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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68> 경제개혁이 시급하다 IV. 화폐개혁으로 물가를 잡아보자<上>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4월21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3년04월19일 11시2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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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IV​. 화폐개혁으로 물가를 잡아보자. 

 

화폐제도는 거래를 매우 원활하게 한다. 어떤 화폐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편리함에 다소 차이는 있겠으나 화폐교환체제가 물물교환체제에 비해 매우 효율적인 것은 확실하다. 조선이 건국되자 집권 계층에는 화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화폐 발권에 따른 이익(이권,利權)을 확보하자는 생각이었다. 즉 화폐를 발행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 즉  시뇨리지(seigniorage)를 장악함으로써 경제적 실익을 포착한다는 생각이었다. 화폐의 발행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건실히 함과 동시에 보다 재정적으로 강력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태종도 이런 생각에 매우 투철했기 때문에 집권하자마자 화폐제도를 변경하려고 하였다. 세종은 “이권이 임금에 있다(利權在之於上).”는 생각을 그리 드러나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태평성세의 국가에는 어떤 화폐제도가 합당한지에 더 관심이 많아서 삼대(三代)나 당송과 같은 이상적인 국가의 화폐제도를 모방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태종이 실리에 집착했다면 세종은 이상이나 명분에 훨씬 더 기울어 있었다.

 

IV.1 저화(楮貨)제도

 

고려시대에는 여러 차례 철전을 발행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종 15년(996) 4월에 최초로 철전이 발행되었고 그 후 숙종 2년(1097)에는 해동통보가 발행되었다. 거액거래에는 은병(銀甁)이 이용되었고 소액거래에는 철전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백성들의 대부분 일상거래에는 쌀과 베(미포,米布)가 화폐로서의 기능을 담당했을 것이다. 고려 공양왕 3년(1391) 자섬저화고를 설치하여 저화를 유통시키고자 했으나 그 다음해 고려가 멸망하는 바람에 저화발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태조는 미포 중심의 고려 화폐제도를 그대로 승계했다. 공양왕의 저화도입과 같은 화폐제도를 바꾸는 큰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태종이 저화를 도입하려고 할 때 신하들의 일관된 반대 이유가 ‘백성들이 중하게 여기는 것은 미포(人民所重 米包而己)’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차 저화 강제통용(태종 2년 1월 6일)의 실패]

 

태종은 생각이 달랐다. 화폐 발행 권한은 오로지 국가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미포 중심의 화폐제도를 저화로 바꾸어야 한다고 믿었다. 저화란 닥나무 껍질로 만든 지폐이다. 정부가 저화 발행을 독점함으로써 경제적 이득, 즉 이병(利柄)을 장악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태종은 즉위하자 바로 저화 발행을 담당할 사섬서를 설치하고(태종 1년 4월 6일,1401) 그 다음해 1월 6일 최초로 저화 2천 장을 발행하였다. 발행 당시 저화 1장은 오승포 1필의 값이나 쌀 2말의 값과 같았다. 태종은 저화의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도했다 ;

 

   (i)  관리들의 녹봉을 저화로 지급하고, (저화공급 촉진)

   (ii) 호조가 백성들의 면포를 매입하여 저화를 공급하며, (저화공급 촉진) 

   (iii) 저화를 대가로 국고미를 방출(=화매,和買)하고, (저화수요 창출)   

   (iv)  사재감이 보유하고 있는 어육을 저화를 받고 판매 (저화수요 창출) 

 

이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포화만 유통될 뿐 저화가 별로 유통되지 않자 강제로 거래의 반을 저화와 포화로 하도록 하는 법(저화통행법)을 발표하였고(태종 2년 4월 6일) 이어 서울은 석 달 뒤인 7월 15일, 지방은 8월 15일 부터 포화사용을 금지한다고 발표하였다(태종 2년 4월 19일). 이 법을 위반하면 전 재산을 몰수하고 관리의 직첩(자격증)을 회수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포화사용에 대한 엄벌방침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저화 대신 포화가 주로 통용되었으며 저화의 가치는 쌀 2말에서 쌀 1말로 떨어졌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포화를 저화와 함께 병용하도록 허락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태종 2년 9월 24일).이들이 포화통용을 건의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i)  백성들이 저화의 가치를 믿지 않는다.

 

   (ii) 저화 가치가 날마다 떨어지니 물가가 오른다.  

 

   (iii) 저화 가치가 날로 떨어져 저화 1장으로 쌀 1말을 살 수가 없다.

