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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3> 최측근 전횡(F) 조절(曹節)과 당고(黨錮)의 화(禍)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11월26일 17시0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7

본문

(1) 관료평가 유행과 당인의 시작(AD166) : 태학 유림 세력 및 붕당 형성

 

효환제 유지는 황제가 되기 전에는 하북성 여오(지금의 여현)지방의 여오후였는데 그 때 스승은 감릉(지금의 산동성 청평)출신인 주복이라는 사람이었다. 효환제는 황제가 되자 바로 주복을 발탁하여 상서로 삼았다. 당시 하남윤 방식은 주복과 같은 고향출신이었으나 주복보다 훨씬 명망이 높았고 학식이 뛰어났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따라서 세간에는 이런 노래가 돌고 있었다.

 

“천하의 규구(規矩 즉 모범)는 방식이지만 

 높은 자리를 얻은 사람은 

 황제의 스승이었던 주복이라네.“ 

 

주복과 방식 본인들은 그렇지 않았으나 그 두 사람의 가문과 식객들은 서로 나무라고 흠잡으며 다투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두 가문은 감릉에서 붕당을 결성하면서 대립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사는 지역에 따라서 북파(주복파)와 남파(방식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여남태수 종자는 범방이라는 사람을 공조(실질적인 부태수)로 임명했고 남양태수 성진은 잠질을 공조로 임명했다. 범방과 잠질 두 사람은 엄격하고 불의를 극도로 혐오하는 강직한 사람이었다. 중상시 당형(환관 5인방 오후의 한 사람)이 범방의 조카 이송의 자리를 여남태수 종자에게 부탁하여 임명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범방은 행실과 평판이 좋지 않은 조카에 대한 임명장을 묵혀 두고서 임명하지 않았다. 화가 난 태수가 말단 관리 주령을 불러 채찍질로 때리자 주령이 이렇게 말했다. “범방 공조께서 밝게 처리하셨으니 제가 오늘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범방공조의 뜻은 어길 수가 없습니다.” 태수 종자가 더 이상 매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여남과 남양에서는 이런 노래가 돌았다.

“ 여남태수는 범방이고 남양사람 종자는 허수아비일 뿐일세.

 남양태수는 잠질이고 홍농사람 성진은 자리만 지킬 뿐이네.“ 

 

당시 태학(대학)에는 약 3만 명의 유생이 있었는데 그들의 우두머리는 곽태와 가표였고 이들과 함께 이응과 진번과 왕창이 학식과 덕망으로 모든 유생들에게 존경과 숭상을 받았다.

유생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 천하의 본보기는 이응이고,

  강한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기로는 진번이며,

  천하의 빼어난 실력은 왕창이다.“ 

각 지방은 물론 태학에서조차 중앙과 지방의 관료나 학자들의 학식과 덕망과 인물평가를 하는 것이 큰 유행처럼 번져나갔으므로 그들이 깨끗하다고 평가하면 존경받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여지없이 매도되는 형편이었다. 그러니 공경조차 그들의 평가를 두려워했고 좋은 평판을 받기 위해 태학을 떠받들고 아부를 그치지 않았다.           

 

(2) 환관과 유림의 갈등과 환관의 승리 : 제1차 당고의 화(AD166) 

 

