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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5: 3대 인재가 이어진 후진(後秦)을 망가뜨린 요홍(姚泓)<C>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6월04일 16시40분
  • 최종수정 2021년06월19일 22시1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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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3) 요익중의 석호 질타(AD334)

 

허수아비 황제 석홍은 황제의 인새(도장)와 인수(끈)를 싸서 직접 석호가 있는 위국의 궁으로 와서 황제 자리를 선양하겠다고 말했다. 석호가 말했다.

 

“제왕의 대업은 천하 사람들이 논의해서 결정할 일이지

 어찌 이렇게 스스로 판단을 내린단 말이오?“

석홍이 눈물을 흘리며 궁궐로 돌아와 모후 정태후에게 말했다.

 

“ 먼저 돌아가신 황제의 씨는 정말로 다시 남겨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석호가 왕으로 있는 위국의 상서가 당우(요임금과 순임금)의 선양 절차에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석호가 말했다.

 

“ 석홍이 아둔하고 무능하여

  상중인데도 예의를 차리지 못하였으니

  폐위시키는 것은 마땅하겠지만 양위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11월 곽은을 파견하여 석홍을 폐위시켰다. 석홍이 담담하게 말했다.

 

“ 용렬하고 아둔하여

  대통을 능력 있게 이어받지 못했으니

  어찌 다른 말이 필요하겠는가?“

 

주변의 신하들이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석호는 곧바로 석홍은 물론 그 생모 정태후와 석륵의 다른 아들 진왕 석굉, 남양왕 석회를 모두 죽였다. 이 때 석홍의 나이는 20세였다. 그리고 황제 자리에 오르라는 권고를 거부하고 그냥 ‘거섭조천왕‘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번역하면 그저 조 나라의 정치를 섭정하는 천왕이라는 의미다. 

 

요익중은 병을 핑계로 축하하는 자리에 오지 않았다. 석륵과의 친분을 봐도 석호의 행동이 옳지 않았고 또 인륜으로 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번이나 거부했지만 그래도 계속 소환하자 요익중이 마침내 와서 이렇게 석호를 꾸짖었다.

 

“ 저 요익중은 항상 대왕을 일세의 영웅이라고 생각했는데 

  석홍에게 어깨를 도닥거리며 부탁을 받을 것이지 어찌 찬탈을 한단 말입니까?“ 

 

요익중은 AD280생으로 석륵(AD274년생)의 친구이기도 하려니와 석호보다 나이가 열다섯 살 많았으니 꾸짖을 민 했다. 석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 나라고 어떻게 이런 짓을 좋아하겠소,

  석홍이 나이도 어리고 집안일을 제대로 처리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내가 대신 하려고 한 것일 뿐이오.“

 

속으로는 불편했지만 강단있는 발언과 또 그동안의 충실함과 성실함을 생각하여 요익중에게 죄를 내리지는 않았다. 

 


(14) 요익중이 선봉이 되어 단요 공격(AD338)

 

당시 북경의 동쪽 및 요서지역에는 단요가 주도하는 선비족 계통의 단씨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 동쪽에는 후조에 복속하는 모용외와 그 아들 모용황이 웅거하고 있었다. 원래 서진 조정에서 단씨 족장인 단질육권과 그 아들 단아가 이어서 요서공에 임명되었고 모용외는 요동공에 임명되었으므로 서로 사이가 좋은 동지였다. 그러나 단아는 모용외의 권고를 듣고 도읍을 영지(하북성 천안현)에서 서쪽 북경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주민들의 큰 반발을 샀다(AD325). 주민의 반발을 등에 업고 요서공 단질육권의 손자였던 단료가 쿠테타를 일으켜 삼촌 단아를 몰아내고 요서공 자리를 차지했다.

