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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4 북량(I.끝)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4월25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4월25일 13시48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4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51] 북위 탁발도의 분노(AD432)

 

이순이 돌아오자 탁발도는 북량의 상황을 물었다. 이순이 이렇게 대답했다.

 

  “ 저거몽손이 하서지역을 삼십년 통치하면서 제법 임기응변을 알고 있었습니다.

    변방지역의 오랑캐들을 잘 다스렸으며

    군사들과 관료들을 잘 통제하였습니다.

    비록 후손에게 물려 줄 튼튼한 체계는 없을지라도

    한 세대를 안정적으로 마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는 덕을 싣는 수레이고

    경은 몸의 토대라 할 것인데

    저거몽손이 불손하고 무례하므로 

    보기에 해를 넘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탁발도가 물었다.

 

  “ 아들들은 어떻던가? “

 

이순이 느낀 점들을 예기했다.

 

  “ 저거몽손의 아들들은 거의 모두 평범하였습니다.

   다만 돈황태수 저거목건은 그릇과 품성이 대체로 서있어서

   대를 이을 사람은 이 자 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에 비한다면 비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아마도 하늘이 폐하를 돕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거몽손은 영특한 재주를 지닌 사문 담무참이라는 사람을 대단히 중시하여 ‘성인’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스스로 귀신을 부린다고 했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과 신비한 도술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여러 자녀들을 담무참에게 보내 도술의 영험을 받게 하고 또 그 기술을 전수받도록 했다. 탁발도가 그 소식을 듣고 담무참을 불러 평성(산서성 대동)으로 징소했다. 저거몽손은 머뭇거리며 보내지 않다가 담무참을 죽여버렸다. 탁발도는 매우 격분하였다. 

 

[52] 저거몽손의 사망(AD433)

 

저거몽손의 신하들은 거칠고 의심 많고 잔혹한 주군을 매우 꺼리고 괴로워하였다. 저거몽손이 심하게 아프게 되자 신하들이 함께 후사를 의논하였다. 세자 저거보제는 연약하였으므로 중론은 저거목건으로 기울었다. 형인 저거목건을 세자로 삼고 중외도독, 대장군 및 녹상서사로 삼았다. 저거몽손이 죽자 저거목건이 대를 이었다. 이 때 저거몽손의 나이는 65세 였다. 

 

북위 탁발도는 이순을 보냈을 때 저거몽손의 딸 흥평공주를 처로 맞기로 했었는데 저거몽손이 죽자 저거목건이 사신 송요를 보내 선왕의 뜻이니 무시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누이동생을 북위로 보냈다. 탁발도는 그 여자를 우소의로 삼았다(14년 뒤에 자결을 강요 당함)   

 

탁발도는 이순의 예견력을 높이 샀다. 저거몽손이 곧 죽을 것이라는 것과 저거목건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 꼭 들어맞았다. 이순에게 큰 상을 내림과 동시에 직책을 올려 안서장군으로 삼았으며 대소사를 모두 그와 함께 의논하면서 그를 총애했다. 

 

저거목건에게는 도독양사하삼주서역강융제군사라는 직과 함께 거기장군, 개부의동삼사, 양주자사 및 하서왕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저거목건은 공로도 없는데 높은 상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순에게 부탁하여 사양했다. 탁발도는 허락하지 않았다.

 

저거목건은 돈황있을 때 알게 된 유병을 우대하여 국사로 삼고 친히 절을 하며 받들었고 모든 신하들에게 존경의 뜻으로 유병에게 북면하도록 명령했다.    

 

저거목건은 건강의 유송에 사신을 보내 아버지의 죽음과 하서왕 왕위를 이어받은 것을 알려왔다. 유송 황제 유의륭은 조서를 내려 저거목건에게 도독양진등사주제군사라는 직책을 내리고 하서왕, 정서대장군의 벼슬을 하사했다.(AD434)

 

[53] 돈황의 괴문서(AD435)

 

어떤 사람이 돈황의 동쪽 문에다 편지를 써서 붙였는데  이렇게 써있었다.

 

  “ 양왕의 30년은 7년과 같다.(凉王三十年若七年)” 

 

무슨 뜻인 알쏭달쏭한 저거목건이 봉상 장신에게 뜻을 물어보았다.

 

장신이 대답했다.

 

  “ 옛날 괵이라는 나라가 장차 망하려고 할 때에

    하늘에서 신이 신(莘,삼문협 부근)이라는 지역에 내려왔었습니다.  