하남성 완(지금의 남양)지방에 큰 장범이라는 부호가 있었다. 그는 후궁과 친척관계가 있었고 또 재물도 많아 여러 환관들에게 접근하여 환심을 삼으로써 높은 직책과 권세를 부릴 수가 있었다. 장범이 배후를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자 남양 공조 잠질은 남양태수 성진에게 그를 체포하여 주살하라고 간청했다. 성진은 장범을 체포하여 그 일족 200여명을 함께 처형해버렸다. 사실 그 처형 당시에는 크게 사면령이 내려진 터라 그 이전의 모든 죄는 사면되어 처벌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성진은 처단해버린 것이다. 당시 환관무리의 실력자 중의 한 사람 중상시 후람이 장범의 처에게 억울한 죽음이라고 탄원할 것을 꼬드겼다. 겉으로는 장범을 위하는 척한 것이지만 사실은 잠질 등 유림관료 세력에 대한 반격인 속셈이었다. 동시에 지방 태수들에게 죽임을 당한 환관들의 집단 탄원도 황제에게 올라왔다. 당연히 후람이 배후조종 세력이었다. 효환제는 즉각 남양태수 성진과 태원태수 유질을 잡아들였다. 재판관은 성진과 유질을 기시(棄市,죽여서 시체를 시장에 걸어 둠)해야 마땅하다고 했지만 일단 처형하지는 않고 가두어 두었다.

 

또 다른 중상시 서황(환관 5인방의 거두)의 조카 서선이 포학하여 동해태수 이호의 딸을 요구하였다. 이호가 거부하자 병졸을 보내 딸을 산 채로 포박하여 잡아와서는 활을 쏘아 죽여 버렸다. 경악한 동해재상 황부는 즉각 서선을 체포하여 심문에 들어갔다. 주변사람들이 서황의 시퍼런 서슬을 두려워하여 극구 황부를 말렸지만 황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 국가의 역적을 내가 죽였으니

  그 일로 내가 오늘 죽는다 하더라도

  족히 눈을 감을 만하다.“ 

 

황부는 서선의 시체를 기시해버렸다. 환관무리들이 또 집단으로 효환제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효환제가 황부와 함께 중상시 후람을 모욕한 장검을 소환하고는 머리털을 다 깍아버리는 형벌(곤겸)을 주었다. 환관무리들이 집단으로 억울함을 상주하여 지방관료들이 대거 투옥되자 태위(수상) 진번과 사공 유무가 나서서 성진, 유질, 적초 및 황부를 사면하기를 간청했다. 황제는 시큰둥했다. 재판관들은 속히 지방관들을 처형할 것을 독촉했다.

진번이 나섰다. 

 

“ 예날 승상 신도가는 무례하고 방자한 등통을 효문제 앞에서 책망했고,

  효문제가 오히려 나아와 용서를 바랐으며(BC162)

  낙양현령 동선이 살인 죄인을 빼돌리려 한 공주를 책망하자

  광무제는 공주에게 머리 숙여 사과하라고 하고서 상을 내렸습니다.(AD43)

  환관의 정치를 막으시고,

  상서와 조정대신들의 말만 들으시며,

  훌륭한 이재를 곁에 두시고 악한 사람을 내치소서.“

 

효환제는 듣지 않았고 결국 갇혔던 성진과 유질은 끝내 감옥에서 죽고 말았다.(AD166)

그 당시 풍각쟁이, 즉 바람 부는 것을 가지고 점을 치는 점쟁이 장성이라는 사람이 여러 환관과 친분이 깊었고 가끔 황제에게 자문하기도 하였다. 장성은 장차 대 사면령이 있다는 정보를 후람에게 듣고서 자식들에게 사람을 죽이고 죄를 범하도록 했다. 사예교위(서울지방검찰청장) 이응이 장성을 즉각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사면령이 내려 진 뒤라 장성이 벌을 받지 않게 되었다. 화가 난 이응은 독단적으로 장성을 죽여 버렸다. 환관 무리들이 죽은 장성의 아들을 시켜 이응을 고발하도록 사주했다.     

 

“ 이응이 태학생과 유생을 규합하여 당을 결성하고서

  조정을 비방하고 풍속을 어지럽힙니다.“    

 

효환제가 이응을 즉각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태위 진번이 반대에 나섰으나 황제는 듣지 않고 이응, 두밀, 진상, 진식, 범방 등 200여명을 체포하여 구금했다. 진식은 “내가 감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어진다.”고 하면서 스스로 감옥으로 나아갔다. 진번이 다시 그들의 무죄를 상소하자 황제는 태위 진번을 파면시켜버렸다. 도요장군 황보규가 진번을 두둔하면서 스스로 당인이라고 주장하며 나섰다. 