    

사간원은 “백성의 상식(민심)을 기초로 해야만 성인의 정치가 나온다(人情 聖人之田 治道之所由出)”라는 공자의 말을 들면서 민심(인정,人情)을 거슬리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당나라 육지(陸贄)의 말을 인용하면서 백성들의 정서를 돌 볼 것을 요청했다.

 

   “나라를 위하는 핵심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에 있고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의 핵심은 그 정서를 읽는 데에 있다.  

    (爲國之要 在乎得衆 得衆之要 在乎見情 : 태종 2년 9월 24일)” 

 

태종은 저화와 포화(오승포)의 동시 사용을 허용(태종 2년 9월 24일)하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실제로는 저화 사용의 포기와 다름없었다. 포화 사용을 허용하는 즉시 저화 사용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결국 사섬서를 폐지하고야 말았다(태종 3년 9월 10일).  

 

[ 2차 저화통용 : 태종 10년 7월 1일]

 

1차 저화 통용에 실패한 태종은 약 7년이 지난 태종 10년 의정부가 요청하는 형식을 빌려 다시 저화제도를 도입하였다(태종 10년 5월 15일). 중국 명나라가 이미 초법(鈔法)이라는 지폐제도를 도입하고 있는데 우리는 포화를 사용하고 있으니 불편하기도 하고 또 시대에 뒤떨어지기도 하다는 것이다. 하윤, 황희 등 여러 대신들과 의논한 끝에 저화제도를 다시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사섬고가 그 일을 맡아 관장하도록 했다(태종 10년 7월 1일).

 

저화 통용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세금을 저화로 납부하게 허용하고 상인과 각종 장인들에게는 새로 영업세를 도입하여 저화로 내도록 하였다. 서울과 개경에 두 곳의 화매소를 열어 국고가 보유하고 있는 물건을 수시로 내다 팔아(화매,和賣) 저화 가치를 조절함으로써 저화에 대한 믿음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이외에도 공신전이나 과전과 같은 토지 5결 당 저화 1장의 토지세를 새로 신설하였고 녹봉의 1/3도 저화로 지급하였으며 시장에서는 반드시 저화로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강요했다. 저화의 공급과잉으로 인한 가치하락을 막기 위하여 다양한 저화 환수 대책도 병행했는데 서울과 지방에서 포화나 기름, 꿀(유밀) 등을 매입하는 대가로 저화를 지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도한 저화 공급은 저화 가치 하락과 물가의 상승을 초래하였다. 1차 저화 출범초기(태종 2년)에 저화 1장은 쌀 2말이었는데 2차 저화 통용 초기(태종 10년)에는 쌀 1말로 가치가 떨어졌고 5년 뒤 태종 15년에는 저화 1장 가치가 쌀 2되에 불과하였다. 저화 가치가 계속 떨어지면서 저화에 대한 수요는 하락했고 저화를 통한 거래도 당연히 위축되었다. 그러자 다섯 집을 묶어 1 비(比)로 만들고 저화 대신 쌀 혹은 포로 거래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저화 통용은 그리 활성화되지 못하였고 또 위조 저화도 나타나자 태종은 동전으로 화폐개혁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지만 여건이 전혀 성숙되지 못하자 바로 취소하면서 이렇게 투덜거렸다.

 

   “나중에 명군이 나오면 (주화제도를) 시행하게 될 것이다.

    (後有明君出而行之 : 태종 15년 6월 21일)”

      


IV.2 저화제도의 문제점 : 저화 가치 하락과 물가상승

 

저화제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저화 가치의 하락과 저화 통용이 부진하다는 것이었다. 저화 가치가 떨어졌다는 것은 저화로 표시한 물품의 가격이 급격히 상승한 것을 말한다. 저화 가치가 하락하니 당연히 저화를 통한 거래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가치 하락은 저화를 기피하도록 하였고 저화거래 기피는 다시 저화 가치의 하락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면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법으로 강제를 해도 일반 백성들, 특히 서울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소액거래는 거의 저화가 아닌 미포(米布)로 거래되었다. 세종은 이런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경솔하게 접근할 수도 없었다. 즉위한 다음해 세종은 화폐제도에 관해 넌지시 물었다.

 

   “매년 공을 바치는 것에 저화가 편리한가, 어떤가. 

    (歲貢楮貨便否何如 : 세종 1년 4월 18일)”

 

저화 가치가 날로 떨어져 걱정이 되자 이조참판 허지는 임금께서 한번 더 저화사용을 독촉해 주시기를 부탁했다. 세종은 모든 국가의 물건은 반드시 저화로 매매할 것이며 오직 부득이 한 경우에만 쌀과 포(미포,米布)로 거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호조참판 안순에게도 명하였다. 

