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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6 고구려의 천적 전연(C)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7월18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7월16일 15시0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9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4) 단료의 모용황 공격(AD334)

 

단료가 군사를 보내 도하(요녕성 금주시)를 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다시 동생 단난과 망명온 모용한(翰)을 시켜 유성(요녕성 조양현)을 공격하였으나 모용황의 장군 모여니, 성대, 석종 등이 훌륭하게 방어하였다. 단료가 화가 나서 20여 일 뒤에 더 많은 군사로 유성을 침공했으나 비록 1천여 명 수비대를 격파했지만 성을 함락할 수는 없었다. 모용황은 사마 봉혁과 모용한(汗)에게 구원군을 보내면서 말했다.

 

“ 적들의 기세가 예리하니 저들과 칼날을 겨루지는 말거라.” 

   

모용한((汗)은 성격이 사납고 과단성이 있어서 봉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천 기병을 몰아 선봉으로 나갔다가 단난의 군대를 만나 크게 패하였다. 다행이 봉혁이 곧바로 뒤를 받쳐 주었으므로 모용한이 전멸을 피할 수 있었다. 단난이 승세를 몰아 반격하려고 하자 모용한(翰)이 말리면서 계속 공격한다면 자신은 군사를 물려서 되돌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단난은 할 수 없이 군사를 되돌려 돌아왔다. 만약 단난이 공격을 계속했다면 모용황과 전연이 태어나지 못했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15) 모용황의 모용인 토벌(AD336)

 

모용황은 좌우 사마를 두고 사마 한교와 군자좨주 봉혁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그리고 열 여섯 살짜리 모용준(AD319-AD360)을 세자로 삼았다. 이년 전(AD333년) 아버지의 죽음을 동진에 알리기 위해 파견했던 왕제가 건강에 갔다가 바닷길로 돌아오던 도중에 모용인이 장악하고 있던 평곽 부근에서 억류되었다. 모용인은 스스로 평주자사 요동공이라고 주장했으므로 동진 조정에서 준 공식적인 평주자사 임명장을 들고 오는 왕제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모용인은 왕제를 풀어 주면서 건강으로 되돌려 보냈는데 왕제 등은 몰래 바닷길로 금주로 들어가려다가 해풍을 만나 들어가지 못했다. 동진 조정의 사신 서맹이 극성에 도착하여 모용황에게 내린 여러 직책을 다시 수령하자 모용황은 동진조정에 충성을 바치기로 다짐했다.        

금주 북쪽 유성(요녕성 조양)에 있는 우문씨와 하북성 천안에 있는 단씨가 몰래 사신들을 보내 모용인과 내통하려고 하자 모용황은 수 백기의 기병을 보내 우문씨의 사신을 모두 죽이고 단씨 사신은 사로잡아 돌아왔다.(AD335) 모용황은 주변 세력들과 연대하여 포위하려는 모용인 세력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사마 고후가 거들며 나섰다.

 

“ 모용인은 주군과 친척을 배반하고 버렸으니

  백성들과 하늘이 함께 화가 났습니다. 

  전에는 도대체 얼지 않던 바다가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킨 이후 최근에는 

  세 번이나 언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용인은 육로만 신경을 쓸 뿐 바다를 방비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해로로 침략하라는 교시를 내려 준 것입니다.“

 

모용황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해로로 내려와 평곽의 모용인을 습격했다. 모용황은 동생 모용평을 대동하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얼음 위를 걸어서 300여리를 내려간 다음 역림구(요하 입구)에서 치중을 버리고 육로로 강가를 거슬러 평곽까지 올라갔다. 모용인은 모용황이 직접 출병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월이라 날씨도 몹시 추웠지만 모용황의 병력 자체가 대수롭지 않다고 폄하했었다. 모용인은 전군을 성벽에 모아놓고서 외쳤다.

 

“ 적군의 말 한필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라.”