 

단료는 동쪽에 있는 요서공 모용황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을 뿐더러 동쪽에 있는 석호의 후조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연히 조왕 석호와 요서공 모용황은 서로 연대하여 단료를 칠 계획을 세웠다. 단료가 먼저 단굴운을 보내 유주(북경)을 공격하고 들어오자 석호는 요익중에게 보기병 7만을 주어 남쪽으로부터 단요를 침략하는 선봉장이 되게 하였다. 이 때를 틈타 모용황은 군사를 이끌고 단료의 동쪽 국경을 쳐들어왔다. 연(요동)에서 이복형 모용황의 질투를 받고 단료에게로 도망쳐 온 모용한은 석호가 남쪽에서 쳐들어오고 있으므로 어떻게해서든 모용황과 힘을 합치는 것이 우선이라고 권고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단요의 군대는 모용황 군대를 쫓아 추격하다가 전멸하였다.      

 

요익중이 선봉에 선 석호의 대군은 물밀 듯이 북진하여 순식간에 요서의 도읍지 영지(하북성 천안)으로 들이닥쳤다. 단료는 명마 한 필과 함께 아들 단걸특진을 석호에게 보내 항복을 표하고 도망쳐버렸다. 석호는 이 전쟁에서 모용황이 엽합작전을 펼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챙긴 것에 격분하여 모용황을 공격했으나 강력한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실패했다. 

 

  

(15) 석호의 요익중 신임(AD345)  

 

조왕 석호는 요익중을 매우 중히 여겨 사지절, 십군육이대독 및 관군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요익중은 깨끗하고 검소했으며 굳고 또 곧아서 누구 앞이든 두려워함이 없었다. 이런 요익중을 석호는 매우 신뢰하여 모든 의사 결정에 참여시켰는데 석호는 항상 그의 생각을 만족시켰으므로 매사 그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였다. 후조 조정의 군신들도 그런 요익중의 판단을 높이 샀으므로 매우 존경해 따랐다.

 

석호의 애첩의 동생이 요익중의 부하로 있었는데 그가 누이의 권세를 믿고 군중에서 소란을 피웠다. 요익중이 그를 잡아들이고는 이렇게 꾸짖었다.

 

“ 너는 금위라는 중책에 있으면서

  힘없는 백성을 괴롭혔는데

  나는 대신이 되어 그 사실을 똑바로 보았으니

  그대로 지나갈 수가 없다!“

 

즉시 목을 내려치라고 명령했다. 소란을 피웠던 금위가 피가 흥건히 고일 정도로 머리를 땅에 치며 조아리고 주위 사람들이 말리자 그제야 요익중은 그 사람을 놓아 주었다.   

 

 

(16) 요익중의 석호 질책(AD349)

 

조왕 석호는 AD 349년 황제로 등극했다. 섭조천왕이 된지 12년 만의 일이다. 동궁의 휘하에 있다가 량주(감숙성)로 귀양가던 10만여 병사들은 모두 무력과 체격이 뛰어난 장사들이었는데 감숙성으로 가던 도중 책임인솔자 양독의 지휘아래 반란을 일으켜 가던 길을 돌아왔다. 그들의 실력이 너무나 뛰어나서 갑옷과 무기가 없이도 한 명이 열 명 이상을 감당하였다. 양독은 스스로를 진의 정동대장군이라 칭하면서 장안으로 진격해왔다. 장안을 지키던 낙평왕 석포가 모든 정예병을 가지고 막았으나 한 번 만에 격파되었다. 양독의 군사는 동쪽으로 나아가 동관을 함락하고 낙양으로 들어갔다. 석호가 이농을 대도독으로 삼아 10만 기병으로 토벌하게 했으나 이농 또한 신안에서 크게 패하여 막아내지 못하고 성고로 퇴각했다.

양독은 더욱 동쪽으로 나아가 형양, 진류의 여러 군을 노략질했다. 석호는 무공이 뛰어난 아들 연왕 석빈에게 전권을 주고 관군대장군 요익중과 거기장군 포홍과 함께 방어토록 했다.

 

요익중은 자신의 휘하 8천 기병을 이끌고 업에 도착하여 알현을 요청했다. 석호는 병중 이었으므로 직접 나오지 않고 음식만 하사했다. 화가 난 요익중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 주상이 나를 불러서 도적을 처치하라고 불렀으니

  마땅히 만나 보고서 방략을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나보고 밥만 먹고 가라는 것인데 내가 어떻게 밥을 먹으러 왔단 말입니까?