 

    “요즘 듣기에 상인들이 저화를 쓰지 않는다고 하여 내가 걱정이 된다.

     그 활성화 대책을 의정부와 육조가 의논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今聞 商賈不務用楮貨予爲慮焉 其所以興行之術 議于政府 六曹以聞 :     

     세종 2년 2월 25일)”

 

이 지시를 받고 호조는 다음 대책을 발표했다.(세종 2년 4월 7일) 

 

   (i) 저화의 사용 조건을 분명히 밝혀 엄격히 감독할 것이며,

 

   (ii) 경시서가 수시로 물가를 파악하여 호조에 보고하고,

 

   (iii) 시가에 따라 방출, 매매하여 저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시로 환수하고

       저화 가치가 높으면 수시로 방출하여(이시염산,以時斂散) 저화 가치     

       를 안정시켜야 한다.

    

저화를 사용하지 않으면 엄단한다는 영의정 지시에도 불구하고 저화 유통은 저조했다. 세종은 세 의정 대신을 불러 화폐제도 개혁을 다시 의논했다. 영의정 유정현은 저화, 좌의정 이원은 동전, 그리고 우의정 정탁은 포화를 지지했다. 의논일치를 보지 못했다(세종 4년 10월 16일). 이 때 세종은 화폐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의정 대신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본인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것 같다.

  

저화 1장에 쌀 1말 혹은 2말이라는 저화 가치는 일상생활에 사용되기에는 너무 크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다가 저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저화 1장이 쌀 1되가 되면서 고액이라는 불편은 어느 정도 사라졌다. 그런데도 저화의 통용은 부진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태환성의 부족이었다. 저화를 가지고 원하면 언제라도 국가가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어 주는 태환성에 대한 보장이 있었으면 저화에 대한 안정적 수요가 형성됨으로써 저화 통용과 물가 안정을 동시에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IV.3 주화제도가 어떨까.

 

저화 가치는 계속 하락했다. 저화 3장으로 겨우 쌀 1되를 살 수 있는 지경이었다. 모든 벌금이나 공공 요금이나 세금을 저화로 표시하고 납부했는데 저화 가치가 이렇게 떨어진다는 것은 국고의 심각한 수입 감소를 의미했다. 정부는 저화로 표시된 모든 세금이나 벌금을 3배로 인상했다(세종 5년 6월 21일). 세종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부왕 태종의 유지를 좇아 저화를 통용하자니 저화 가치가 날로 하락하므로 국고 수입이 계속 줄어들고 백성들은 저화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화폐제도를 바꾸자니 준비도 부족하지만 태종의 유지를 버리는 일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세종은 부왕이 시행을 시도하다가 ‘나중에 명군이 나면 행할 수 있다’는 한탄을 남기고 포기했던 주화(동전)제도가 문득 생각났다. 삼 의정 중에 좌의정 이원이 주화제도를 지지하고 있었다. 세종은 의정부와 육조를 모아 놓고 조용히 주화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대해 물었다(세종 5년 9월 16일). 

 

호조는 의정 대신과 육조가 의논한 내용을 다듬어 최종 정책안을 정리하여 임금께 보고하였다. 당나라 개원전을 모델로 사섬서가 동(구리)으로 된 조선통보를 발행하되 1냥의 무게를 10전으로 하자고 했다. 주화를 주조하는 주전소는 경상도와 전라도에 설치하되 경상도는 도가 넓으므로 좌도(울산진)과 우도(합포)에 하나씩 세우고 전라도는 도절제사 병영(이를 내상,內廂이라함)에 세우도록 했다(세종 6년 2월 16일). 주화를 주조하는 데 들어가는 구리를 확보하기 위한 특별 대책이 발표되었다(세종 6년 8월 5일). 모든 백성이 자기 신분에 따라 구리를 바쳐야 했고 구리가 포함되어있는 그릇이나 기물을 거두어 들였다. 동시에 전국의 구리 광산을 탐사 개발하도록 했다(세종 6년 9월 2일). 이런 준비를 거쳐 세종 7년 1월 17일 주화 1만 2537관이 주조되어 배포되었다. 그리고 구리 1근의 값은 동전 150문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실제 제조 과정에서 구리의 양이 너무 많이 들어가 구리 1근을 주화 130문으로 낮추기로 변경하였다.(세종 7년 2월 8일). 저화와 함께 주화의 공식적인 사용은 열흘 뒤인 세종 7년 2월 18일 시작되었다. 그리고 주화 1문은 쌀 1되 그리고 저화 1/2장으로 결정하였다.