    페하께서는 덕을 숭상하시고 바른 정치를 하시면 30년 치세를 누리실 것이고

    사냥이나 다니시면서 술과 여색을 가까이 하시면 

    7년 안에 변고가 생길까 두렵습니다.“ 

    

저거목건은 매우 불쾌했다.

 

[54] 누이 무위공주를 저거목건의 처 삼음(AD437)

 

북위황제 탁발도는 누이동생 무위공주를 하서왕 저거목건에게 주어 처로 삼게 하였다. 하서왕은 감사의 뜻으로 송요를 평성으로 보냈다. 문제는 무위공주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 것이 골치였다. 의논 끝에 무위공주는 하서왕의 비니까 현지에서는 왕비라고 불러야 하지만 동시에 황제의 동생이므로 태후라고 부르고 다만 북위 수도 평성에서는 태후라고 부를 수 없으니 공주라고 부르기로 했다. 

 

원래 저거목건은 서량의 이고의 딸을 아내로 삼았었다. 북위의무위공주가 새로 들어오자 저거목건은 왕후 이씨와 그 어머니 윤씨를 주천으로 옮겨 살게 하였는데 얼마되지 않아서 이씨가 죽었다. 이씨의 어머니 윤씨는 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슬퍼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 너는 나라가 깨지고 집안이 망했으므로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지금 죽은 것은 늦은 것이다.“

    

저거목건의 아우 주천태수 저거무휘가 윤씨에게 물었다.

 

  “ 여러 손자들이 살고 있는 이오(신강위구르 자치구 하밀시)로 가시겠읍니까?”

 

윤씨는 겉으로 거절했다. 그리고는 몰래 이오로 달아났다. 저거무휘가 기병을 보내 추격하여 윤씨를 사로 잡았다. 윤씨가 기병에게 물었다.

 

  “ 저번에 저거무휘가 내게 이오로 가서 살라고 했는데

    이제 나를 사로잡는 것은 무슨 까닭이야? 

    내 머리를 잘라 가려면 자르거라.

    나는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기병대는 되돌아갔다. 윤씨는 이오에서 여생을 마쳤다.

 

[55] 저거목건의 패륜(AD439) 

 

저거목건은 형수 이씨와 간통을 하였고 그의 형제들 또한 돌아가며 이씨를 범했다. 이씨는 저거목건의 누나와 함께 위나라 무위공주를 독살할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닿앵이 탁발도가 급히 해독사를 보내 생명을 구하고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탁발도는 이씨를 평성으로 불러 소환했다. 저거목건은 이시를 보내지 않고 오히려 후한 물자를 주어 주천으로 모내 살게 했다.

 

탁발도는 여러 차례 서역으로 사신을 보내었는데 그럴 때마다 가는 길목에 있는 저거목건에게 조서를 내려 필요한 물자와 안내자를 징발하도록 하였다. 사자가 무리가 무위에 당도했을 때 저거목건의 측근들이 북위 사자에게 말했다.    

 

  “ 우리 주군이 요즘 연연(유연, 몽고 북쪽의 유목민족국가)의 망언을 전해 듣고 이렇게 

   말하였소. ‘북위 천자가 나(유연왕)를 공격하러 왔다가 군사와 군마들이 병사 떼죽음을      당했고 그의 동생 낙평왕 탁발비가 내 포로가 되었다.’

   우리 주군은 그 말을 전해 듣고 온 나라에 그 소식을 퍼뜨리고 있소. 

   게다가 유연이 서역에 사람들을 보내 곧 북위가 쇠약해지고 자기가 강성해 질것이니

   만약 북위의 사신이 오면 공물을 바치지 말라고 하였다고 하오.

   이 때문에 서역 사람들의 민심이 매우 흔들리고 있는 것 같소.“

 

사자들이 조정으로 돌아와 들은 바대로 보고했다. 탁발도는 다시 하다라라는 사람을 북량으로 보내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하다라가 돌아와 저거목건은 겉으로만 신하의 예를 바칠 뿐 속 마음은 다르다고 보고했다.

 

탁발도는 북량을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충신 최호에게 물었다. 최호는 대답했다.

 

  “ 저거목건의 내심이 반역인 것은 분명하니 반드시 토벌해야 합니다.

    저들은 우리가 유연공격에 실패한 것을 가지고 기대에 부풀어 있으니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그들을 습격하면  

    그를 사로잡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56] 북위의 북량 함락(AD439)

 

탁발도도 수긍했다. 그러나 탁발도의 맹장 해근은 그곳이 공격하기가 힘든 곳일 뿐만 아니라 돌밭이며 들판도 황량하여 약탈할 것은 물론 말 먹일 풀도 제대로 없을 것이라고 반대했다. 이 때 총신 이순이 나섰다.

