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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8 : 꺼져가는 등불, 모용덕의 남연(南燕) <B>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3월20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7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1) 모용준의 와병과 후계논의(AD359)

 

AD359년 겨울 모용준이 병으로 눕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만 40세였다. 바로 밑 동생 대사마 태원왕 모용각에게 말했다. 

 

“ 내 병은 반드시 낫지 못하는 병이다.

  지금 두 방면(동진과 전진)이 평정되지 못했는데

  경무(모용위, 아홉 살)는 아직 어리기만 하구나.

  국가의 어려움이 많은 데 

  송나라 선공(동생 목공에게 양위)처럼 

  너에게 양위하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떤가?“

모용각이 펄쩍 뛰면서 말했다.

 

“ 태자가 비록 어리기는 하나 

  해로움을 이기고 치세를 이룰 군주이십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끼어들겠습니까?“

 

모용준이 화를 내며 말했다.

 

“ 어떻게 형제 사이에 이런 속에도 없는 겉치레 말을 한단 말이냐.”

 

모용각이 말했다.

 

“ 신이 천하를 짊어질 자격이 있다면

  어찌 어린 조카 군주를 보필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모용준이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말했다.

 

“ 너는 능히 주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니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느냐.

  이적은 청렴하고 방정하며 충성스럽고 밝은 사람이니

  네가 그를 잘 대우해 주어라.“

 

그리고는 서둘러 요동에 가있던 셋째 동생 모용수를 업으로 불러 들였다.(AD359년 12월)  

 

(12) 모용준의 사망과 모용각의 리더십(AD360)

 

AD360년 정월 20일 업에 모용준은 동진을 치기 위한 대군을 징집하여 대열병식을 올렸다. 대사마 모용각과 양무가 전군을 지휘하여 동진을 침입하려던 차에 갑작스럽게 모용준 병이  위독해졌다. 모용준은 서둘러 모용각, 양부, 모용평, 모여근을 불러들여 유조를 내렸다. 모용준은 그 다음날 죽었다. 모용위가 만 10세의 나이로 전연 2대 황제에 즉위했다. 2월에 모용준의 처 가족혼씨를 황태후로 올리고 태원왕 모용각은 태재가 되어 조정 정치를 도맡았으며 상용왕 모용평(모용준의 숙부)을 태부, 양무는 태보, 그리고 모여근이 태사가 되어 조정 정치에 참여하였다. 모여근은 나이가 많아서 모용황 시절부터 공이 컸고 또 강직하고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자신이 보기에 모용위도 그렇지만 황실의 모용각이나 다른 모용씨들을 존대하는 마음이 엷었다. 그런 모여근이 모용각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 주상이 어리고 모후가 정치에 간여하니 

  전하께서 당연히 변고를 사전에 막아 스스로를 보전하셔야 합니다.  

  지금 나라를 세운 공은 오로지 전하의 몫인데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 것은 우린 민족 대대로의 전통입니다.

  산릉의 장례작업이 끝나는 대로 

  주상을 폐위시키고 왕으로 강등시킨 후

  전하께서 높은 자리를 밟으시면

  위대한 전연의 무궁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용각이 깜짝 놀라 모여근에게 말했다.

 

“ 공께서는 취하셨습니까?

  어찌 말씀하시는 것이 이렇게 패역합니까.

  나와 공이 함께 들어가서 황제의 유조를 받은 지가 언젠데

  이렇게 갑자기 이런 의논을 일으킨단 말입니까?“

 

모여근이 얼굴을 붉히며 사과하고 물러났다. 모용각이 동생 모용수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모용수는 즉각 모여근을 죽여야 한다고 권하였다. 모용각이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 지금은 새로 대상을 당했네.

  지금 두 나라(동진과 전진)가 틈새를 엿보고 있는 터에 

  재보들이 서로 죽이면 먼 곳과 가까운 곳 사람들의 

  희망을 어그러뜨리는 일이 아니겠나.

  좀 참아야 할 것일세.“

 

비서감 황보진이 모용각에게 말했다.

 

“ 모여근이 원래 용렬한 사람이었는데 

  먼저 돌아가신 황제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 고명까지 받았습니다.

  소인이 잘 알지는 못하나 국가의 슬픈 일이 있고 부터는  

  더욱 더 교만해지니 장차 화란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밝으신 공께서 주공의 자리에 계시면서 

  사직을 위해 깊이 도모하시고 일찍 그를 처단해 주십시오.“

 

그러나 모용각은 또 다시 듣지 않았다. 자신의 위상이 위태롭다고 느낀 모여근은 태후 가족혼씨와 황제 모용위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 태재(모용각)과 태부(모용평)가 장차 불궤한 짓을 꾸미고 있습니다.

