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3 : 여광 일인국가 후량(G)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1월03일 16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1월02일 15시1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9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31) 독발오고의 취중낙마 사망(AD399)

 

남량의 무위왕 독발오고가 취중에 낙마사고로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죽게 되었다. 측근을 불러 이렇게 명령했다.

 

  “ 나이든 사람을 후계로 세우라! ”

  

독발오고의 유조에 따라 제일 큰 동생 독발이록고를 후계자로 세웠다. 독발이록고는 치소를 다시 낙도에서 서평(서녕)으로 옮겨왔다. 형님이 천도하고 나서 돌아가신 것이 불길하기도 하고 또 그동안 너무 빨리 영토를 확장하면서 본거지 서녕의 지배력이 불안하기도 했다.  

                

(32) 여광의 죽음과 당부 (AD400)

                     

후량의 창업자 여광이 병으로 위독했다. 이 때 여광의 나이는 62세 였다. 여러 형제들에게 태자 여소를 잘 돌봐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아들 여찬은 태위, 여홍은 사도로 임명했다. 그리고 특별히 여소를 따로 불러 당부했다.

 

 “ 지금 국가에는 어려움이 많다.

   세 주변 국가들이 틈새를 엿보고 있다.

   내가 죽으면 큰 형 여찬에게 6군을 통수하게 하고

   작은 형 여홍에게는 조정 정치를 맡겨라.

   너는 몸을 극도로 공손하게 하여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중요한 것을 모두 두 형에게 위임하기만 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제대로 잘 돌아 갈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내부 분란으로 조석 간 큰 변란이 닥칠 것이다.“

 

여광은 또 여찬과 여홍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 능력이 모자라는 영업(여소의 이름)에게 맡기는 것은

   적자를 세우는 법도 때문이라서 그런 것이다.  

   지금 외부에는 적들이 우글거리고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러나 너희 형제가 화목하기만 하면 우리 왕조의 복은 만세까지 떨칠 것이고,

   내부에서 서로 불화한다면 재난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니

   극히 조심하도록 하라.“

 

여찬과 여홍은 울면서 약속했다.

 

 “ 감히 그런 일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不敢)”

 

여광은 특히 여찬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

 

 “ 너는 성품이 거칠고 난폭하여 내가 심히 우려하는 바이다.

   영업을 잘 보좌하고 참소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말거라.“

 

그 말을 마치고 여광은 죽었다. 여소는 여광의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 형 여찬이 아버지 죽음에 곡을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나오자 여소가 다가가 자리를 형에게 양보했다.

 

 “ 형님은 공적도 높고 나이가 많으시니    

   마땅히 대통을 이으셔야 합니다.“

 

여찬이 사양하며 말했다.

 

 “ 폐하가 나라의 적자이신데 

   어찌 신이 그것을 범할 수 있겠습니까?“

 

여소가 여러 번 사양의 뜻을 밝혔으나 여찬 또한 끝내 받지 않았다. 표기장군 여초가 여소에게 은근히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여초는 여광의 조카로 여소의 사촌 형이기도 했다.

 

 “ 태원공 여찬은 여러 해 동안 장수로 있으면서 

   위엄이 안팎을 진동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 영구 앞에서도 큰 슬픔을 보이지 않고 

   또 걸음걸이가 당당한 것을 보면

   장차 다른 뜻을 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참에 제거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여소가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 먼저 돌아가신 황제의 유언이 아직 귀에 생생한데

  어찌 그런 끔찍한 말을 하는 것이요.

  나는 어린 나이에 나라를 물려받았으니

  두 형님께 의지하여 집안과 국가를 편안하게 할 따름입니다. 

  설사 나를 도모하려 한다고 해도 나는 죽음으로 맞을 것이지 

  차마 먼저 제거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담지 마시오 ! “

   

(33) 여찬-여홍의 쿠테타(AD400)

 

여찬이 여소를 알현하였는데 칼을 잡고 서서 여소를 호위하던 여초가 조용히 여소에게 권했다.

 

 “ 이때가 절호의 기회입니다.

   여찬을 체포하십시오.“ 

 

여소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낌새를 알아차린 여홍이 은밀히 상서 강기를 여찬에게 보내 말하도록 했다.

 

 “ 아무래도 주상은 어리석고 연약하여

   큰 어려움을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공적과 위엄이 뛰어나신 형님께서 서둘러 일어나셔서 

   사직을 바로 잡으시고 나라기반을 세우셔야 합니다. 

   작은 절개에 얽매이시면 안 됩니다.“

 

마침내 여찬이 결정했다. 밤에 장수와 병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궁성을 공격하고 여홍 또한 군사를 이끌고 궁성의 동쪽을 공략했다. 궁궐 대문을 지키던 좌위장군 제종이 여찬의 무리를 막아서며 외쳤다.     

 

  “ 어떤 놈들이냐?”

 

여찬의 무리들이 태원공이라고 하자 제종이 외치며 말했다.

