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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S기획] 론스타 스토리 (3) -제 2 부 한국 금융사상 최대 비극의 서막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4년12월10일 00시31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0시24분

작성자

  • 전성인
  • 홍익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메타정보

  • 26

본문

제 2 부 한국 금융사상 최대 비극의 서막
◈ 론스타, 그들은 누구인가?
론스타는 존 패트릭그레이켄(John PatrickGrayken)이 1995년 이후 설립한 일련의 사모펀드 회사를 통칭하는 말이다. 론스타의 설립자인 그레이켄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그 후 텍사스의 유명한 부호 가문인 배스(Robert Muse Bass)가문이 설립한 회사(처음에는 Robert M Bass Group이라고 하다가 후에 Keystone 으로 개명)에서 근무하면서 부실채권 정리 기법을 익혔다. 1993년 경에 브라조스파트너스(Brazos Partners, LP)라는 이름의 배스 그룹과 미 연방예금보험공사가 공동으로 출자한 회사의 사장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금융기관이 보유한 부실채권의 정리 작업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리고 1995년에 브라조스 펀드(Brazos Fund)라는 이름의 펀드를 출범시키는데 이것이 사실상 최초의 론스타 펀드가 된다. (브라조스란 텍사스주의 주도인 오스틴시에 있는 길거리 이름이다.최초의 론스타 관련회사들은 이 길거리상에 위치해 있었다.) 
 1996년에는 론스타오포튜니티 펀드 (Lone Star Opportunity Fund)가 출범하는 데 여기서부터 비로소 ‘론스타‘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론스타는““외로운 별””이라는 뜻으로 텍사스를 지칭하는 관용어다)
 
 한국과 일본에 주로 진출한 론스타 펀드는 3호, 4호, 5호인데 이들은 완전히 동일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편의상 외환은행을 소유했던 론스타 펀드 4호를 기준으로 그 구조를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론스타의 설립자인 그레이켄은 론스타 매니지먼트 코 IV (Lone Star Management Co IV, Ltd)라는 버뮤다 소재 회사의 단독주주다. 그리고 이 회사는 다시 론스타파트너스IV (Lone Star Partners IV, LP)라는 역시 버뮤다 소재 회사의 무한책임사원(General Partner, GP)이 되고, 론스타파트너스IV는 미국에 설립한 또 다른 회사인 론스타 펀드 IV(유에스) (Lone Star Fund IV (US), LP)의 무한책임사원이 된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론스타 펀드 IV(유에스)가 비로소 여러 투자자의 자금을 담는 일종의 그릇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펀드와 완전히 동일한 쌍둥이 펀드가 버뮤다에 또 하나 있는데 이것이 론스타 펀드 IV(버뮤다) (Lone Star Fund IV(Bermuda))이다. 그레이켄이 자금을 담는 그릇을 버뮤다에 또 하나 만든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버뮤다가 유명한 조세피난처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공식적으로 미국에 신고하고 동원할 수 없는 자금, 즉 검은 자금을 담는 그릇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 펀드는 자금을 담아두는 일종의 그릇이고 그 운용은 별도의 회사가 한다.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그레이켄은 텍사스 소재 주식회사인 어드바이저스젠파(Advisors GenPar, Inc)의 유일한 주주이자 대표이사다.이 회사는 텍사스 소재 회사인 허드슨어드바이저스어소시에이츠(Hudson Advisors Associates, LP)의 무한책임사원이고,허드슨어드바이저스어소시에이츠는 다시 텍사스 소재 유한책임회사인 허드슨어드바이저스(Hudson, Advisors, LLC)의 업무집행사원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허드슨어드바이저스가 모든 론스타 펀드의 자산관리를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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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스타의 동북아 진출 과정
 론스타 펀드 3호를 중심으로 4호와 5호가 동북아시아, 특히 한국과 일본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때는 대략 2000년을 전후한 시기다. 이 때 양국은 각각 별개의 이유로 인해 다량의 부동산이 헐값 매물로 나와 있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1990년대 초반 거품이 붕괴한 이후 소위 ‘잃어버린 10년’을 지나가고 있던 때였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998년 이후 은행 및 기업 구조조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과 담보자산이 홍수처럼 매물로 나오던 때였다. 론스타 펀드는 일본에서 동경 스타뱅크라는 소규모 은행을 인수하고, 지산이라는 이름의 골프장과 호텔 체인을 인수했다. 이들은 후에 퍼시픽 골프장이라는 상호와 솔라레 호텔 체인이라는 상호로 세분되어 론스타가 인수하는 골프장과 호텔을 담는 그릇이 된다. 론스타 펀드가 우리나라에 상륙한 초기에 인수한 자산은 주로 자산관리공사와 예금보험공사가 매각하는 금융권의 부실자산들이었다. 
 론스타는 미국에서도 연방예금보험공사가 매각하는 부실자산을 인수해서 짭잘한 수익을 올렸던 경험을 십분 발휘해서 우리나라의 부실채권 시장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이 때 대표적으로 인수했던 회사가 강남의 스타타워(현재는 강남 파이낸스 센터로 이름이 바뀜)와 극동건설이었다. 스타타워는 론스타 펀드 3호가 인수했고 극동건설은 (후에 외환은행을 인수하게 될) 론스타 펀드 4호가 인수했다. 이들은 비록 겉으로는 다른 펀드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모두 그레이켄의 직접적 지배하에 있다는 점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특수관계인이었다.
 