  또 내가 직접 주상을 보지 못하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안 단 말입니까?“

 

석호가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접견했다. 요익중은 석호를 크게 나무랐다.

 

“ 어린애(가장 아끼던 아들 석도)가 죽어서 근심하는가?

  병 때문에 근심인가?

  자식이 어렸을 때 좋은 스승을 붙여 가르치지 않아서 반역에 이르기까지 했고

  또 그런 아들(석도를 죽인 석선)을 죽였으면 또한 어찌 근심하는가?

  너는 오랫동안 병이 들었는데

  세워 놓은 사람이 어린아이이니 네가 쾌유되지 않으면

  세상은 반드시 혼란에 빠질 것 아닌가. 그것을 먼저 걱정해야지 

  어떻게 도적 떼 들을 걱정한단 말이냐.

  양독이란 놈은 궁색하고 고단하여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저러는 것이니

  잔폭한 짓을 하고 어디까지 갈 수 있겠는가.

  이 늙은 강족 요익중이 너를 위하여 한 번에 처리하고 올 것이다.“

 

요익중은 강직하고 사나워서 누구한테든 너라고 불렀으므로 석호도 그런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사지절과 정서대장군 직책을 내렸고 갑옷과 말을 하사했다. 요익중은 인사도 하지 않고 말을 달려 나갔다. 석빈과 힘을 합해 양독을 형양에서 격파하고 머리를 벤 다음 나머지 무리들을 모두 처단했다. 석호는 요익중에게 서평군공과 함께 칼을 차고 전작에 오를 수 있도록 허락하고 포홍에게는 거기대장군 약양군 및 옹주자사를 내렸다. 

  

 

(17) 석호의 와병과 궁중 혼란(AD349)

 

AD349년 4월 석호의 병이 심해졌다. 석호는 팽성왕 석준에게 대장군 직을 주어서 관중의 오른쪽을 방어하게 하고 연왕 석빈을 승상으로 삼아서 상서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그리고 장시는 진위대장군 및 영군장군 이부상서로 삼아서 석빈과 함께 정사를 나누어 보도록 했다. 태자의 어머니 유후는 석빈의 정치보좌를 싫어하여 장시를 꾀어서 석빈을 도모하게 하였다. 장시는 사냥으로 양국에 가있던 석빈에게 거짓 편지를 보냈다.

 

“ 주상의 병이 이미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사냥을 좀 더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석빈은 정말로 그런 줄 알고 사냥과 음주를 계속했다. 유황후와 장시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조서를 고쳐서 불충하고 불효한 석빈을 관직에서 몰아내고 귀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는 장시 동생 장의에게 무사 500명으로 석빈의 집을 지키게 하였다.(AD349년4월9일)

 

4월 19일 석준은 유주에서 업성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뵐 수가 없었고 다시 금병 3만 명을 배속 받고 임지(관중의 오른 쪽)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의식을 잠깐 되찾은 석호가 석준의 도착을 물었는데 이미 떠난 지 한참 뒤였다. 석호를 호위하는 군사들은 연왕 석빈에게 근위병사의 책임을 맡게 하고 동시에 황태자로 삼을 것을 간청했으나 유황후와 장시가 가로막았다. 석호의 눈이 가물가물해지자 인새를 직접 연왕 석빈에게 주려고 했지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석호의 마음이 석빈에게 있음을 알아챈 유황후와 장시는 다시 조서를 고쳐서 석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시를 태보⦁도독중외제군사로 삼았다. 최고의 군권을 장시가 쥔 것이다. 시중 서통은 절망에 빠져 음독자살했다.(4월22일) 그 다음날 석호가 55세의 나이로 죽었다. 열 살 태자 석세가 즉위하고 유씨가 황태후가 되어 황제를 대행했다. 장시는 태위 장거와 사공 이농을 죽이려고 모의했는데 장거가 사이가 좋았던 이농에게 미리 그 사실을 알려줬다. 이농은 즉시 식솔을 데리고 도망갔다.

