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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3 : 여광 일인국가 후량(J)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2월14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2월13일 17시4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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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42) 후량 여륭의 공포정치와 실덕(AD401)

 

4대 후량왕 여륭은 호방하고 영리하며 명망있는 인재들을 많이 죽여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했다. 세상은 두려워 떨었고 틈만 있으면 다른 나라로 도망가려고 했다. 초랑이라는 사람이 후진의 농서공 요석덕에게 사람을 보내 유세했다.

 

 “ 여씨는 무황제(여광)이 죽으면서 형제가 서로 헐뜯고 싸우고 있습니다.

   정치는 흐트러지고 강령은 세울 생각도 않고 있어서

   폭정으로 죽은 백성은 절반이 넘습니다.

   지금을 틈타면 나라를 빼앗는 것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쉽습니다.“

 

요석덕은 진왕 요흥에게 말하여 즉각 보병과 기병 6만을 동원하여 후량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후진에 망명 와있던 걸복건귀는 기병 7천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43) 후진의 후량 고장 포위(AD401)

 

6만 대군의 후진 요석덕이 난주에서 황하를 건너 북상했다. 광무(감숙성 영등)의 독발이록고는 후진 대군을 피해 물러났다. 고장에 있는 후량의 방어군은 여초와 여막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요석덕군에게 참패하였고 여막이 이 때 사로잡혔다. 여륭은 견고한 고장성을 지키며 버티고 있었다. 파서공 여타는 2만 5천 군사를 가지고 후진 요석덕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강력한 줄 알았던 후량이 후진의 공격에 어이없이 무너지자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다투어 후진에게 복속해 들어왔다. 이고의 서량, 독발이록고의 남량 그리고 저거몽손의 북량이 한결 같이 후진에 충성을 맹세했다.

   

(44) 후량의 장수 강기(AD401)

 

후진 내부에서 여초 쿠테타가 있었을 때 후량의 장수 강기가 독발이록고에 몸을 의탁해 왔다. 독발이록고의 동생 독발욕단은 강기의 재능과 학식과 인격에 감탄하여 가까이 두고서 전략과 정치를 상의했다. 독발욕단이 움직일 때마다 같이 수레를 탔으며 밤낮으로 담론을 이어갔다. 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 가깝다고 생각한 독발이록고가 동생 독발욕단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 강기는 믿음이 가고 훌륭한 재주를 갖고 있음이 틀림없소.

  그러나 사람 됨됨이가 비상하여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을 것 같으니 

  그를 죽이는 것만 못할 것이요.

  그가 후진으로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사람들의 우환이 될 것이 분명하오.“

 

독발욕단이 말했다.

 

 “ 신은 포의를 입은 입장에서 강기와 교제하고 대우하는 것입니다.

   제가 살핀 바로는 강기는 반드시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 있지 않아서 강기가 후진 요석덕에게로 도망가서 유세했다.

 

 “ 여륭이 고립된 상태에서 장군의 대군의 공격을 받았으므로 

   반드시 항복을 받아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서로만 항복할 뿐 속으로는 결코 항복할 의사가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제게 군사 3천을 주시면 

   여륭을 사로잡는 것은 문제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쪽의 독발씨 군대가 강하고 물자가 풍부함으로

   그들이 고장을 차지하게 되면 남량의 위세는 커질대로 커지고 

   거기에다가 이고의 서량과 저거몽손의 북량까지 거두게 된다면

   후진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과 위협이 될 것입니다.“

 

요석덕이 그 말을 믿고 무위태수로 삼고서 군사 2천을 붙여주었다.   

 

(45) 후량 여륭의 후진 항복(AD401)

 

후진의 요석덕이 고장을 포위한 지 여러 달이 되자 고장 성 안에 있는 동쪽 사람, 즉 고향이 중원지역인 사람들이 성 내에서 반란을 일으킬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 중심에 위익다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사람들을 모아서 주군 여륭과 여초를 죽인 다음에 후진에게 항복하자는 계획이었다. 그 계획이 드러나 죽은 사람이 300여 명이 넘었다. 그 소문을 들은 요석덕은 성내에 있는 여러 이민족을 꾀어 소동을 부추겼으나 성내 결속력이 더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곡식을 아끼고 숨어있는 양식을 모아 끝까지 버틸 심산이었다.

 

성내 여러 신하들은 후진과의 화의를 재촉했지만 여륭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마침내 안정공 여초가 나섰다.

 

 “ 지금 비축해 둔 양식이 거의 고갈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위아래가 불안해하며 시끄럽고 소란합니다.   

   장량과 진평이 다시 태아난다 한 들 

   이런 상태에서는 다른 계책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임기응변하셔서 태도를 바꾸시고 굽히셔서

   모두의 안위를 생각하셔야합니다.

   어찌 한 장의 쪽지와 한 사람의 사신으로써 적을 물리치고

   평화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마다하십니까?

