀어나가기 위해 쌀과 전쟁 아닌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것들은 역사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돌파하는 것 같았을 것이다. 한민족이 한반도를 오늘날과 같은 쌀의 나라를 만들기까지 풀어내야 했을 7대 역사적 난제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한민족이 ‘구원(久遠) 양식’으로 벼(쌀 米)를 선택한 이후 더 좋은 볍씨 종자를 선별하고 품종을 개량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더 좋은 볍씨를 얻기까지 야생의 벼를 순화시키고, 더 많은 나락이 달리고, 병해충이나 가뭄 등에도 튼튼하게 잘 자라는 더 좋은 품종을 찾아내고, 만들어 보급하는 일은 한민족이 볍씨를 선택한 이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최고의 난제 중의 난제가 아니었을까? (우수 품종개발, 관리 및 보급)

 

  두 번째는 더 많은 쌀 생산을 위해 논을 만들고(開畓), 논 경지면적을 화장하는 일과 논에 안정적으로 물을 대고 가두고 빼는 일이었을 것이다. 쌀을 선택한 이후 밭(田)에 뿌렸던 볍씨를 물을 가두었다 뺄 수 있는 물 논(水田, 畓)을 만들어 그곳에서 기르기로 한 것은 한반도의 지형을 바꾸고 한민족의 운명을 바꾼 위대한 발상의 전환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새논을 만들기 위해 개간과 간척을 하고, 논에 물을 대었다 빼기 쉽게 논둑을 쌓고 물꼬를 만들고 물길(水路)을 낼것을 생각해 냈고 이를 실행 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을 어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개답을 하고, 개답 후에는 공평하게 분배, 소유, 이용하게 하는 ‘전정(田政)’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가져오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뒤에는 항상 ‘전정의 문란’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慧眼)과 결단으로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경자유전 원칙’을 담고, 곧바로 ‘농지개혁법’ 제정에 착수하여 마침내 1950년 4월 민주주의적 절차와 방법에 따라 ‘농지개혁’을 단행한 것은 두 달 후에 일어난 북한의 ‘6.25 적화통일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더 안정된 물 공급을 위해 물을 저장하기 위해 보, 저수지, 호수, 댐 등을 만들거나 땅속의 물을 퍼 올리기 위해 우물이나 관정을 파는 일과 물을 공평하게 나누어 쓰는 일 또한 국가적인 일이 아니지 않았겠는가? (개답을 위한 개간 간척, 이용을 위한 공평한 토지분배, 그리고 물의 저장과 관리를 위한 보, 저수지, 호수, 댐과 수로를 건설하고 유지관리에 드는 비용 조달을 위한 토지세, 물세 등의 부과와 징수 등) 

  

  세 번째는 벼가 더 건강하게 잘 자라고, 더 많은 소출을 낼 수 있게 하기 위한 다양한 재배기술, 예를 들면, 직파 혹은 이앙법 등 벼재배 방법의 개선 보급이다. 특히 때를 맞추어 모를 내고, 벼를 거두기 위해 봄, 가을마다 품앗이 등으로 모든 노동력을 총동원했을 것이다. 벼농사를 위한 노동의 강도를 낮추고 더 편리한 농사(便農)를 짓기 위한 농구와 농기계, 특히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맞춤형 이앙기와 수확기를 개발, 보급하기까지 한민족은 벼농사에 붙잡혀 중노동에 시달려야 하지 않았겠는가? (재배방식 개발보급 그리고 벼농사 작업의 간편화를 위한 각종 농구와 기계 개발 등) 

 

  네 번째는 병해충을 방제하고, 잡초를 뽑아내고(피사리), 지속 가능한 수확을 위해 논을 기름지게 하고, 땅심(지력) 유지를 위해 거름(퇴비)을 만들고 논에 넣는 일이 아니었겠는가? 적어도 농약과 제초제와 비료(金肥)가 만들어지고 보급되기 전까지는 한민족의 수고로움을 어찌 필설(筆舌)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병해충 방제, 제초 및 토양 비배 관리) 

 

  다섯 번째는 벼 수확과 수확 후 쌀의 품질(米質) 유지관리를 위한 벼의 건조, 탈곡, 도정, 저장, 포장, 운반, 판매 등을 위한 효과적이고 공정한 양곡 유통관리체제 구축이다. 특히 수요를 따르지 못해 발생하는 ‘매점매석(買占賣惜)’을 방지하는 일 등은 국가의 중요한 과제가 아니었겠는가? (수확 후 관리 및 유통 판매, 효과적이고 공정한 양곡 시장 유통관리 등) 