 

 

(18) 석준의 무혈 쿠테타 집권(AD349)

 

팽성왕 석준이 하내에 이르렀을 즈음 아버지가 죽은 소식을 들었다. 요익중과 포홍과 석민이 양독을 정벌하고 돌아오다가 이성(하남성 온현)에서 석준을 만났다. 이들 노장들은 석준이 장자이고 또 무공이 혁혁한데다가 석호가 장차 후사로 생각했었으나 말년에 정신이 혼미해 지고 현혹되어 장시와 유후에게 휘둘렸다고 말하면서 장시를 토벌하는 것이야말로 쉽고도 바른 길이라고 설득했다. 석준도 동의했다. 군사를 돌이켜 이성을 출발해서 업성으로 들어가니 주변의 낙주자사 석준과 유국도 합류했다. 석준의 군사들은 탕음(하남성 탕음현)에 진을 쳤는데 융졸이 9만이었고 석민이 선봉에 섰다. 주변 성읍의 주민들은 물론 업성의 주민들도 모두 다 석준에게 부응하여 왔다. 간사한 우복야 장리마저 마지막에는 장시에게 등을 돌리고 성문을 열어 석준의 군사를 영입했다. 다급한 유황후와 장시는 석준에게 있는 직책을 총동원하여 환심을 사려 했다. 승상, 영대사마, 대도독중외제군사 녹상서사가 석준에게 내려진 직책이었고 덧붙여 황월과 구석(황제만 가질 수 있는 물건 아홉 가지) 내렸다.  

  

14일 석준이 업 부근에 도착하자 장시가 몸소 나아가 영접했는데 석준이 그를 잡아 가두었다가 다음날 평락시장에서 목을 베었고 삼족을 멸했다. 유씨(유태후)의 명령을 빌어서 석준이 황위를 이어받도록 했다.(AD349년 4월 16일) 석세는 폐위하여 초왕으로 책봉하고 유씨도 태비로 책봉한 다음 얼마 후 모두 죽였다. 옛 연왕 석빈의 아들 석연을 태자로 삼았으며 석감을 시중 및 태부, 낙평공 석포를 대사마에 임명했다. 일등공신 선봉장 석민에게는 도독내외군사 및 보국대장군이라는 최고의 군사직을 수여했다.  

 

 

(19) 석감의 쿠테타(AD349)

 

지난 4월 석세의 조정을 무너뜨릴 때 석준은 석민에게 황태자 자리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정작 쿠테타가 성공하자 자신의 아들 석연에게 황태자 자리를 주었다. 군권을 쥐고 정치를 좌지우지 하려던 석민은 석준에게 불만을 가졌지만 드러내지 않고 휘하 장수들에게 많은 상훈을 내려서 환심을 샀다. 석민의 생각을 알고 있는 석준은 석민이 내린 상훈을 대부분 거절하거나 깎아내려 버렸다. 장수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중서령 맹준과 좌위장군 왕난은 석민의 병권을 서둘러 빼앗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석준에게졸랐다. 석준은 석시 종친 대신 석감과 석포와 석소 등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 이들의 생각은 한 결 같이 석씨 성이 아닌 석민을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태후는 반대했다. 

 

“ 극노(석민의 어릴 적 이름)가 없었으면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소.

  조금 교만하고 방종하다고 어찌 이리 급히도 죽일 수가 있겠소?“ 

 

석감이 몰래 빠져나와 환관 양환을 보내 석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석민은 이농과 왕기 겁박하여 석준 폐위를 모의한 다음 장군 소언과 주성에게 갑옷을 입혀 3천 군사로 남대에서 석준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석준은 태연히 부인과 바둑을 두다가 주성에게 물었다.

 

“ 주모자가 누구냐?”

 

주성이 말했다.

 

“ 의양왕 석감이 당연히 즉위 해야겠지요.”

 

석준이 말했다.

 

“내가 오늘같이 며칠 만에 물러나야 하는데

 석감은 며칠이나 가겠느냐?“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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