   적이 물러 간 이후에 덕치를 하셔서 백성을 편히 쉬시게 하시면

   예전의 대업이 어찌 다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무작정 웅크리고 있으면 장차 모두가 사라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륭이 마침내 여초의 말을 따라 후진 요흥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의 의사를 전달했다. 요석덕은 요흥에게 청하여 항복을 요청한 여륭에게 진서대장군, 양주자사, 건강공으로 삼게 하였다. 여륭은 아들, 아우 및 측근 신하 50여 가문을 인질로 삼아 장안으로 보냈다.

 

(46) 후진과 북위의 대립과 요홍의 태자옹립(AD402)

 

이제 황하 이북지역은 요흥의 후진과 탁발규의 북위 두 나라만 남아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탁발규는 말 1천 필을 하적간에게 붙여 요흥에게 보내 딸을 배필로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요흥(AD366-AD416)은 북위 탁발규(AD371-AD409)가 이미 2년 전 후연 모용보의 딸을 황후로 취한 뒤였음을 알고 하적간을 가두어버렸다. 북위는 하적간이 포로로 잡힌 것을 알고 후진의 변경을 침략하고 대대적으로 군사와 군량을 비축하면서 평양(산서성 임분)을 거점으로 남침을 준비하였다.

 

북위의 상산왕 탁발준은 먼저 고평(영하 고원)에서 후진을 쳐들어 왔다. 그 지역을 수비하던 후진의 몰혁간과 유발발은 진주(감숙성 천수)로 후퇴했다. 탁발준은 점령한 지역의 포로를 모두 붙잡아 북쪽으로 이주시켜버렸다. 후진의 동쪽 하동(산서성 하현)과 서북쪽 고평으로부터 북위가 쳐들어오자 후진도 병사를 징발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며 장차 있을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북위와의 한 판 대전을 준비하던 요흥은 만일에 대비하여 열 네 살짜리 아들 요홍(AD388-AD417)을 황태자로 책봉하면서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다. 요홍은 학문을 좋아하고 온순하며 관대하고 효성이 깊었으나 한 가지 흠은 군사적인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고 또 잔병치레가 많았다. 후계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하던 요흥은 결국 요홍을 세우기로 결단한 것이다.  

 

(47) 후진-북위의 전투 : 시벽(柴壁)의 전투(AD402)

 

AD402년 봄 요흥은 의양공 요평과 상서우복야 적백지를 보기병 군사 4만과 함께 보내 북위 정벌하도록 했다. 요흥 자신 또한 군사를 이끌고 선봉장의 뒤를 이었다. 몰혁간 군사는 천수에 주둔하고 요흠은 낙양에 진을 치며 만일에 대비했고 태자 요홍과 상서령 요황은 수도 장안을 지켰다. 북위 또한 전쟁을 꾸준히 준비해 온 터라 즉각적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북위의 선봉에는 비릉왕 탁발순과 예주자사 장손비가 6만 기병을 앞세워 진격했고 주군 탁발규는 더 많은 대군을 거느리고 탁발순의 뒤를 받쳐 주었다.

 

북위의 대군이 영안(산서성 곽주)에 도착할 무렵 후진의 선봉장 요평은 2백 기병을 보내 북위군을 직접 염탐하다가 전원이 사로잡혔다. 요평은 물러나 시벽(산서성 임분 서남)에 웅거하였다. 탁발규는 곧바로 추격하여 시벽의 요평 후진군을 포위했다.(AD402년8월9일) 요흥은 요평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4만 7천의 군사를 급히 보내왔다. 요흥의 계획은 임분의 동쪽 천도를 먼저 장악하므로써 포위를 펼친 북위군의 배후를 위협하자는 전략이었다.     

북위군은 이미 그 곳의 지형을 철저히 파악하여 요흥 군이 어디로 어떻게 올지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요흥 또한 북위군의 위세에 눌려 주춤주춤하면서 느릿느릿 북상했으므로 그만큼 북위군에게 대비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8월 28일 북위 탁발규는 3만 기병을 직접 인솔하고 좁은 협곡을 북상하는 후진군을 기습했다. 

 

[그림] 후진과 북위의 시벽전투(AD4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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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 지형은 양쪽으로 길게 산맥이 뻗어 있어서 매복습격에 매우 취약한 지형이었다. 후진군은 몽갱(산서성 양분) 남쪽에서 북위군에게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요흥은 후퇴했고 요평은 시벽에 갇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두 달이나 갇혀 양식과 화살이 다 떨어진 요평은 10월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뚫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전 장수들이 분수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탁발규는 수영을 잘하는 사람을 시켜 쇠갈고리로 자살하려는 장수를 건지려 했으나 대부분 익사하고 말았다. 탁발규가 사로잡은 후진군 포로만 2만여 명 이었다. 요평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흥과 그 군사들의 통곡 소리가 산과 골짜기를 흔들 정도였다. 요흥은 탁발규에게 화친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다른 일이 없었다면 탁발규는 군사를 몰아 장안으로 들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북위의 배후에 있던 유연이 북위를 공격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위험을 느낀 탁발규는 서둘러 군사를 수습하여 돌아갔다. <계속>

 

[그림] 후량(AD386-AD403) 왕조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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