 

[주화 활성화 정책 : 신뢰확보]

 

주화제도가 확실하게 정착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저화 유통을 금지하는 것이라고 세종은 생각했다. 주화와 저화의 병용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신하들 앞에서 주화와 저화를 함께 유통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말했다.

 

   “지난 번 주화 사용을 의논할 때 저화와 겸용하자는 법은 내 이미 그때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지만 주조가 덜 되어 반포 실시할 

    여건이 되기 전이라 저화를 쓰지 못하게 하면 백성들이 더욱 싫어 할

    것 같아 할 수 없이 같이 쓰도록 했던 것이다.      

    (前日議設錢幣之時 立兼用之法 予於其時灼知不可兼用也 然於未鑄錢頒行   

   之前 不用楮貨 則民益厭之 故姑立兼用之法 : 세종 7년 4월 14일)”

 

참찬 탁신에게 저화와 주화 병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세종이 물었다. 예전에는 먹고 쓰고 하는 데 포화가 전혀 불편함이 없었는데 이제 주화를 사용하면 국가가 강요할 것이 아니라 백성이 편하게 느끼는 대로 주화나 포화나 저화를 쓸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전날 백성들이 저화를 싫어했는데 이를 강제로 쓰게 하고 벌을 주니 백성들이 곤란을 겪는 폐단이 적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세종은 이를 인정했다.

 

   “경의 말이 옳다.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 신뢰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처음 저화를 화폐로 사용한다 하더니 이제는 주화를 사용한다고 하니

    언제 또 버릴 지 두려운 것이고 또 저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탄이

    왜 없겠는가. 주화를 공급함에 있어서 저화를 수거함이 가하겠으나 

    저화는 많고 주화는 부족할까 그것이 걱정이 되는 것이다.     

    (卿之言善矣 爲國之道 莫如示信 初以楮幣爲寶而用之 今專用錢而恐棄之    

    民之有楮幣者 豈無愁嘆 給錢於民間 以收楮貨可矣 然恐楮貨多而錢尙少也 

    : 세종 7년 4월 14일)”

 

호조참판 목진공이 주화 2만 7천관 중에서 3천관이 유통되었고 보관된 것이 2만 4천관이므로 저화를 주화로 바꾼다 하더라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세종은 즉시 관인을 찍어 사섬서가 발행한 저화가 얼마인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호조는 저화 1장에 주화 1문이면 되겠다고 보고했다. 서울을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주화업무를 주관하는 사섬서는 중부를 맡고 비교적 한가한 관청인 종부시가 동부, 의금부가 남부, 군자감이 서부, 통례문은 북부를 나누어 맡아 신속하게 저화를 주화로 교환하도록 하였다(세종 7년 4월 15일). 저화 사용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주화 1문의 적정 가치를  쌀 1되로 유지하기로 하였다. 적정 화폐가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국고미를 방출하여 주화를 회수하고 특별히 주화 가치가 떨어지면 별도로 쌀과 보리를 풀어 주화를 환수하였다. 이와 함께 벌금도 구리나 주화로 납부케 하였으며(세종 7년 4월 17일) 일반 소액거래에도 물물교환을 금지하고 반드시 주화를 사용하도록 의무화하였다(세종 7년 6월 17일). 노비들의 세금(歲貢)도 주화로 내게 하였으며 상인이나 장인들도 주화를 사용하지 않으면 중범은 처형하여 거리에 널리 보도록 하고 경범이라도 장 1백대에 가산을 몰수한 다음 수군에 보충토록 하였다(세종 7년 2월 8일). 

 

 

IV.4 주화정책의 한계

 

[주화 기피 현상과 물가상승]

 

주화제도가 출범했으나 백성들은 주화 사용을 기피하였다. 주화 사용을 기피하면서 물건 가격이 급등했다. 주화제도가 출범할 때 주화 1문의 가치는 쌀 1되였고 무명 1필은 주화 200문이었다. 그러나 주화가 통용되고 얼마 되지 않아 실제 거래 가격은 주화 3문이 쌀 1되, 무명 1필의 가격은 주화 300문 혹은 400문까지 치솟았다. 주화 가치가 1/3로 떨어진 것이다. 세종은 걱정이 되었다.

