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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10I: 3대 인재에도 멸망한 후진(後秦)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6월07일 17시30분
  • 최종수정 2018년06월07일 15시2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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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56) 후진 요숭의 동진 낙양공격-낙양함락(AD399)

 

그 해 후진에는 여러 가지 흉측한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났다. 요흥은 하늘의 경고라고 생각하고 황제 칭호를 깎아 내려서 왕이라고 부르고 여러 신하들의 작위도 1등급씩 내렸으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동시에 정사를 간소하게 하고 인재를 적극 등용하였으며 흉악한 관리들을 주살하게 하였다.         

 

AD399년 당시 낙양은 실권자 사마도자의 조카 안제 사마덕종이 다스리던 동진 땅이었다. 그러나 중앙 조정이 타락하고 무능하여 전국은 여러 군벌로 나뉘어 할거하였다. 건강 지역만 사마씨 황실이 다스릴 뿐, 강주의 환온, 예주의 사마상지, 진강의 유뢰지, 광릉의 고아지, 익주의 은중감 그리고 옹주의 양전기가 지역 실세로 군림하고 있었다. 후진의 제공 요숭은 끈질기게 옹주의 핵심지역 낙양을 공략하였다. 궁색해진 옹주자사 양전기는 북위의 탁발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탁발규는 산기시랑 장제를 상산왕 탁발준에게 보내 동진을 도와주라고 명했다. AD399년 8월 탁발규는 6만 대군을 목숭에게 딸려 보냈다. 그러나 북위의 군대가 도착하지 않는 동안 후진의 군사가 낙양을 뽑아 버렸다. 낙약이 후진에게 떨어지자 회수와한수 이북의 여러 지역은 동진을 버리고 후진에게 투항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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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후진의 서진 공격과 서진의 투항(AD400)

 

 

AD400년 경 장안의 서쪽 지금의 감숙성 지역에는 크게 네 개의 세력권이 있었다. 하나는 난주를 중심으로 하는 걸복국인의 서진(西秦)과 고장(감숙성 무위)을 축으로 하는 독발오고의 남량(南涼), 그리고 그 서쪽 지금의 장액을 거점으로 하는 저거몽손의 북량(北涼)과 그보다 더 서쪽 지금의 주천을 중심으로 하는 이고의 서량(西涼)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걸복국인-걸복건귀(형제)의 서진과 독발오고-독발이록고(형제)의 남량은 요흥의 후진과 국경이 겹치는 탓에 서로 다툼이 많았다. 

 

요흥은 먼저 요석덕을 농서지역으로 보내 서진의 걸복건귀를 공략했다. 걸복건귀는 농서 수비를 모올에게 맡기고 자신은 요석덕의 배후 보급로를 차단하려고 시도했다. 요흥이 곧바로 요석덕의 뒤를 받쳐 주는 바람에 걸복건귀의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스스로 몸을 피해 부한(감숙성 유중)으로 돌아왔다. 걸복건귀의 3만 6천 군사는 후진에게 투항했다. 그리고는 전갈을 수도 금성(감숙성 난주)로 보내 모두 후진에게 항복하라고 지시한 뒤 스스로는 남량의 독발이록고에 투항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발씨가 본인의 의도를 의심할까 두려워 아들 걸복치반은 인질로 남량의 독발씨에게 보내고 본인은 후진에게 항복했다.  

 

(58) 후진의 서쪽 세력 장악 (AD401)

 

서진이 사실상 함락되자 후진 장수 요석덕은 난주에서 황하를 건너 더욱 북쪽으로 군사를 몰아 고장(감숙성 무위)의 독발씨 남량을 침범해 들어갔다. 독발씨는 전투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후량의 여륭들이 고장을 중심으로 후진에게 항전했으나 장수 여타는 군사 2만 5천을 거느리고 요흥에게 항복했다. 서량의 이고, 북량의 저거몽손, 남량의 독발이록고가 모두 요흥에게 투항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여광이 AD389년 세웠던 후량의 여륭도 내분이 일어나 결국 후진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전진이 멸망한 뒤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군웅들로 쪼개졌던 농서 이서지역은 후진의 요흥에게 완전히 통일되게 되었다.  

 

 

(59) 후진과 북위의 대립 요홍의 태자옹립(AD402)

 

이제 황하 이북지역은 요흥의 후진과 탁발규의 북위 두 나라만 남아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탁발규는 말 1천 필을 하적간에게 붙여 요흥에게 보내 딸을 배필로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요흥(AD366-AD416)은 북위 탁발규(AD371-AD409)가 이미 2년 전 후연 모용보의 딸을 황후로 취한 뒤였음을 알고 하적간을 가두어버렸다. 북위는 하적간이 포로로 잡힌 것을 알고 후진의 변경을 침략하고 대대적으로 군사와 군량을 비축하면서 평양(산서성 임분)을 거점으로 남침을 준비하였다.