 

“ 제가 장환을 천거했었는데  그가 당인이고, 

  장봉이 저를 두둔한 적이 있는데 그 또한 당인이니,

  저 또한 당인과 연루된 셈입니다.“  

 

청렴하고 덕망 높은 많은 중신들과 관료들이 제1차 당고의 화로 말미암아 배척되고 밀려나거나 아예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이것이 제1차 당고의 화이다.(AD166) 다음 해 가표와 두무와 곽서 등의 간곡한 설득으로 모든 당인들은 감옥에서 방면되지만 종신 금고형에 처해져 지방으로 쫒겨나고 또 관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3) 효환제 붕어(AD167)와 효영제 즉위 및 두태후 등장과 유림세력 부활(AD168)

 

AD167년 12월 28일 후한 11대 황제 환제 유지(劉志, AD132-AD168)가 36세로 죽었다. 그에게는 세 명의 황후가 있었는데 제일 먼저 부인 양황후(양여영)는 8년 전(AD159)에 죽었고 그 뒤를 이은 등황후(등맹녀)는 투기가 심해 2년 전(AD165)에 폐출되고 곧바로 죽었으므로 두무의 딸 두묘가 귀인에서 세 번째 황후로 올라갔다. 남편 환제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12살 짜리 5촌 조카 유굉(AD156-AD189)을 세워 후한 12대 황제 영제(靈帝)가 되었고 두황후는 자연스레 두태후가 되었다.

 

3년 전 등황후가 죽었을 때 두태후는 귀인이었는데 황후책봉 문제로 조정은 의견이 심하게 갈렸었다. 남편 환제 본인은 몹시 사랑했던 채녀(귀인아래 직급) 전성을 황후로 세우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태위 진번과 사예교위 응봉은 “모후의 신분이 흥망성쇠의 근본이므로 다섯 가지 흠(부인상을 당한 자의 장녀, 형벌을 입은 집안, 부정한 죄를 지은 집안, 역적집안, 병이 있는 집안)이 있는 집안 여자를 세우면 안 된다고 반대했었기 때문에 명문가문 두귀인을 황후로 세운 것이다.(AD165) 평소에 시기가 심하고 잔인하였던 두태후는 남편의 애첩이었던 전성을 바로 죽여 버렸으며 아버지 두무를 대장군, 진번을 태부, 유구를 태위, 그리고 호관을 사도로 임명했다. 그리고 황제 영제를 옹립한 공신 11명을 임명했는데 대부분이 두무의 아들, 조카 등 두씨 일족이었고 단 한명의 환관 조절이 공신록에 들어가 있었다. 노식이라는 사람이 두무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 영제가 후사가 된 것은 족보의 순서에 따라 자연스럽게 된 것인데 무슨 공이 있다고들 작위를 받으시는 거요. 하늘이 정해준 순서에 따른 것일 뿐이니 자신들의 공이라 할 수 없소. 마땅히 사양하시고 몸과 명성을 온전히 지키시지요.” 

 

두태후는 과거 자신을 지지해 준 진번에게 특히 고양향후라는 작위를 수여하려 했으나 ‘올바른 도로 얻지 않은 작위’라 하여 거부하였다. 진번은 이응, 두밀, 윤훈, 유유와 같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을 징소 즉, 등용시킴으로써 전한 효문제 및 경제 시대의 태평시대를 기대하는 온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했다.