 

 “ 나라의 변고가 생겨서 새 주상이 오르셨는데

   태원공의 행차가 집으로 가지 아니하고 

   궁궐로 난입한 것은 변을 일으키려는 것 아닌가!“

 

칼을 뽑아들고 여찬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려고 했다. 여찬의 무리들이 막고 제종을 사로잡았다. 여찬이 말했다.

 

 “ 의로운 사람이다.

   죽이지 마라. “

 

여소의 금위군과 여초의 수하 2천여 명이 달려 나가 여찬을 막았으나 모두들 여찬의 위엄에 눌려 저항하지도 않고 항복하고 말았다. 여소는 자결했고 여초는 광무(감숙성 난주 북쪽)로 달아났다.  

 

여찬은 비록 나이도 많고 또 혁혁한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당초 쿠테타 계획을 먼저 세운 것도 여홍이고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도 여홍이었으므로 왕위를 여홍에게 양보했다. 여홍도 사양하며 말했다.

 

 “ 행정수반으로써 여소를 세우는데 제가 간여 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황의 유지를 거역하고 다시 내려 앉힌 것은

   무리들의 마음이 따르지 않아서였습니다. 

   제가 어찌 형님을 앞서서 즉위하는 것이 제 본뜻이겠습니까? ”

 

마침내 여찬이 승낙하고 여홍에게 이렇게 밝히도록 했다.

 

  “ 먼저 돌아가신 선황의 유지가 이와 같다.”

 

여찬이 죽은 여광의 뒤를 이어 후량의 2대 군주가 되었다. 여홍에게는 대도독, 독중외제군사, 대사마, 사예교위 및 녹상서사라는 중책이 내려졌다. 군사와 행정과 황제호위와 행정견제의 모든 권한이 여홍에게 주어진 것이다. 광무로 도망갔던 여초가 편지를 보내와 용서를 빌었다. 여찬은 그의 무재를 높이 사서 사면하고 원래의 작위를 모두 회복시켜줬다.  

 

(34) 여홍의 쿠테타 실패(AD400)

 

비록 양왕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거의 모든 군권과 행정권이 여홍에게 귀속된 것에 대해 여찬은 불만과 의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여홍 또한 그런 여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여홍이 먼저 일어나 여찬을 공격했다. 여찬은 그의 심복 초변을 보내 반격에 나섰다. 여홍의 무리는 초변의 일격에 무너져 도망갔다. 여찬의 군대는 여홍의 근거지인 동원(말하자면 무위의 동쪽성)을 약탈시켜 그곳의 모든 물자와 사람을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그 안에는 여홍의 아내와 자식들도 있었다. 여홍의 쿠테타를 쉽게 제압한 여찬이 부하들을 모아놓고 크게 웃으며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시중 방구가 대답했다.

 

 “ 하늘이 후량 왕실에 겹으로 재앙을 내려 우환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황제가 붕어하신지 얼마되지도 않아서

   은왕(여소를 말함)이 폐위되어 쫓겨 가다 죽었고

   능묘가 막 완성될 찰나에 대사마(여홍)이 군사를 일으켜

   경사에는 피가 흐르며 형제가 칼로 맞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비록 여홍이 스스로 멸망의 길을 판 것이기는 하지만 

   폐하에게 더 이상 형제는 없게 되셨으니

   어찌 백성에게 반성하고 사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병사를 풀어 저렇게 난폭하게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욕보이게 하셨으니 흠결은 여홍에게 있었는데 

   백성들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게다가 여홍의 아내와 자녀들은 폐하의 제수이고 조카인데

   그들이 욕을 보고 비첩과 종이 되면 천지신명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방구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자 여찬도 태도를 고치고 그에게 사과했다. 여홍의 아내와 자식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동궁에 안치하고 위로했다.

 

(35) 여찬의 무리한 독발이록고 정벌계획 실패(AD400)

 

집권한 여찬은 지난해 형님 독발오고의 사망으로 내부가 혼란한 남량을 점령할 생각을 굳혔다. 중서령 양영은 그런 여찬을 강력하게 말렸다.

 

 “ 독발이록고는 비록 갑작스런 변고로 왕이 되기는 했지만

   위와 아래가 다 그에게 진심으로 복종하고 있습니다.

   틈이 전혀 벌어지지 않았으니 아직은 정벌이 불가능합니다.“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반대하는 조정의 신하들을 가볍게 여긴 여찬은 마침내 남량정벌군을 파병했다. 남량에서는 독발이록고가 동생 독발녹단을 보내 방어하도록 했다. 두 나라 군사는 삼퇴(청해성 낙도 부근)에서 맞붙었는데 후량군사가 크게 패했다. 목이 잘린 군사만 2천명이 넘었다.

 

[그림] 후량(AD386-AD403) 왕조 계보도


87b106c5742f7283aa1d5d74c735c171_1546409

19
  • 기사입력 2019년01월03일 16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1월02일 15시16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