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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허세 품성의 허세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5년09월07일 17시54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6일 20시37분

작성자

  • 국중호
  • 요코하마시립대 경제학 교수

메타정보

  • 37

본문

돈의 허세 품성의 허세

 

 

 한국 동전과 공중전화

500, 100, 50, 10, 5, 1원 짜리 동전을 만들어 놓고 별반 쓰이지 않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선 계산상 일부 동전이 쓰이기는 합니다만, 음식점을 비롯한 보통의 거래에선 1,000원 단위가 되어버렸습니다. 잔챙이 돈에 그리 구애받지 않는 통큰 한국이라 할까요? 아니면 세심하지 못하고 정확성이 떨어진다 할까요? 1엔(약 10원) 짜리 동전까지 꼭꼭 챙기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적응되어 와서 그런지 한국에 가면 당황스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저를 쩨쩨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구미(유럽∙미국)의 음식점에서도 유로나 달러 지폐와 함께 동전도 사용합니다. 

우리 주변엔 어딘지 모르게 미어져 나오는 엉성함이 있습니다. 공중전화 예를 들어보지요.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어 이젠 공중전화가 장식용인지 비상용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70원 요금의 공중전화인데 정작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현 10원짜리 동전은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교통카드로 전화걸 수 있는 곳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대개는 구형카드나 동전식 공중전화만이 휑하니 설치되어 있습니다. 엉거주춤입니다. 지진이 많은 일본에서 비상대피소로 이용하는 공원이나 그 근처에는 공중전화가 있고 비상연락 수단으로도 사용합니다.

 

돈의 허세 그리고 샌드위치 신세 

같은 돈이라도 불안한 사회와 안정된 사회에선 그 씀씀이에 대한 감도가 크게 다릅니다. 돈쓰기에 허세가 많은 곳이 한국입니다. 일본 돈 1만엔이 한국 돈으로 대략 10만원이 됩니다. 제가 한국에서 10만원을 쓸 때와 일본에서 1만엔을 쓸 때를 비교하면 일본에서의 1만엔이 주머니 속에서 훨씬 느루(오래)갑니다. 한국의 소비성향이 강하다고 하겠지만 돈이 헤프게 없어지니만큼 돈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커져 불안함이 들어앉습니다. 하여, 행여 돈된다 싶으면 물불 안가리고 덤벼들려는 욕심이 앞서는지 모르겠습니다. 남보다 빨리 채간 사람이 과시할라 치면 또 다른 이가 더 빨리 채가거나 독점하려 합니다. 그렇게 앞다투어 나아가려다 보니 차분히 돌아볼 겨를도 없습니다.

‘공정하고 정확하게 셈합시다’ 하는 사람은 통이 작아 보이고 더러는 답답하다고 여겨지면서 배제당하기도 합니다. 통크게 사는 것은 멋들어진 삶입니다. 하지만 통만 커서는 허울만 멀쩡할 뿐 알맹이가 없습니다. 통도 크면서 정확성도 있어야 합니다. 통크기로 치면 만리장성을 쌓은 중국을 당할 수 없고, 정확성에서는 섬세한 기술강국 일본을 못 당합니다. 일본은 쌓아놓은 부(富)로 연구개발(R&D) 투자와 기업매수를 늘리고 있는데, 한국은 갖고 있는 부(富)도 적을 뿐더러 스마트폰 이후의 먹거리도 아직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샌드위치론(중국∙동남아와 일본 사이에 낀 한국)으로 위기감을 환기시키던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병석에 누워 있습니다. 샌드위치론은 맞아떨어져 더욱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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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성의 허세

솔직하게 인정하고 승복하려 하지 않는 심통부림이 세상살이를 사납게 만듭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집니다. 아직 황새가 되지 않았는데 황새인 양 착각하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합니다. 가장 큰 한국병은 역시 남과 비교하며 그에 미치지 못하면 자존심 상해하는 ‘체면병’입니다. 못살던 개발시대는 잘사는 사람과 비교하며 나도 잘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일하였으니 긍정적인 면이 컸습니다. 이제 살만하게 되자 남처럼 명품을 사야 하고 큰 차를 타야 하고 넓은 집에 살아야 체면이 선다는 쪽으로 고질화되는가 싶어 심히 우려됩니다. 품성의 허세가 체면병입니다. 