  청컨대 신이 금병을 이끌고 가서 저들을 죽이게 해 주십시오.“

 

태후 가족혼씨가 그러려고 할 참에 모용위가 어머니 가족혼에게 말했다..

 

“ 두 공은 짐과 매우 가깝고 현명하신 분들이요.

  그렇기에 돌아가신 선제께서 특별히 뽑아서 

  고아와 과부를 의탁하신 겁니다.

  반드시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인데 

  태사께서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님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마침내 중지하였다. 그러나 모여근은 끈질기게 고향을 그리는 가족혼 태후와 모용위를 꼬드겼다.

 

“ 지금 천하는 쓸쓸하고 외부의 침략이 여럿이어서

  나라에 큰 걱정거리가 깊으니

  동쪽으로 돌아감만 못합니다.“

 

모용각이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숙부 모용평을 찾아가서 모여근을 처리하는 방안에 관하여 의논을 했다. 모용각과 모용평은 우위장군 부안을 보내어 역모를 획책한 모여근과 그의 일족을 모두 죽이도록 했다. 나라가 대상을 치르는 가운데 조정 핵심 중신의 일족이 피살되면서 어수선하고 흉흉한 분위기가 조정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모용각은 침착했고 걱정스런 기색을 전혀 띄지 않았으며 호위병도 딱 한 명만 데리고 다녔다. 어떤 사람이 엄하게 경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하자 모용각이 말했다.

 

“ 사람의 마음이 바야흐로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는데

  마땅히 평안하고 진중하게 해야지

  어찌 사람들을 놀라게 하겠느냐.“

 

모용각은 비록 조정의 가장 큰 중책을 맡고 있었지만 항상 예의바르고 조심조심했으며 매사 부지런하게 담당했다. 마음을 비우고 선비들을 대했으며 훌륭하게 자문해 주었고 재주를 헤아려 임무를 주었으니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이 거의 없었고 혹 잘못을 범하더라도 조용하게 다른 자리로 옮기게 하였으므로 원래의 신분을 잃지를 않았을 뿐더러 이를 경계삼아 더욱 온전히 행하도록 은밀하게 격려를 한 셈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 당시 관리들 사이에 가장 부끄러운 욕이 ‘재공(태재 모용각)으로부터 관직을 옮겨 받은 사람’일 정도였다.      

 

모용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진 조정은 이 때야 말로 전연을 공격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직 환온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 모용각이 아직 살아있으니

  걱정거리는 더 커진 셈이오.“

 

태재 모용각은 동생 오왕 모용수를 사지절, 정남장군, 도독하남제군사, 연주목, 형주자사로 삼아 여대(하남성 상구시)에 진수하게 하고 손희를 병주자사로 고 부안을 호군장군으로 임명하여 2만 군사로 황하 이남의 지역을 순무한 뒤 회하를 거쳐 돌아오게 하였다. 이로써 전연은 확실히 이 지역을 영토로 확보한 셈이 되었다.  

 

(13) 전연 태재 모용각의 죽음과 오왕 모용수 강력추천(AD367) 

 

새로운 황제 모용위가 어린 10세에 등극해서 이제 열여섯 살이 되었으니 정치를 관장하던 삼촌 태재 모용각과 종조부 모용평이 정치를 황제에게 돌려 드리고 개인 사저로 돌아가겠다고 간청했다. 모용위는 허락하지 않았다.(AD366) 일 년 쯤 지난 AD367년 어느 날 모용각이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  폐하, 오왕 모용수의 재주는 신보다 열 배나 되지만

   먼저 돌아가신 황제께서 장유의 법칙에 따라 

   저를 오왕보다 먼저 세우셨습니다.   

   신이 죽거든 부디 나라를 들어 오왕을 곁에 두시고 

   그의 의견을 들으십시오.“

 

며칠 지나 모용각 병이 위독해지자 황제 모용위가 친히 그의 집에 가서 후사에 관해 물었다. 모용각이 대답했다.

 

“ 신이 듣기로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훌륭한 사람을 천거하는 일보다 중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이 비록 판축(담장 쌓는 막노동 일)하는 곳에 있다 하더라도

  재상으로 삼을 수 있는 법인데

  하물며 아주 가까운 친척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오왕(모용수)은 문무의 재주를 다 갖추어

  관중이나 소하 다음 가는 사람이오니 

  폐하께서 만약 큰 정치를 맡기신다면

  반드시 국가는 안전할 것이나 

  만약 등용치 않으신다면 동진이나 전진이 틈을 만들어 

  계책을 꾸밀 것입니다.“   

 

그 말을 마치자 곧바로 모용각이 숨을 거두었다. 이 때 모용각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4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동생 오왕 모용수 나이가 이 때 41세였음)   

 

(14) 모용평의 인사실패(AD368)

 

태부 모용평은 모용황의 동생이고 모용준과 모용각과 모용수의 숙부였으며 지금 황제 모용위에게는 작은 할아버지였다. 태재 모용각이 중병에 들었을 때 가장 큰 걱정은 시기심 많은 삼촌 모용평이 인재를 잘못 골라 쓸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 모용위의 서형 모용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  지금 형국이 남으로는 동진이,    

   서로는 전진이 틈을 보면서 국력을 쌓아 가고 있구나.