론스타 펀드 3호와 4호가 서로 특수관계인이라는 사실은 후에 론스타가 산업자본(비금융주력자)이라는 점을 입증할 때 대단히 유용한 논리적 바탕이 된다.  (론스타의 대리인들은 그동안 마치 3호와 4호가 별개의 회사인 것처럼 주장해왔다.그러나 2014년 2월에 공개된 ‘ 론스타의 대주주 적격성 심사에 관한 제2차 정보공개 자료’에 의하면 론스타는 스스로 3호, 4호, 5호가 자체적인 별도 내부 계약에 의해 연결된 동일체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론스타가2012년에 제기한 투자자 국가 소송(Investor State Dispute; ISD)의 내용 역시 3호가 관장하던 스타타워에 대한 조세 부과의 적절성과, 4호과 관리하던 외환은행 매각과정의 승인지연 문제를 함께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들 펀드가 모두 동일한 지배권 하에 놓인 특수관계인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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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실채권 인수업자에서 은행 사냥꾼으로 변신

 론스타가 우리나라에서 부실자산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매물로 나온 부동산이나 부실기업 인수에서 은행 사냥꾼으로 변신을 시도한 것은 2002년부터이다. 은행 경영이 론스타의 특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론스타가 이런 변신을 모색한 이유는 아마도 2000년대가 들어서면서 IMF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이 어느 정도 완결되면서 시장에 나오는 부실자산 매물이 부쩍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는 초기의 공적 자금 투입이 마무리되고 오히려 공적 자금의 회수가 중요한 정책적 목표로 부상하던 시기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표적인 금융기관이 은행이었으므로 은행들이 매물로 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에 따라 론스타도 은행 사냥꾼으로 변신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은행들은 몇 차례에 걸쳐 외국의 사모펀드에 매각되었다.  1999년 12월에 제일은행이 뉴브리지캐피탈에 매각되었고, 2000년 9월에 한미은행이 칼라일에 매각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사모펀드인 론스타가 은행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부분이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은행에 대해 금산분리(separation of banking and commerce) 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많은 제조업 회사들을 거느린 외국의 사모펀드들이 버젓하게 우리나라 은행을 살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은행법이 만들어 놓은 거미줄보다도 더 복잡한 미로를 조금 걸어보는 수밖에 없다. 이 당시 우리나라는 내국인은 은행주식을 4%까지만 보유하도록 제한하는 반면, 외국인에 대해서는 금융감독위원회의 승인을 얻는 경우 은행주식을 최대 100%까지도 소유할 수 있도록 문호를 열어 두었다. (즉 이때는 명시적으로 국내 자본이 역차별을 받는 시기였다.)  그런데 금감위의 승인조건은 시행령에 규정되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외국인이 금융회사 또는 금융지주회사일 것을 요구하였으나(시행령 제5조), 부실기업의 정리 등 부득이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이 조건을 면제해 줄 수도 있었다. (시행령 제8조)
 이 조항이 현실에서 적용되는 과정을 보면, 뉴브리지캐피탈은 사모펀드이기 때문에 금융회사가 아니었지만 제일은행이 공적자금이 투입된 부실은행이어서 인수할 수 있었고(시행령 제8조 적용), 한미은행의 경우에는 칼라일이 억지로 JP모건과 5대5로 합작하는 모양새를 취해서 금융회사로 인정받아 한미은행을 인수할 수 있었다. 론스타가 은행 사냥꾼이 될 결심을 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제도적 허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 하나은행과의 끈질긴 인연
 론스타가 눈독을 들인 은행은 한미은행 이후 2002년에 매물로 나온 서울은행이었다. 서울은행은 공적자금이 투입된 부실은행이기 때문에 은행법 시행령 제8조의 예외조항에 힘입어 사모펀드인 론스타도 인수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입찰과정에서 나타난 경쟁자는 하나은행이었다. 하나은행은 1971년 기업어음을 할인해 주던 단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이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91년 업종 전환을 통해 은행으로 설립된 회사로서, 유사한 업종 전환을 거쳐 탄생한 보람은행을 합병하여 조금씩 몸집을 불려 나가던 중이었다. 서울은행 인수를 둘러싼 론스타와 하나은행간 각축적은 그야말로 막상막하였다. 최후의 반전은 입찰 마감 이후 론스타가 당초 조건보다 더 파격적인 인수조건을 제시한 사건이었다. 강하게 반발하던 하나은행도 결국 당초의 인수조건을 완화한 새 조건을 제시했다. 시장의 일반적 평가는 론스타 쪽의 인수조건이 조금 더 정부 측에 유리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승자는 하나은행이 되었고, 론스타는 분루를 삼켜야 했다. 그리고 2002년 하반기부터 다시 새로운 사냥감으로 물색한 은행이 바로 외환은행이었다. 한국 금융 역사상 최대 비극의 서막은 이렇게 열리게 된 것이다.  (론스타가 서울은행을 놓친 후 외환은행이라는 새로운 사냥감을 찾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회사는 바로 하나은행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10년 후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다시 하나금융지주에 팔고 이 땅을 탈출했으니 이 두 회사의 인연은 참으로 기이하고 끈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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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0시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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