체면병의 병폐는 협조가 아닌 ‘배제’논리의 만연입니다. 자신보다 떨어지는 사람한테는 ‘무시하는 배제’가 있고, 자기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진 사람한테는 ‘시기하는 배제’가 있습니다. ‘끼리끼리 문화’가 스멀스멀 세력을 넓혔고 그 ‘끼리’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없는 사람이건 있는 사람이건 내면의 공유로 두루두루 보람을 주는 흐뭇한 문화를 몰아냅니다. 서로간을 소중히 키워가는 의식이 성숙되어야 하는데 그 여건조성이 참으로 미흡합니다.

 

백 잡고 줄 따라 가기

한 때는 한국의 ‘빨리빨리’ 정신이 정보기술을 발전시켰다고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빨리빨리’의 국민성은 생동감을 불어넣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대충대충 지나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대충대충’은 해당 분야에 대해 조금 파내다보면 밑천이 금방 드러납니다. 조상들이 만들었던 고려청자를 후손인 우리가 재현할 수 없는 나라로 변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대충해 놓고 남보다 빨리 ‘백 잡고 줄 따라 가기’에 급급해 ‘공통선(善)’을 위한 공감대 형성이 어렵습니다. 전체를 보는 눈이 약해 답답한 일본인들이지만 그래도 그들한테는 한 우물 파는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백이나 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명암이 갈리는 사회는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의 양극화가 심해집니다. 생존경쟁이니 살아남아야 한다 하더라도, 정직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빈익빈으로 되는 비애감을 느끼게 되면 진이 빠져 살맛이 없어집니다. 몸부림쳐도 나락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질 때 두렵고 불안해지며, 그 정도가 심해지면 자살충동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한국은 자살왕국이기도 합니다. 통계청 『사망원인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자살자(2013년 14,427명)는 인구 10만명당 28.5명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12.1명, 2012년) 국가 중 자살 사망률이 가장 높습니다. 부끄러운 수치입니다. 머리를 식히며 자신을 돌아보는 장소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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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으로 오세요

『사서(司書)를 위한 홍보활동』(Public Relations for Librarians)의 저자 로버츠(Anne F. Roberts) 씨는 “자신을 쏘아죽이고픈 충동을 느낀다 해도 그러지 마라. 대신 도움을 찾아 도서관으로 오라(If you feel shooting yourself, don’t. Come to the library for help instead.)”고 말합니다. 미국 도서관에 붙어 있던 이 구절을 참조로 일본 가마쿠라(鎌倉) 중앙도서관의 가와이 마호(河合真帆) 사서(司書)가 트위터에 올린, “학교에 가는 것이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아이는 도서관으로 오세요” 라는 문구가 크고도 잔잔한 반향을 불러왔습니다(2015년 8월 27일자 아사히(朝日)신문). 학교만이 아니라 집이나 직장에서 잠시 벗어나 편안하고 아늑함을 주는 도서관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봅니다.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 책도 읽지 않는 민족은 쇠합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골똘히 사색하며 책읽는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는 사회로 변해갑니다. 도서관의 역할이 그만큼 줄어들었다고 쉽게 치부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만, 정반대여야 한다고 봅니다. 책만을 쌓아놓는 곳간이 아니라 비밀과 사색의 안전을 보장하는 쉼터로서 도서관 역할이 커졌으면 합니다. 스마트폰을 접어두고 명상을 하거나 좋은 책 읽고 내공을 쌓으며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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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6년02월26일 20시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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