 

(4) 유림 두무와 진번의 환관척결 시도(AD168)

 

새로 권력을 잡은 대장군(병권장악) 두무와 태위(총리) 진번은 모두 조절, 왕보, 후람 등 환관세력을 극도로 경계하고 혐오하였는데 진번이 두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절과 왕보 등 내관들은 돌아가신 황제시절부터 나라 권력을 잡고 농단하여 나라를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혀왔으니 지금 죽이지 않으면 나중에는 도모하기가 정말 어려울 것입니다.” 두무도 그럴 것이라고 동조했다. 두무의 내심을 파악한 진번은 기쁜 마음으로 나와 동지인 상서령 윤훈과 함께 계책을 확정했다. 때마침 일식이 있었다. 진번이 두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 옛날 소망지는 석현(전한 원제 때 환관) 한 명을 처리하는데도 곤란을 느꼈는데 요즘같이 그런 무리가 수 십 명인 경우에야 어떻겠습니까. 저는 팔십이나 먹은 나이에 국가와 장군을 위해 해로운 자를 제거하고자 하오니 이번 일식을 계기로 환관을 파직시킴으로써 하늘이 내리는 변고를 막아야 할 것입니다.”

 

두무가 자기 딸인 두태후에게 가서 말했다. “ 예로부터 황문과 상시는 단지 궁궐 안의 일만 담당할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정사에도 깊숙이 간여하고 중요한 권한을 맡으며 양자로 입양한 자제들을 포진시켜 오로지 흉악하고 탐욕 포악한 짓을 일삼고 있습니다. 천하가 흉흉한 것은 바로 그 까닭이니 서둘러 모두 죽이거나 폐출시켜서 조정을 깨끗하게 하셔야 합니다.” 두태후가 이렇게 반문했다. “ 한나라 초기서부터 환관이 있어왔는데 단지 죄 있는 사람을 죽여야지 어찌 모두 다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두태후가 완강히 거부하므로 두무도 할 수 없이 난폭하기로 이름난 환관 관패와 소강만을 체포하겠다고 대답하고는 나왔으나 약속과 달리 낮은 직급의 환관을 모두 연좌시켜 죽여 버렸다. 그러나 환관의 수령격인 조절, 후람 등은 죽일 수가 없었다. 

 

진번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 지금 경사(장안)이 매우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것은 후람, 조절, 공승흔, 왕보, 정삽 등과 같은 환관 거두들이 유모 조요와 함께 당을 이루어 따르는 자는 승진시키고 따르지 않는 자는 중상모략을 받고 있습니다. 온 조정의 신하들은 마치 강 위에 떠있는 나뭇조각 같이 되어 둥둥 떠다니며 오로지 봉록만 축을 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지금 이 무리들을 죽이지 않으시면  반드시 변란이 일어 나 사직이 위태로울 것이니 그 화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기는 신의 상소문을 널리 알리시고 천하의 간사한 자들에게 신이 그들을 미워하고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어린 효영제는 두태후에게 어찌할지를 물었고 두태후는 주청을 묵살했다.  

 

두태후와 황제가 환관 무리에 대해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자 대장군 두무와 태위 진번은 일단 환관과 가까운 사람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로 요직을 재편하는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환관을 총지휘하는 황문령의 자리에 조절 왕보 등과 가까운 위표를 파면시키고 대신 산빙을 임명했다. 그리고 산빙에게 환관 측 상서 정삽을 체포하여 고문수사하도록 하였다. 진번이 두무에게 다그쳤다. “ 아니 저 무리들은 의당 붙잡아 서둘러 죽여야 하는데 어찌 고문만 하고 계십니까.” 두무는 죽이지 않고 계속 고문하여 결국 조절과 왕보가 연루된 중요한 단서를 포착했다. 두무는 즉시 윤훈과 산빙을 시켜 조절과 왕보 등을 체포하겠다는 상주문을 써서 유유를 보내 황제에게 올리도록 하였다. 