   무릇 국가 흥망과 성쇠는 오로지 재상의 능력에 달려있는데

   특히 대사마(모용각이 쥐고 있던) 자리는 

   6군을 전체적으로 통제하는 자리이므로 

   적당하지 않은 인물을 절대로 그 자리에 앉혀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죽는다면 친소로 볼 때

   그대(모용장) 아니면 모용충(冲)일 텐데

   비록 재주와 식견이 있다고 한 들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왕이 천부적으로 자질이 뛰어나고 지략도 세상을 뛰어넘을 것이므로

   그대들이 대사마 자리를 뒤로 미루었다가(사양하라는 의미) 

   오왕에게 줄 수만 있다면 그가 반드시 사해를 하나로 만들 것이다.“ 

   

모용각은 이런 뜻을 여러 차례 삼촌 모용평에게 당부하였다. 그러나 모용각이 죽자 모용씨의 대원로 모용평은 모용각의 말을 듣지 않고 거기장군 모용충을 대사마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오왕 모용수에게는 시중, 거기장군의 자리를 주었다. 이제 확실히 권력의 중추는 모용각-모용수에서 모용평-모용위에게로 바뀐 셈이다. 

 

(15) 부씨의 내란을 활용하자는 모용덕(AD368)

 

AD364년에 전진의 부생의 친동생 여남공 부등(騰)이 다른 네 명의 동생들과 함께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 죽은 적이 있었다. 왕맹은 예전부터 부생의 자식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원래 불심 자비심으로 유명한 주군 부견은 주모자 부등만 처리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살려 주었다. 그 때 살아남은 정북장군 회남공 부유가 AD365년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습격했는데 이위가 잘 방어하여 부유가 체포되고 죽었다.(AD365년 10월) 이 때 부건의 아끼는 아들 정동대장군 진공 부류(부생의 동생)와 부견의 친형 정서대장군 조공 부쌍도 반란에 가담을 했지만 부견은 부유만 처단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살려 주었다. 부견이 두 번이나 목숨을 살려 주었던 부류가 AD367년 부생의 다른 동생 진동장군 위공 부수와 안서장군 연공 부무와 함께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모의했다. 진동장군부 주부 요조가 주군 부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공께서는 주공과 소공처럼 주군(부견)과 친한 사이인데      

  국가가 어려울 때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어찌 스스로 난을 일으키려 하십니까?“

 

부수는 요조의 말을 듣지 않고 반란 군사를 일으켰다. 부견이 그 소식을 듣고 즉각 난을 일으킨 부류 형제를 장안으로 긴급 소환했다. 부류 형제들은 소환령을 거부하고 군사를 몰아 

남쪽으로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부견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군대를 물리고 소환에 응하면 용서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신표로 배를 깨물어 보이는 「설리의 신표(齧梨爲信,설리위신)」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부견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다. 다음해 정월 부견은 양성세와 모숭을 보내 진주(秦州) 방향 반란군 부무를 토벌하게 하고 왕맹과 등강은 옹주 포판(산서성 영제)의 부류를 공격하였으며 양안과 장자를 보내 섬성(삼문협)의 부수를 토멸시켰다. 

 

섬성을 지키던 부수는 두려운 나머지 전연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전연의황제는 용렬한 모용위였고 훌륭하게 정치를 이끌어가던 모용위의 삼촌 모용각은 지난해(AD367) 사망하고 용렬한 모용평이 집권하던 때였다. 사실 전연 조정에서는 전진이 부씨 형제간 내전으로 혼란한 지금이야말로 전진을 토벌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 한 사람인 범양왕 모용덕이 이렇게 말했다.

 

“ 선황(모용준)께서 하늘의 뜻에 호응하고 천명을 받아서 

  뜻을 높여 6합(동서남북천지=천하)을 평정하시려 했습니다.

  페하께서 그 대통을 이으셨으니   

  마땅히 그 뜻 또한 계승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부씨들이 골육전쟁으로 흩어져 나라가 다섯으로 나뉘고

  정성을 다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전진을 우리에게 던져 준 것입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천하재앙을 내릴 것이니

  오월의 경우가 그런 것입니다. 

  황보진에게 명령하시어 병주, 기주 무리를 데리고 포판으로 가게 하시고

  오왕은 허창과 낙양의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부수를 구해 주십시오.

