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나무 사랑 꽃 이야기(54) 느릅나무: 제 위치를 찾지 못하는 나무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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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나무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뒤에 설명하겠지만 공원이나 산책로 등에서 이 이름표를 단 나무는 느릅나무가 아닙니다. 나무를 제법 사랑하여 가는 곳마다 나무 사진을 찍어대는 필자도 느릅나무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의외로 서양에서는 느릅나무가 제법 대접을 받습니다. 필자가 느릅나무를 제법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나무라고 여겨버린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공연되는 유진 오닐 원작 ‘느릅나무 아래 욕망’이라는 연극의 제목이 워낙 인상 깊게 남아서였습니다. 느릅나무 영어 이름은 Elm인데 이 나무는 공원이나 사람들이 피크닉을 다닐 만한 산책길 등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나무라고 여겨지고 있을 정도이지요. 필자가 즐겨 읽는 나무백과를 쓴 임경빈 선생에 의하면 특히 스웨덴, 러시아, 네덜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의 공원에 이 나무가 많이 심겨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느릅나무의 역할을 느티나무가 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은 느티나무도 소속은 느릅나무과이니, 우리나라에서는 이 멋지게 정돈된 친척 나무에게 느릅나무가 자리를 빼앗겨 버린 셈입니다. 우리나라 느릅나무도 나이가 들면 느티나무 못지않게 우람하게 자라서 아래서 아이들이 뛰놀 수 있을 정도로 커지지만, 어딘지 조금 균형을 잡지 못한 것 같은 모습을 가지기가 일쑤고 가지를 옆으로 벋는 경향이 덜해서 동구밖 정자목으로서도 합격점을 주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는 이 나무에 대한 인식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常平通寶(상평통보)라는 한자 이름이 아직도 뚜렷이 기억되고 있는 옛날 엽전이 처음 나왔을 때 이 엽전을 楡錢(유전) 또는 楡莢錢(유협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낯선 한자 楡자는 느릅나무를 가리키는데, 이 나무가 맺는 열매의 모양을 자세히 보면 종자를 한가운데 두고 동그랗게 얇은 날개같은 조직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 모습이 이 엽전의 모습과 닮았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전설 같이 전해오는 ‘평강공주와 온달’ 이야기에서도 느릅나무가 등장합니다. 온달에 대한 얘기만 듣고 그리로 시집가겠다고 고집하다가 궁중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평강공주가 처음 온달의 집을 찾았을 때, 온달의 모친이 ‘온달은 느릅나무 껍질을 채취하러 갔다.’고 하면서 ‘우리 온달은 댁같은 귀한 사람과 안 어울린다.’고 대꾸했다고 할 때 등장한 것이지요. 당시에는 느릅나무 껍질이 솔잎과 함께 구황식품으로 지정되어 백성들에게 흉년을 대비해서 저장해 두기를 권장했다고 실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실은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물을 부어 짓누르면 '느름해진다.'고 표현할 정도로 물러져서 먹을 수 있게 된다고 하는데, 거기서 느릅나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런 효용도 없어졌으니 그런 의미에서의 느릅나무 가치도 사라져 버린 것이지요.
요즈음 느릅나무 종류 나무들은 그 엽전을 닮은 열매들을 수없이 날리고 있습니다. 근처를 하얗게 뒤덮을 정도이지요.
실은 우리가 흔히 만나는 이 느릅나무 종류 열매들은 느릅나무 한 종류인 비술나무 열매일 확률이 높습니다. 필자가 지난 목요일 서강대 강의를 나가는 길에 잠시 들른 경복궁 옆 국립현대미술관 앞에 자라는 150년 넘은 세 그루의 비술나무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작년 이맘때, 그리고 지난 4월 23일에도 들렀던 서울시립대 교정에도 이들 보호수 못지않은 비술나무가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 아래에 떨어진 열매들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필자의 선호 산책로인 남산공원의 안중근 기념관 근처에도, 분당을 흐르는 탄천 변에도 비술나무들이 제법 크게 자라고 있지요. 실은 이 모든 나무들을 (경복궁 옆에는 이름이 쓰여 있으니 제외하고) 필자는 느릅나무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이유 때문에도 느릅나무가 우리나라에서 제 자리를 못잡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촌격인 비술나무가 고목으로서 곳곳에서 대접을 받으면서 느릅나무 역할을 하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느릅나무와 비술나무는 참으로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거의 비슷한 모양이고 위에서 언급한 엽전 모양 열매도 공통적으로 생산하니까요.
두 나무를 구분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등걸의 갈라지는 모양에 있습니다. 느릅나무의 등걸이 아래 위로 곧게 갈라지는 특성을 보이는 데 비해, 비술나무는 아까시나무처럼 꽈배기를 틀면서 갈라진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나이가 들면 그 꽈배기가 풀리면서 거의 비슷해진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남산공원의 비술나무를 필자가 한동안 느릅나무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최근에 깨달은 점은 새로 벋은 가지들이 느릅나무는 연한 갈색을 띠고, 비술나무는 연한 녹색을 띤다는 사실인데, 이 두 번째 차이 덕분에 필자의 잘못을 정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릅나무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너무나 많은 곳에서 느릅나무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완전히 다른 나무인 참느릅나무인 것 같습니다. 이 참느릅나무도 느릅나무, 비술나무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니 혼동을 일으킬 만합니다. 나무 크기에 비해 참으로 작은 크기로 달리는 잎 모양이 좌우 비대칭이고, 엽전 모양 열매를 다는 것도 공통이니까요.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피면 참느릅나무는 느릅나무와 비술나무 두 나무와는 참으로 뚜렷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두 나무의 등걸이 아래 위로 (곧게 혹은 꽈배기를 틀며) 갈라지는 데 비해, 참느릅나무 등걸은 조각조각 떨어져 나오는 특징을 가져서 약간 지저분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 등걸의 특징보다 더 뚜렷한 결정적인 차이는 느릅, 비술 두 나무가 위에서 설명했듯이 봄에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데 비해 (잎 달기, 열매 맺기 등), 참느릅나무는 완전히 가을을 선호하는 나무입니다. 지난 4월 23일 오후에 들른 서울숲의 참느릅나무들의 대부분이 아직 잎 내밀기를 하지 않은 모습인 것을 보면 일반 사람들은 이 나무들이 혹시 죽은 것 아닌지 하는 생각을 가질 정도이지요.
참느릅나무의 엽전 모양 열매들은 작년 가을에 많은 사진을 찍어 두었습니다. 부연한다면 참느릅나무 열매들은 가지에 달라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 경향을 보여서 겨우내 붙어 있는 경향을 보이는데, 자칫 이른 봄에 온 몸에 하얀 꽃을 피운 나무로 오해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요즈음 잎을 내밀기 시작한 나무에도 작년 가을 열매가 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느릅나무와 혼동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느릅나무의 이름을 도용하다시피 하고 있는 참느릅나무가 곳곳에 심어지고 또한 그 자손들이 빠르게 퍼지고 있는 점 역시 느릅나무의 입지를 더욱 좁히는 요인이 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고 봄/가을의 계절 차이가 뚜렷한 특성을 보이는 두 나무의 이름을 틀리게 쓰고 있는 공원들도 문제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름표를 붙이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정도이지요. 더욱이 접두어 ‘참’자가 붙어 있는 나무가 보통 느릅나무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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