 

(5) 조절에게 죽은 시대의 으뜸(三君) 두무와 진번과 유숙(AD168)

 

조사와 심문을 대강 마치고 조절과 왕보의 체포명령을 내리기로 결정한 두무는 그동안 지내던 황궁에서 나와 궁궐 바깥에 있는 대장군부로 옮겨갔다. 그사이 윤훈과 산빙이 쓰고 유유가 올린 조절, 왕보 등의 체포문서를 몰래 훔쳐 본 환관이 즉시 달려가 태후궁(장락궁)의 여상시 감독관 주우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주우는 소리치며 욕을 쏟아 부었다. “ 방종한 내시들이야 죽여 마땅하다지만 우리들이야 무슨 죄가 있어 멸족까지 시킨단 말인가.” 화가 난 주우는 크게 소리치며 황제와 두태후에게 달려가 거짓말로 무고했다. “ 두무와 진번이 태후에게 아뢰어 황제를 폐위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대역죄입니다.” 곧바로 장락궁의 건장한 무사 공보, 장량 등 17명을 규합하여 피를 나누어 마시며 두무를 죽일 것을 맹약했다. 

 

그리고 조절은 황제를 장악하기 위해 황급히 황제에게 가서 상황이 긴박하니 덕양전으로 피해야 한다고 권했다. 황제에게 칼을 들려 뛰어가게 하고 그 옆으로 유모 조요와 여상시들이 황제를 호위하였다. 무력으로 협박하여 궁궐 문을 폐쇄시키고 황문령에 왕보를 임명하였으며 모든 권신을 체포하라는 조서를 써서 내렸다. 조서를 받은 황문령 산빙이 조서를 의심하자 왕보가 그 자리에서 그를 타살했으며 곁에 있던 윤훈도 죽였다. 체포되어 있던 정삽을 풀어 주자 정삽은 두태후를 위협하여 그의 인새와 인수를 모두 빼앗았고 두무를 체포하러 사람을 대사마부로 보냈다. 두무는 정삽이 보낸 사람을 죽이면서 말했다. “황문과 상시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힘을 다해 막는 자는 열후에 봉할 것이다.” 진번도 문하생 80여명과 함께 궁궐로 돌격했다. 그러나 진번은 왕보에게 잡혀 옥에 갇힌 뒤 환관에게 처참하게 죽었다. 조절은 또 황제의 조서를 고쳐서 변방에서 장안으로 소환되어 오던 장환에게 두무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장 장환이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온다는 소문에 두무의 군사들은 다 도망가 버렸다. 두무와 그 아들 두소는 결국 자결을 선택하였다. 두무와 진번은 황제 영제의 친할아버지 유숙과 함께 후한 말 가장 으뜸이 되는 세 군자(삼군)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이 때 유모 조요와 환관 두목 조절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두무의 종친과 빈객과 인척들도 모두 주살되었다. 유유의 일족도 마찬가지였다. 진번과 두무가 추천한 사람은 모두 면직되거나 가두었다. 조정의 실권은 유모 조요와 환관 우두머리 조절과 왕보가 잡게 되었다. 조절은 위위가 되었고 훈작으로는 육양후를 내려 받았다. 왕보는 중상시가 되었다. 공적이 큰 주우, 공보, 장량 등 6인은 열후로 책봉되었고 나머지 11명은 관내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장환은 이용된 것을 알고 속으로 후회하며 사양하였다. 두태후는 남궁으로 옮겨 유폐되었고 영제는 동귀인을 황후로 책봉했다.

 

(6) 2차 당고의 화(AD169)

 