 

  “ 그 지역은 돌투성이에다가 

    물이 부족하여 눈 녹은 물이 전부입니다.

    만약 그들이 도랑을 막아버리면 물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해근의 말이 옳습니다. “ 

사실 이순은 여러 번 북량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저거목건에게 많은 뇌물을 받아먹은 사람이었다. 최호 또한 그런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탁발도에게 이순을 믿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여러 번 지적한 바 있었다,. 탁발도는 이순과 최호에게 대질토론을 시켰다.

 

최호가 이순에게 이렇게 말했다.

 

  “ 한서 지리지에 천하에 으뜸갈 만큼 그곳 가축이 풍요롭다고 했소. 

   물과 풀이 없다면 어떻게 그렇게 되었겠소.

   한나라 사람들은 물과 풀이 없는 곳에 절대로 성을 쌓은 적이 없소” 

 

이순이 대답했다.

 

  “ 나는 내 두 눈으로 보고 하는 말이요. 

    어찌 듣고 읽기만 한 사람과 함께 토론 할 수가 있겠습니까? ”

 

최호가 말했다.

 

  “ 남의 돈을 받고 그를 위해 유세하면서

    오직 가보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속이려고 든다면 우리를 속일 수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   

 

황제가 두 사람의 토론 모습을 보다가 해근의 표정을 보았으나 그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모두 나가자 비서 이발이 이렇게 말했다. 

 

  “ 만약 물과 풀이 없다면 

    어떻게 나라가 셍길 수가 있었겠습니까? 

 

옳다고 느낀 탁발도는 6월 대군을 이끌고 북량정벌에 나서면서 저거목건에게 최후통첩했다.

 

  “ 친히 신하를 대동하고 나오면 최상책일 것이요,

    육군이 도착하고 나서 면박여친 한다면 차책이다.

    만약 성을 지키려고 반항하다가는 자신과 온 가족과 친족들이 몰살 당할테니

    다복한 방법을 스스로 찾기 바란다.“ 

 

다급한 저거목건은 유연에게 구언을 요청함과 아울러 강력한 수성 작전을 펼쳤다. 북량정벌군을 이끌고 가던 길에 흐르는 물과 널려있는 초원을 본 탁발도는 최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 경의 말이 맞았소.”

  

최호가 이렇게 대답했다.

  “ 신이 드리는 말씀은 감히 거짓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들도 다 그랬습니다.(臣之言不敢不实,类皆如此) “

 

열 갈래로 나누어 진군한 북위의 대군은 AD439년 8월 북량 수도 고장(감숙성 무위)에 도착하고 포위했다. 그리고는 부장 원하에게 북량을 빼앗는 방법을 물었다. 운하가 대답했다.

 

  “ 고장성 부근에는 4부의 선비족 무리가 있는데

    모두 신의 조부의 백성들입니다.

    제가 북위 대군의 앞장을 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이롭고 복이 되는 지를 깨우치면

    그들은 다투어 항복할 것입니다.

    고장 주변 백성들이 투항하게 되면 고장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손바닥을 엎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

 

탁발도는 원하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면서 모든 군사의 선봉에 서게 하였다. 

 

북위의 대군이 몰려 오자 저거목건은 일단 유연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동생 저거동래에게 1만 군사를 주어 성을 방어하게 했으나 싸움도 하지 않은 채 도망가다가 패배 당했다. 그러나 북위의 장수 유혈은 그 날의 일진이 좋지 않다는 점쟁이 말을 믿고 추격하지 않았으므로 저거동래의 군사는 무사히 성안으로 피신할 수가 있었다. 저거목건은 유연이 북위의 배후를 공격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북위 군사들도 퇴각할 것이라고 믿고 성을 굳게 닫고 버텼다.

 

버티던 저거목건의 조카 저거조가 항복했고 고장성을 지키던 조카 저거만년도 9월 25일 군사를 이끌고 북위에게 투항했다. 고장성이 무너졌다. 그제서야 저거목건이 백관신하들과 5천 군사를 이끌고 면박여친 투항했다. 탁발도는 면발을 풀어 주고 예우해 주었다. 성 안의 20여 만 호구를 거두었고 창고의 진기한 보물을 모두 접수했다.