  태부(모용평)은 금위군을 인솔하여 뒤따르게 하시며

  격문을 천하에 띄워 포상금으로 전국의 군대가 호응하도록 하시면

  천하 통일의 기회가 바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태부 모용평은 옹졸하고 그릇이 형편없이 작았다.   

 

“  전진은 대국이라 쉽게 도모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닫아걸고 국경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진을 평정하는 것이 어찌 나의 소관이란 말이냐!“

 

이런 전연 조정의 내막 형편을 알게 된 부수는 오왕 모용수에게 서신을 보내 상의했다.

 

“ 지금 이 기회를 타서 빼앗지 않으면 

  과거 오의 부차가 월왕 구천을 죽이지 않음에 따라

  나중에 월왕 구천의 공격을 받아 용동에서 방축되어 자살하게 만든 

  용동의 한(甬東之恨)이 될까 걱정됩니다.“

 

모용수가 측근 황보진에게 이렇게 걱정했다.

 

“ 주군(모용위)이 어리고

  태부 모용평은 용렬하기만 하니

  어떻게 부견과 왕맹을 당해 내겠소?“ 

 

황보진이 이렇게 대꾸했다.

 

“ 우리가 그것(이 기회에 부견을 공격하자는 것)을 말한 들

  듣지 않을 것이니 말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전연의 모용위와 모용평 조정은 소중한 기회를 이렇게 놓치고 말았다. 물론 이 때 전연이 전진을 공격했다고 해서 이겼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좋은 호기였음은 분명하다. 이로부터 2년 뒤인 AD370년 전연은 부견의 공격을 받고 허무하게 멸망하게 된다.    

 

 

(16) 동진의 전연 북벌(AD369)

 

동진 대사마 환온은 오래 전부터 북벌의 계획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북벌의 대상은 전진과전연이다. AD368년 3월 환온은 서여주자사 치음과 강주자사 환충과 예주자사 원진과 함께 전연을 토벌하게 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다. 치음은 원래부터 전쟁 따위에 참여하는 것이싫어서 자신의 휘하 부대를 모두 환온에게 맡기면서 다른 자리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환온은 즐거운 마음으로 요청을 수락하고 치음을 회계내사로 내보내고 자신이 서연주 이주 자사가 되었다. 

 

환온은 보, 기병 5만을 물길을 타고 이끌고 고숙(안휘성 당도, 장강의 마안산 남쪽)을 출발하여 연주, 즉 지금의 산동성 제녕 부근에서 북벌을 시작했다. 치초가 강물의 수위가 낮아서 조운이 원활하지 못할 것에 대비하자고 했지만 환온은 걱정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환온군이 진격하고 나서 가뭄이 점차 심해지면서 강물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 환온은 모호생을 시켜서 거야(산동성 거야)로부터 300 리 운하를 파서 말라빠진 변수에 물을 대도록 했다. 치초가 무리한 북진전략을 비판했다. 

 

“ 수로의 배후가 적에 의해 막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차라리 군대를 이끌고 수로가 아닌 육로로 

  전연 수도 업으로 바로 진격하면 

  그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 저절로 붕괴될 것입니다. 

  만에 하나 나와서 싸운다 하더라도 전세는 금방 결단날 것입니다. 

  다만 공께서 이런 전략이 경솔한 것이어서 

  승산이 엷다고 생각하신다면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군사를 황하와 제수 사이에 머물게 하신다음 

  물자를 충분히 축적하고 나서 

  여름쯤에 병력을 발동하시면 

  비록 늦은 것 같아도 필시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 두 계략을 버리고 계속하여 진군하신다면

   속도도 빠르지 않을뿐더러 물러날 수도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도적들이 이런 형국을 이용하여 전투를 계속 지연시키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면 북쪽 지역은 곧바로 가을과 겨울이 와서

   물길이 얼고 곡식이 다하며 

   가죽옷을 입어도 추위가 뼛속을 스며들 것이 두렵습니다.“   

 

환온의 군대를 맞아 산동성 호륙(어태현)에서 녕동장군 모용충(忠)이 분전했으나 패하여 사로잡혔다. 모용위가 하비왕 모용려를 대도독으로 삼고 보기 5만 명을 다시 보냈으나 황허(하남성 개봉 부근)에서 역시 대파 당하였다. 고평태수 서번은 동진에게 항복했고 전연 장수 부안도 동진의 등하와 주서에게 연파 당하였다. 다급해진 전연 황제 모용위는 낙안왕 모용장에게 전군을 통괄하게 하고 환온에 대항했으나 그마저 격파 당하자 이제 남은 유일한 방법이 전진의 부견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었다. AD369년 7월 환온이 무양(산동성 신현)까지 들어와 주둔하자 주변의 인사들이 속속 동진 환온에게 투항해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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