조절과 함께 환관세력의 우두머리였던 후람은 장검에 대해 과거 원한이 있었다. 3년 전(AD166) 후람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고향 산동성 어합현에서 상례를 거대하게 치르고 분묘를 과도하게 조성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그 지역 감독이었던 장검이 후람의 과도한 장례의 죄상을 조정에 밝혀 올렸던 일이 있었다. 후람은 상주문을 중간에서 재빨리 탈취했고, 그것을 안 장검은 후람의 모친 분묘를 파헤치고 고향가택을 파괴하며 재산을 몰수한 적이 있었다. 장검이 재차 후람의 죄상을 올렸으나 후람이 또 그를 차단하였으므로 황제에게까지 올라오지는 않았다. 당시 조정은 두무와 진번과 같은 사대부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후람도 그 이상 어쩔 수는 없었다. 그러나 AD168년 두무와 진번이 환관세력들에게 피살되고 조절 등 환관무리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나자 세상은 바뀌었다. 마침 장검에게 사소한 인사 불이익을 받아 원한을 품고 있던 주병이라는 자가 후람에게 장검을 무고했다. 고향 사람 24명으로 당인을 결성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후람은 즉각 수사명령을 내리고 장검을 체포했다. 이 기회에 아예 사대부세력을 발본하겠다는 생각을 한 대장추 조절은 황제에게 이렇게 요청했다.

 

“우방, 이응, 두밀, 주우(이 주우는 앞(4)의 여상시 감독관 주우와는 다른 인물), 순익, 적초, 유유 범방 등이 구당(갈구리로 긁어모은 무리,鉤黨)을 결성하였으니 수사하게 해 주십시오.“ 

이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사대부들이었다. 황제가 왜 ‘구당’이라고 부르느냐고 묻자, 조절은 ‘못된 패거리(당인)’라서 그렇게 불렀다고 대답했다. 황제가 왜 죽여야 하느냐고 다시 묻자 조절은 불궤한 짓을 하려 했다고 답했다. 황제가 불궤한 짓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자 조절은 ‘사직에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모 조요와 환관들에게 둘러싸인 14살짜리 효영제는 그들의 체포를 허락했다.    

 

지난 번 제1차 당고의 난(AD166)때에도 크게 화를 당한 적이 있었던 이응에게 사람들은 서둘러 도망가라고 권했다. 이응이 이렇게 말했다. 

“임금을 섬기는 일에는 어려운 일을 사양하지 않는 법이며 

죄를 지었다면 벌을 피하지 않는 것이 절개입니다. 

내 나이 예순에 죽고 사는 것이 하늘에 달려 있으니 

도망간 들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이응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범방을 체포하라는 문서를 받은 여남 감독 오도는 통곡을 했다. 오도가 크게 통곡했다는 소식을 들은 범방은 “반드시 나 때문일 것이다.”하고는 자진하여 자수했다. 현령 곽읍이 자수를 말리면서 같이 도망가자고 하자 범방이 이렇게 말했다. “이 범방이 죽으면 모든 환란이 끝나는 것을 어찌 그대에게 화를 미치게 할 것이며 또 어찌 노모를 이리저리 떠돌게 하겠소?” 그 범방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다. “ 너는 이응, 두밀과 이름을 같이 했는데 죽은 들 무엇이 한스럽겠느냐. 아름다운 이름과 오래 사는 장수를 어찌 겸하여 같이 가질 수 있겠느냐? 내가 너에게 악행을 하라고 해도 해서는 안 될 것인데 네가 선을 행하도록 가르쳤으니 나 또한 악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제2차 당고의 화로 약 100여명의 올바른 선비들이 죽었고 처자들은 변방으로 쫓겨났다. 곽태가 그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말했다. “시경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없어져 나락 병들고 시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이것이로구나. ‘까마귀가 어디에 머무를지 모른다(瞻烏:까마귀가 머무를 곳을 찾는다는 뜻)’는 것이 이것이로구나.” 이제부터 후한은 본격적으로 조절과 왕보같은 환관이 주도하는 혼미한 환관집권의 시대로 접어든다.