 

   “동전 사용을 백성들이 즐겨하지 않으니 천해져서 육칠승포 한 필이

    동전 6,700 문이나 하는데 이것은 다름 아니라 법을 너무 자주 바꿔 

    그런 것이다. (銅錢民不樂用 故賤 六七升綿布一匹直錢六七百文 此無他 

    數更其法之弊也 : 세종 7년 7월 18일)”

 

호조참판 목진공은 세종의 말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여러 신하들이 걸핏하면 주화제도를 포기하거나 법을 변경하기를 요청함으로써 백성들이 의심하게 만든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주화 가치의 하락과 주화 사용 기피의 핵심 원인은 주화의 과다공급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종의 생각은 달랐다.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관에서 나간 주화가 겨우 수천 관인데 이를

    어찌 많다고 하겠는가. 백성들이 즐겨 쓰기를 바라면서 주화 공급을

    귀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卿言是矣 然官出錢數千貫 豈其多    

   哉 欲民之樂用 而使錢文貴 則不可也 : 세종 7년 7월 18일)”

 

아마 대규모로 저화를 주화로 교환하는 조치가 주화의 가치를 급격하게 떨어뜨린 것 같았다. 호조는 즉시 저화와 주화 교환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여 승인을 얻었다. 세종은 주화 1문의 가치를 쌀 1되나 혹은 1/200 면포 등으로 법으로 정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직감했다. 농사가 잘되면 쌀값이 떨어지고 또 쌀이 귀해지면 쌀값이 올라가는 게 정상인데 쌀 1되 값을 주화 1개로 획일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은 주화의 통용을 장차 저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에 너희 호조에서 주화 1문의 가치를 쌀 1되로 정하고 그 외 가격은

    추이를 보면서 가감하여 정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물가는 수시로 각기     

    다르게 변하기 때문에 한가지로 딱 가격을 정하는 것이 실로 옳지        

   못하다. 미포잡물의 주화가격은 그때그때 시세에 따르도록 하라.   

    (前者爾曹以錢一文準米一升 其他物價 推移加減買賣 己受敎旨 然物價隋    

    時貴賤各異 而一槪定價 實爲未便 其錢價米布雜物  一從民間時直

    : 세종 7년 6월 16일)”   

 

예를 들어 포 1필 시세가 주화 300문인데 법정가격을 200문이라 하면 포를 사려고 하는 사람은 법정가격을 들어 200문을 지불하려고 할 것이나 파는 사람은 그 값으로는 팔지 않을 것이므로 주화를 매개로하는 거래가 일어나지 않아 결국 주화의 통용이 사라지고 말 것임을 세종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민간거래에서는 주화의 사용을 꺼렸다. 소액거래에도 반드시 주화거래를 사용해야 했으며 이를 위반하는 사람은 엄중한 벌을 받거나 수군에 편입되었으며 심지어 어떤 이는 목을 매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세종은 조금 물러섰다. 소액거래에는 미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주화를 처음 주조할 때 이미 백성들이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국가에 중대한 일이라서 비록 가뭄을 만났어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9월 1일 부터 말되(두승,斗升) 이하의 거래도 반드시 주화를 사용하도록 

    했으니 나는 이 법이 애당초 불가하다고 생각했으나 대신들의 의논을     

    따라 따르기로 했으나 다시 깊이 생각해보니 시행하지 못할 형편이다.     

   (錢幣自初鑄時 己聞百姓怨咨 然國家重事 故雖當旱月 亦不得止焉 

    自九月初一日 一禁斗升以下買賣之令 予初以爲不可 然以大臣所議

    姑從之 今更商量 勢不可行 : 세종 7년 8월 26일)”  

       

[이어지는 재난과 세종의 흔들림]

 

세종 8년(1426)에는 화재가 많이 발생했다. 1월 27일 순천에 큰 화재가 발생했고 2월 14일에는 황해도 용천의 국고가 소실되었다. 한성에는 여러 차례 방화로 보이는 화재 사고가 발생했는데 2월 15일에는 큰 불로 중부의 인가 1630호와 남부 가옥 350호 ,그리고 동부의 190호가 불에 탔다. 강원도 지역에 강무로 나가 있던 세종은 급히 환궁하며 말했다.