 

  여섯 번째는 밥 짓는 방법과 불 때는 수고로움이다. 오늘과 같은 전기밥솥의 개발과 보급이 있기 전까지 수천 년의 역사를 우리 어머니들은 가마솥과 냄비솥 밥을 짓기 위해 나무 목재를 이용한 장작불을 때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쌀을 이용한 다양한 가공 식음료의 개발이다. 한민족은 쌀 부족의 어려운 환경에서도 다양한 떡과 술 등을 빚어왔다. (쌀밥 짓는 방법과 연료 확보, 쌀을 이용 가공한 다양한 식음료 개발 등)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는 국가가 개답을 하고 논을 공정하게 분배하고, 물을 저장하고 공정하게 공급 관리하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을 조달하고, 적절하고 공정하게 토지와 수세(水稅)를 부과하고 징수하는 일(田政)은 국가가 추진해야 할 최우선의 난제였을 것이다. 수확 후 시장에서 자유롭고 공정한 거래를 보장하고 공정하고 안정된 가격이 형성되도록 하고, 매점매석 등을 단속하는 일 또한 국가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흉년, 가뭄,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인한 기근 등에 대응한 구휼 사업을 위한 적절한 수준의 비축미와 이러한 일들을 수행하는 관리와 군대를 위해 군량미 등을 확보 관리하고 공정하고 공평하게 배분하는 일(軍政과 還穀)은 국가의 중대사였을 것이다.  

  1608년(광해군 원년)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선혜지법(宣惠之法)이란 이름이 붙은 대동법(大同法)을 도입 세제 개혁을 단행하고 이를 관장하는 국가기관으로 ‘선혜청’을 설립했다. 광해군 때 경기도를 시작으로 강원, 충청, 전라, 경상, 황해도로 이어진 대동법은 100년이 되는 1708년(숙종 34년)이 되어서야 함경, 평안,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18)  

  

  임진왜란 이후 토지 황폐로 부족한 국가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지방의 특산물(공물)을 호구 단위로 바치는 공납제를 폐지하고 토지를 기준으로 하는 전세(田稅)로 바꾸고 지역에 따라 쌀(대동미), 포(布), 돈(대동전)으로 납부하게 하는 19) 늘의 개념으로 보면 국가재정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개혁조치였다. 

  대동법의 시행은 토지를 많이 소유한 양반이나 부호들에는 불리하고 토지가 적거나 없는 농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제도로 농민의 부담은 크게 경감하는 대신 오히려 국가재정을 크게 개선했다. 대동법으로 대동미나 대동전을 사용하여 필요한 공물을 구매하게 되면서 이러한 조정과 지방 관하에게 필요한 상품을 판매하는 관허상인(貢人)의 등장은 자본을 축적한 상인, 자본가의 형성을 촉진하고 상공업의 발달과 화폐경제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는 조선의 양반 중심의 전통적인 신분 사회를 해체하고 농민계층의 분화를 가져온 촉진제가 되었다.20)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대동법에 기초한 전정과 군정과 환곡 등 삼정(三政)이  문란해 지면서 대동법 도입 후 250여 년이 흐른 뒤 조선을 뒤흔들고 조선을 멸망의 길로 이끌고, 결국 한반도와 한민족의 역사와 운명을 바꾼 3대 사건인 1862년 진주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대된 농민항쟁, 1882년의 임오군란, 그리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모두가 삼정문란으로 알알이 맺힌 농민과 백성 등 ‘분노한 쌀’이 일으킨 ‘쌀의 전쟁’이었다. (토지와 물세의 부과와 징수, 비상시 구휼을 위한 비축미 수집 관리 및 공정한 분배 등)

 