 

문제는 안에서 일어났다. 모용인 휘하의 모용군이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모용황에게 항복한 것이다. 모용인의 군대는 크게 흔들렸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모용황의 대군이 들이닥쳐 모용인 군대를 대파하였다. 모용인은 도망가다가 배반한 부하에게 붙잡혔 모용황에게 끌려왔다. 모용황은 먼저 배반한 모용인의 부하의 목부터 내려쳤다. 그런 다음에 모용인에게 사형을 내렸다. 모용인의 부하들은 동쪽 고구려로 도망갔다. 모용황 군사들이 추격하여 적해와 방감은 잡아 죽였지만 동수와 곽충은 무사히 고구려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해 6월 단료가 중군장군 이영과 군대를 보내 모용황을 습격했다. 모용황의 장수 장맹이 이영을 사로잡았다. 단료는 다시 단란에게 수 만 명의 대군을 붙여서 유성의 서쪽 강가에 주둔시키고 우문씨와 힘을 합해 모용황을 칠 준비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모용황은 기다리지도 않고 보기병 5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유성을 향해 진격했다. 모용황의 5만 대군이 쳐들어온다고 하자 단란은 싸움을 포기하고 혼비백산 도망쳐 버렸다. 움씨의 군사들도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 버렸다. 모용황이 군사들에게 말했다.

 

“ 저들이 공을 세우지도 못하고 도망갔으니 

  반드시 다시 쳐들어 올 것이다.

  마땅히 유성 주변에 매복하고 기다렸다가 저들이 올 때를 기다려라."

 

[그림] AD335년경 요동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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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혁과 수 천 기병을 풀어서 마두산(요녕성 조양부근의산)에 매복시켰다. 몇 개월 뒤에 단요의 군사들이 쳐들어 왔지만 매복한 모용황 군사에게 전멸 당하였다.  

 

(16) 단료의 충신 양유의 권고(AD337)

 

단료의 영토와 모용황의 영토는 서로 겹치기 때문에 두 군사들 간의 크고 작은 충돌은 끊이질 않았다. 단료가 보낸 습격부대는 대부분 모용황의 장수들에게 격파되었다. 단질육권 때부터 5대(단질육권-단섭복진-단말재-단아-단료)를 거쳐 충성을 바쳐왔던 양유가 단료에게 말했다.

 

“ 어진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이웃과 화목한 것은 

  나라의 보배입니다.

  모용씨와는 대대로 혼인을 하였고

  바꾸어가면서 외삼촌과 조카가 되었습니다.

  모용황은 특히 재주와 덕망이 높아서 

  백성들의 지지가 매우 높은데 

  우리는 그들과 원수를 맺고서 허구한 날 

  전쟁으로 쉴 틈이 없으니

  백성들이 마르고 피폐하여 이익도 없이 해만 입고 있습니다.

  신은 사직의 걱정거리가 이로부터 생길까 염려됩니다.

  바라건대 피차간에 잘못한 것을 잘 더듬어 보신 뒤

  처음과 같이 서로 소통하고 연락하여 잘 지내시어서  

  나라를 편안케 하시고 백성들을 쉬게 하십시오.“

 

단료는 그의 따르지 않고 지방관으로 내보내버렸다. 

 

(17) 모용황의 전연 건국(AD337)

 

AD337년 9월 진군장군부의 좌장사 봉혁과 여러 막료들이 모용황에게 연왕의 칭호를 사용하기를 권했다. 모용황은 부하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연왕에 오르기로 하고 봉혁을 국상, 한수를 사마, 배개를 봉상, 양무를 사예로 임명했다. 모용황은 다음 달 10월에 연왕에 즉위하고 위나라 조조와 진나라 사마염이 한 예에 따라서 예식을 올림과동시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부인 단씨를 왕후로 삼고 아들 모용준을 왕태자라 불렀다. 

 

단료의 군대들이 끊임없이 조의 영토를 침략하자 모용황은 양렬장군 송회를 후조에 보내 스스로를 낮추어 후조의 번속이라고 칭하면서 동생 모용한을 인질로 보내고 동시에 단요를 토벌하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후조 석호는 크게 기뻐하면서 인질을 받지 않고 돌려보내면서 후하게 위로하고 답례를 보냈다. 그리고 비밀리에 내년에 연합작전을 펼 것을 약속했다. 

 

(18) 모용황과 후조 석호의 공동작전과 단씨의 멸망(AD338)

 

해가 바뀌자말자 모용황은 조반을 후조에 보내 군사발동의 시기를 물었다. 후조왕 석호는 단료를 치기 위해 이미 3만의 정예병을 모집하여 대비하고 있었다. 단료가 단굴운을 보내 유주(북경)을 습격하자 유주자사 이맹은 뒤로 물러나서 역경(하북성 웅현)을 지켰다. 석호는 도표와 왕화를 각각 횡해장군과 도요장군으로 삼아서 수군 10만 대군을 이끌고 표유진(천진시 동쪽 해안)을 출발하였다. 동시에 요익중과 지웅에게 보기병 7만 명을 주어서 육로로 단요를 정벌하게 하였다.  