 

   “이번 강무는 원래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경들이 행하기를 간청하므로

    온 것이다. 또 어제 길 위에서 악풍이 크게 불고 기후도 안 좋아 돌아

    가려고 했는데 경들이 또 청하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번 강무행차는

    천심에 합치되지 않아서 재변이 저렇게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고 깊이

    후회한다. 내일 환궁할 것이니 몰이꾼들을 다 돌려보내라. (此行予本不    

    欲 卿等固請予行 又於昨日路上 惡風大吹 氣候不平  予欲還宮 卿等又請      

    之 用是不還 予謂此行不合天心 災變如此 予甚悔之 明日還宮 其放驅軍 

    : 세종 8년 2월 16일) ” 

 

궁으로 돌아오자 세종은 곧 의정 대신을 불러 재변을 막을 방책을 물었다. 사실 계속 발생하는 재난은 무엇인가 인간들이 잘못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세종은 굳게 믿었다.

 

   “옛 일을 생각해보면 하늘의 재앙이 있고 인간의 재앙이 있다.

    대저 인간의 일을 아래에서 저지르면 하늘이 이에 응하는 것이 

    항상 있는 이치이다.  (稽之於古 有天災者 有人災者 大抵人事感應於下 

    則天變應於上 理之常也 : 세종 8년 2월 26일)” 

 

무슨 인사가 잘못되었는지 지적해 보라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 중에 좌의정 이원이 화폐제도를 언급하고 나섰다. 이원은 화재가 발생하여 온갖 생활가재가 다 불타버렸으니 일시적으로나마 주화 대신 여러 잡물을 서로 교환하도록 허용하자고 했다. 이조참판 성억은 주화와 잡물을 병행하여 사용하는 것은 안 된다고 했다. 방화를 했다면 주화사용법을 어겨 가산을 몰수당한 사람이 억울해서 불을 지른 것이므로 법을 조금 완화하여 법을 어기고 매매한 금액의 3배를 주화로 추징하자고 했다. 세종은 적당히 처리하라고 했다.

 

   “추후 적절히 알아서 시행하도록 하라.

    (隨後量宜施行 : 세종 8년 2월 26일)”

 

대제학 변계량은 우회적으로 돌려서 주화 사용을 비판했다. 법을 세우는 것은 백성을 결속시켜 영원히 정치를 잘 해보자고 하는 것인데 백성이 새 법을 원망하고 마음이 화합하지 못하면 하늘의 기운을 상하게 하여 괴변이 그칠 줄 모른다고 지적했다. “안팎으로 불가하다는 법을 가지고 성공한 예가 없다(未有中外人情交謂不可 而能有成者)”는 정자(程子)의 말도 인용하였다. 가뭄과 화재로 대단히 어려운 백성들의 형편을 생각한다면 오로지 주화만 가지고 생활필수품을 사도록 하는 법은 어기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주화통용법을 어겼다고 가산을 모두 빼앗은 위에 또 벌금을 물리면 원성이 없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화 강제 사용만 철폐하면 모든 재앙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확언했다. 세종은 변계량의 뜻을 높이 샀다. 그러나 법은 그렇게 쉽게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대 말의 뜻은 아름답다. 그러나 법이란 백성들에게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어찌 백성들의 좋고 싫음에 따라 가볍게 고칠 수         

    있겠는가. 주화는 관청에서만 사용될 뿐 민간에서는 쓰이지 않으니

    이것이 백성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觀其辭旨 意則美矣 然    

   立法 所以示信於民也 豈可以民之好惡 而更改乎 錢幣之法獨行於官府 以   

   不行於民間 則非所以示信於民也 : 세종 8년 2월 26일)”

 

주화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주화를 사용하는 한 잡물과 주화 중 선택하여 사용하는 것에 대해 세종은 반대의사가 분명했다. 다만 일정한 범위내의 소규모 거래에는 동전 대신 물품을 사용하는 것은 허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세종의 확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주화 사용은 지지부진했다. 주화라는 것이 새로울 것도 없는 법인데 통용의 부진함에 세종은 매우 당황했다.  

 

   “주화법이 새로운 법도 아니라 옛날부터 통용되던 것이고 게다가 백성이

    쓰기에 편하게 하려고 하는 것인데 다들 싫어하는구나. 

    (錢幣非新法 自古通行 乃爲便民之用也 今民皆厭之:세종 8년 2월 28일)”

 

주화를 사용하지 않고 거래를 하면 가산을 몰수하는 것은 가혹한 형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화가 사용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사용하지 않는 것이 어떨까라고 세종은 생각했다.

 

   “만약 주화가 활용되지 못한다면 주화사용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若錢幣不興用 則不若不用之爲愈也 : 세종 8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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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4월21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3년04월19일 11시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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