 

북위는 해권을 보내 장액을 공격하게 하였고 봉답은 낙도를 침략하게 하였다. 북량의 여러 지역을 지키고 있던 장수들은 모두 도망가거나 투항해 들어왔다. 10월 고장지역을 아들 낙평왕 탁발비와 하다라에게 맡기고 탁발도는 동쪽으로 돌아 왔다. 탁발도는 여전히 저거목건을 매부로 대접했고 하서왕의 칭호를 계속 사용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저거몽손이 AD397년 건국한 북량은 40년 만인 AD439년 2대 저거목건 때에 북위에게 멸망당했다. 

 

[57] 북량 멸망의 원인 : 무지와 오만

 

AD383년 11월 전진의 부견이 회하지류 비수에서 동진의 사현에게 참패하면서 황하 이북의 중국은 다시 혼돈의 시대로 빠져 들었다. 북중국을 거의 통일했던 전진의 리더십이 무너지면서 곳곳에서 나라가 깨어져 나가면서 분열되었다. 전진의 영토는 요장이 세운 후진(AD384), 모용수가 세운 후연(AD384), 걸복국인이 세운 서진(AD385), 여광이 세운 후량(AD386), 그리고 탁발규가 세운 북위(AD386) 등으로 쪼개져 나갔다. 이 여러 나라 중에서도 당시 가장 강한 나라는 전진을 멸망시킨 요장의 후진이었다. 후진의 요장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여러 나라로 분열된 북중국의 종주국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AD393년 후진의 요장이 사망하면서 북중국은 다시 혼돈의 분열 상태로 들어갔는데 AD400년을 전후하여 북중국은 여섯 나라, 즉 독발오고가 세운 남량(AD397), 단업과 저거몽손이 협력하여 세운 북량(AD397), 이고가 세운 서량(AD398), 초종이 세운 서촉(AD405), 혁련발발이 세운 하(AD407), 그리고 후진을 흡수(AD417)한 가장 강력한 북위가 각축전을 벌인 것이다.

 

북량을 세운 저거몽손은 계산이 매우 빠른 간교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촌 형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고 적을 유도하기 위해 온갖 거짓전략을 뿌리기를 즐겨한 사람이다. 유가적인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인 야만적 흉노 장수였지만 당시 환경으로 보면 그다지 놀랄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한 나라를 세워 약 40년 동안 감숙성 고장지역을 통치한 영웅임에는 틀림없다.       

 

저거몽손의 북량이 AD400년을 전후하여 강력하게 부상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원인은 숙적인 남량의 독발오고(AD399)와 후량의 여광(AD400)이 연이어 사망했던 때문이다. 이 두 영도자들이 사망하면서 남량과 후량 조정이 크게 흔들렸고 그 틈을 타서 북량이 영역을 크게 확장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요장의 죽음으로 흔들리던 후진은 요장 못지않은 영웅 요흥이 나라를 계승하면서 주변국들을 다시 흡수하기 시작했는데 서진이 AD400, 후량이 AD401년 후진에게 항복하고 멸망당했다. 북량도 강력한 후진에게 대항할 생각을 버리고 AD403년 후진에게 복속하겠다고 약속했다. 후진의 요흥이 북쪽 하나라의 혁련발발에게 끊임없이 침략을 당하는 AD407년을 전후하여 하서지역, 즉 북량과 남량에 대한 후진의 장악력은 급격히 떨어졌는데 이때부터 남량과 북량은 쉴 새 없는 영역싸움을 지속하였다. 남량은 북위와 연대를 했고 북량은 하나라와 동진과 연합하였다. AD414년 남량이 갑작스레 서진의 걸복치반에게 멸망당하자 북량은 서진과의 전투를 지속하였다.         

 

잔꾀가 많은 저거몽손은 AD423년 서진의 영도자 걸복치반을 암살할 계획까지 꾸몄지만 얼마 있지 않아서 걸복치반은 병사하게 된다.(AD428) 문제는 저거몽손이 안하무인 무례함이었다. 북위 탁발도가 보낸 사신을 업신여기면서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북위의 힘을 과소평가하면서 탁발도의 분노를 쌓게 만들었다. 서진(AD431)은 물론 하나라(AD431)까지 멸망시킬 북위의 힘을 너무 가볍게 본 것이다. 아무리 잔꾀가 많은 저거몽손일지라도 북위의 힘을 버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저거몽손에 비할 바도 안 되는 아들 저거목건으로야 어떻겠는가. 잔꾀와 요행으로 한 나라를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큰 흐름, 즉 북위라는 초강대국의힘과 저력에 대해 무지하고 오만했던 북량은 건국 40년 만에 망하는 운명을 자초한 셈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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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4월25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4월25일 13시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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