 

모용황의 도위 조반이 극성으로 돌아오자 모용황 또한 군사를 이끌고 단료의 영토를 침입하였다. 단료가 화가 나서 모용황에게 대응하려고 하자 모용한(翰)이 말렸다.   

 

“ 지금 후조의 대군이 남쪽에서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모용황과 힘을 합해서 싸워도 모를 텐데 

  정예병을 끌고 오는 연왕과 싸움을 하게 되면  

  장차 남쪽 대군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단료의 친동생 단란이 화를 내면서  막아섰다.

 

“  내가 전에 당신의 말을 잘못 듣고서

   오늘의 걱정거리를 만들었는데

   이 번에는 속지 않을 것이요.“

 

단란이 말하는 속임이란 4년 전 AD334년 모용황의 군대를 크게 격파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용한의 만류로 기회를 놓친 것을 말한다<위(14)> 그러나 모용황은 단란을 훨씬 뛰어넘는 지략을 지닌 사람이었다. 병사들을 요지에 매복시켜놓고 단란을 기다리고 있다가 단란의 군대를 대파하여 참수한 자만 수천 급이었고 5천호와 가축 1만 여 마리를 거두어 갔다.  

 

후조의 석호는 계(북경) 근처까지 밀고 들어왔다. 석호의 부장 지웅은 계의 서남쪽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단료가 임명했던 지방관들이 모두 항복해 들어왔고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북평으로 좌천되어 왔던 양유는 수천 가호를 이끌고 연산 산성으로 들어가 굳게 성문을 닫고 항거했다. 석호의 부장들이 양유를 함락시키자고 했지만 석호는 이렇게 말했다.    

 

“ 그는 절개 높은 선비일 뿐이다.

  항복을 수치로 생각하고 죽음까지 포기하면서 저항할 것이니

  가만 두어도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을 것이다.“ 

 

석호는 양유를 그대로 두고 북진하여 서화(하북성 밀운)에 당도하였다. 단료는 이미 단란이 패한 것을 알고는 전의를 잃고 말았다. 처자와 종족 1천 여 호를 인솔하고 영지(하북성 천안)을 버리고 밀운산 속으로 도망갔다. 석호는 2만 군대를 거느리고 직접 단료를 추격하여 단료의 어머니와 처자를 붙잡고 수천 군사를 참수했다. 단료는 단기로 험지로 도망을 가면서 아들 단걸특진을 후조에게 보내 명마 한 필과 함께 항복의 문서를 올렸다. 단료의 신하들도 모두 나아와 후조에 항복하면서 부고(창고)의 열쇄를 바쳤다. 석호는 노획물을 골고루 나눠주고 재주 있는 선비를 등용하는가 하면 단씨 나라의 2만여 가호를 남쪽의 사주, 옹주, 연주 및 예주에 나누어 이사시켰다.

 

산속에 웅거하면서 버티던 양유가 군영에 나아와 항복을 표하자 석호가 양유를 나무랐다.

 

“ 그대는 옛날 오랑캐처럼 산 속으로 도망을 갔는데

  이제 선비가 되어 돌아왔으니 어찌 천명을 안다고 하겠는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던가?“ 

 

양유가 떳떳하게 대답했다.

 

“ 저는 옛날 유주자사 왕준을 섬겼는데

  왕준이 패하는 바람에(AD314) 단씨에게로 도망 왔었습니다만

  단씨 또한 패망하는 바람에 제 목숨이 온전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하늘의 그물을 높이 치시고 

  사해를 마음대로 주무르시는데

  유주와 기주 호걸들 중에서 소식을 듣고 좇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그들과 견주어 부족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나아온 것일 뿐 제가 죽고 죽지 않고는 제가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폐하가 통제하고 계신 것입니다. “

 

석호는 양유의 말을 듣고 무척 기뻤다. 그 자리에서 양유가 관리로 있던 북평의 태수로 임명했다. <다음에 계속>

 

[그림] 전연 및 후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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