 

(7) 제3차 당고의 화(AD176)

 

당시 환관세력에게 최대의 적은 유림세력과 두태후의 두씨 세력이었는데 제1,2차 당고의 화로 말미암아 유림세력은 크게 위축되었으나 아직 두태후는 유폐되긴 했지만 살아있었다. 환관세력의 실세 조절과 왕보는 두태후의 오른팔 환관 동맹을 무고로 죽여버렸다. 이 때 두태후의 모친이 노환으로 죽었고 두태후도 걱정이 싸여 병으로 죽었다.(AD172년6월10일) 두씨와 원한이 깊은 조절과 왕보는 두태후의 직위를 깍아 내려 ‘귀인’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또 합장하지 않고 따로 분묘를 마련하자고 했다. 모든 유림들은 물론 효영제 마저 반대했다. 병으로 집에서 요양하던 태위 이함이 독약을 품고 집을 나서며 부인에게 다짐했다.

 

“ 두태후를 효환제와 나란히 배향하지 못하면

  나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요.“

 

조정에서 이 문제로 회의가 열렸다. 사법장관 진구가 이렇게 말했다.

 

“ 두황태후는 덕이 높고 훌륭한 가문에서 나오셨으므로

  마땅히 선제 효환제와 합장해야 하며 이는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환관 우두머리 조충이 비웃으며 말했다. “문서로 올리시지요.“ 진구는 곧바로 긴 문장으로 두태후의 합장근거를 밝혔다. 조정의 합장의견이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웠다. 조절과 왕보와 조충 등이 반대했지만 결국 합장하기로 결정되었다. 얼마 뒤 황제의 바깥궁궐 담벼락에 이런 표문이 올라왔다.

 

“ 천하가 크게 혼란하여 

  조절과 왕보가 두태후를 유폐 독살했으나

  조정 공경들은 시체같이 모두 녹봉만을 축낼 뿐(尸祿)

  아무도 충간하는 자가 없다! “

 

조절과 왕보는 즉각 체포령을 내리고 수사에 들어갔으나 사예교위 유맹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범인을 적극적으로 수색하지 않았다. 조절은 유맹을 좌천시키고 탄핵담당관 어사중승 단경을 후임자로 선택했다. 단경은 사방으로 나가 추적하여 태학유학생 1천명을 체포하였다. 단경은 평소에 원한관계에 있던 많은 관료들을 체포해 가두었다.(AD172) 그로부터 4년 뒤 AD176년 운남성 영창태수 조란이 이렇게 상소했다.

“ 당인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덕과 학식이 높아서

  마땅히 나라의 기둥이 되고 황제의 팔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을 보면 많은 훌륭한 선비들이 

  감옥이나 초야에 갇혀있는 형편입니다.

  대역죄를 지은 자들고 사면되어 용서되는데 

  어찌 죄도 없는 당인들은 용서되지 못하고 쳐박혀 있어야 합니까?

  천지에 재변이 많은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치통감은 이 상소문을 본 효황제가 격분했다고 썼다. 그러나 실제로 격분한 것은 효영제가 아니라 그 뒤에 그를 조종하는 조절과 왕보와 같은 환관무리였다. 바로 사예교위와 익주자사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체포한 뒤 괴리(섬서 흥평현) 감옥에서 죽여버렸다. 그리고 당인의 문하생과 예전에 부하나 관리였던 자와 부모형제 및 5촌 이내 친족 중 관직에 있는 자를 모두 색출하여 파면 혹은 금고시켰는데 이것을 제3차 당고의 화라고 한다.(AD176)   

 

세 번에 걸친 당고의 화는 결국 환관세력에 의한 관료 및 유림세력의 배척이다. 관료 및 유림세력들은 비록 그들 나름대로 부패하거나 파당을 결성하는 폐단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백성을 생각하고 어짐을 강조하는 유가적 가치를 토대로 한 세력들이었고 그들 중에는 두무, 진번, 유숙, 이고 등과 같은 뛰어난 나라의 기둥들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국가관이나 백성에 대한 사랑과 같은 근본적인 가치를 전혀 지니지 않은 환관세력보다는 훨씬 나은 집단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이런 유림세력들이 당고의 화를 통하여 환관에게 완전히 무너지고 소탕된 후한은 멸망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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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11월26일 17시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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