  이상을 종합하면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벼(쌀)는 밀, 옥수수와 함께 세계 3대 곡물의 하나가 되었다. 이들이 이처럼 고대로부터 세계인의 각광(脚光)을 받는 곡물이 된 것은 뿌린 씨앗의 양에 대한 수확량이 많아 ‘사회적 잉여’를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밀은 1kg의 씨앗을 뿌리면 5~6kg을 얻지만, 벼는 1kg의 볍씨에서 30~40kg에서 이제는 100kg 이상의 벼를 수확하고 있으며, 옥수수는 1알의 씨앗에서 800개의 알을 수확했다”고 한다. 21)  우리 조상들이 벼(쌀)을 선택한 이후 수천 년 동안 한반도를 쌀의 나라로 만들고 한민족을 쌀의 민족으로 만들게 된 것도 결국 쌀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잉여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한 종의 진화의 성공은 그 DNA의 복사본 개수로 측정된다”고했다.22)​ 다시 말하면 곡물의 재배는 무수한 복재를 통해 ‘사회적 잉여’를 낳았고 그 결과 인구 증가와 함께 인류를 문명사회로 이끄는 ‘신석기 농업혁명’을 낳았으며 정치 권력과 국가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리고 일하지 않고 일하는 다수 농민을 지배하는 정치가와 정부 관료, 군인, 종교인, 예술가, 철학가 등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리게 되었고, 농민은 끊임없이 더 많은 잉여의 창출을 위해 더욱더 많은 노동을 요구받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신석기 농업혁명’의 핵심이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사피엔스를 더 많은 생산이 더 많은 노동을 부르는 ‘생산의 덫’에 빠지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신석기 시대의 농부들은 수렵채취인들보다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며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고 비판한다. 23) 


  지난 수천 년간 한반도에서 쌀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들을 돌이켜 보면 하라리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한민족은 한반도의 땅을 쌀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수천 년을 쌀을 위한, 쌀에 의한, 쌀에 붙잡힌 백성, 농자(農者), 농군(農軍), 아니 차라리 농노(農奴)가 되었다. 이는 비단 한민족뿐만 아니라 세상의 다른 나라 민족들은 밀과 옥수수에 붙잡혔을 것이다. 

  가끔 풍물놀이를 하는 풍물패들이 세운 ‘農者天下之大本(농자천하지대본)’이라 적힌 깃발을 보면 농자들이 자신에게 바친 ‘감사의 헌사(獻辭)’인지, 아니면 ‘분노의 절규(絶叫)’인지 혼란스럽다. 2023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양곡관리법 입법 전쟁’도 결국은 그러한 틀에 사로 잡혀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쌀의 덫’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가 쌀을 붙잡고 살아온 역사를 조금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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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미코 오누키-티어니, 자신으로서 쌀: 일본인의 역사적 정체성 (Rice as Self: Japanese Identities Through Time), 전남대학교 출판부, 2004:23-36 

2) UN 총회는 2002년 12월 16일 2004년을 세계 쌀의 해로 선포했다. 

3) 구자옥, ‘옮긴이의 글’ 에미코 오누키-티어니, 위와 동일, 2004:9-10

4) 백의민족 - 나무위키 (namu.wiki); 우리 민족은 왜 백의민족(白衣民族)이 되었나? (tistory.com); 백의민족(白衣民族)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5) 위와 동일 ​

6) 백의민족(白衣民族)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7) 쌀이 보약 - 당신의 건강가이드 헬스조선 (chosun.com). 2019.10.27

8) 주영하, 식탁 위의 한국사(http://aladin.kr/p/DIVy), 휴머니스트, 2013, p.61

9)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농촌진흥청 어린이 홈페이지 (rda.go.kr)

10) 밥 - 리브레 위키 (librewiki.net)

11) 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제17권, 한국고전종합DB

12) 최수연, 논, 밥 한 그릇의 시원, 마고북스, 2008:5

​13) 중국은 논을 稻田또는 水田, 일본은 논을 田, 밭은 畑 이라고 쓴다. 최수연, 같은 책: 52 

14) 프랭크린 H. 킹, 4천년의 농부: 유기농업의 원류-한국, 중국, 일본, 들녘,2006:9-16

15) 강석기, 쌀의 마음 밀의 마음 – Sciencetimes, 2014.5.23

16) 위와 동일 

17) 에미코 오누키-티어니, 자신으로서 쌀: 일본인의 역사적 정체성 (Rice as Self: Japanese Identities Through time), 전남대학교 출판부, 2004:23-36 

18)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2007:398,

19) <대전회통>에 따르면 경기도 장단(長湍) 쌀은 1섬(石)에 8냥(八兩), 충청도 제천은 6냥, 황해도는 3냥 5전, 강원도는 1섬에 6냥으로 대신하기로 규정되었다.”고 한다. 대동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20) 한영우, 위와 동일, 대동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21) 사카이 노부오, 씨앗의 혁명, 형설라이프. 2013:177-178 

22)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5: 12923)유발 하라리, 위와 같은 책, 12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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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6월20일 17시11분
  • 최종수정 2023년07월04일 18시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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