 

북위의 상산왕 탁발준은 먼저 고평(영하 고원)에서 후진을 쳐들어 왔다. 그 지역을 수비하던 후진의 몰혁간과 유발발은 진주(감숙성 천수)로 후퇴했다. 탁발준은 점령한 지역의 포로를 모두 붙잡아 북쪽으로 이주시켜버렸다. 후진의 동쪽 하동(산서성 하현)과 서북쪽 고평으로부터 북위가 쳐들어오자 후진도 병사를 징발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며 장차 있을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북위와의 한 판 대전을 준비하던 요흥은 만일에 대비하여 열 네 살짜리 아들 요홍(AD388-AD417)을 황태자로 책봉하면서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다. 요홍은 학문을 좋아하고 온순하며 관대하고 효성이 깊었으나 한 가지 흠은 군사적인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고 또 잔병치레가 많았다. 후계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하던 요흥은 결국 요홍을 세우기로 결단한 것이다.  

 

(60) 후진-북위의 전투 : 시벽(柴壁)의 전투(AD402)

 

AD402년 봄 요흥은 의양공 요평과 상서우복야 적백지를 보기병 군사 4만과 함께 보내 북위 정벌하도록 했다. 요흥 자신 또한 군사를 이끌고 선봉장의 뒤를 이었다. 몰혁간 군사는 천수에 주둔하고 요흠은 낙양에 진을 치며 만일에 대비했고 태자 요홍과 상서령 요황은 수도 장안을 지켰다. 북위 또한 전쟁을 꾸준히 준비해 온 터라 즉각적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북위의 선봉에는 비릉왕 탁발순과 예주자사 장손비가 6만 기병을 앞세워 진격했고 주군 탁발규는 더 많은 대군을 거느리고 탁발순의 뒤를 받쳐 주었다.

 

북위의 대군이 영안(산서성 곽주)에 도착할 무렵 후진의 선봉장 요평은 2백 기병을 보내 북위군을 직접 염탐하다가 전원이 사로잡혔다. 요평은 물러나 시벽(산서성 임분 서남)에 웅거하였다. 탁발규는 곧바로 추격하여 시벽의 요평 후진군을 포위했다.(AD402년8월9일) 요흥은 요평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4만 7천의 군사를 급히 보내왔다. 요흥의 계획은 임분의 동쪽 천도를 먼저 장악하므로써 포위를 펼친 북위군의 배후를 위협하자는 전략이었다.     

 

북위군은 이미 그 곳의 지형을 철저히 파악하여 요흥 군이 어디로 어떻게 올지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요흥 또한 북위군의 위세에 눌려 주춤주춤하면서 느릿느릿 북상했으므로 그만큼 북위군에게 대비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8월 28일 북위 탁발규는 3만 기병을 직접 인솔하고 좁은 협곡을 북상하는 후진군을 기습했다. 그 곳 지형은 양쪽으로 길게 산맥이 뻗어 있어서 매복습격에 매우 취약한 지형이었다. 후진군은 몽갱(산서성 양분) 남쪽에서 북위군에게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요흥은 후퇴했고 요평은 시벽에 갇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두 달이나 갇혀 양식과 화살이 다 떨어진 요평은 10월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뚫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전 장수들이 분수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탁발규는 수영잘하는 사람을 시켜 쇠갈고리로 자살하려는 장수를 건지려 했으나 대부분 익사하고 말았다. 탁발규가 사로잡은 후진군 포로만 2만여 명 이었다. 요평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흥과 그 군사들의 통곡 소리가 산과 골짜기를 흔들 정도였다. 요흥은 탁발규에게 화친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다른 일이 없었다면 탁발규는 군사를 몰아 장안으로 들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북위의 배후에 있던 유연이 북위를 공격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위험을 느낀 탁발규는 서둘러 군사를 수습하여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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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동진 환현의 황위 찬탈(AD403)

 

 

당시 동진 조정은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AD396년 안제(安帝)가 즉위하고 숙부인 사마도자(司馬道子)가 섭정을 맡으면서 전횡을 일삼았다. AD398년 안제 2년 사마도자의 측근 왕국보(王國寶)가 북부군(北府軍)의 통솔권을 빼앗으려고 하자 연주자사(兗州刺史) 왕공(王恭)과 예주자사(豫州刺史) 유해(庾楷)는 조정에 반기를 들고 군대를 일으켰다. 당시 광주자사(廣州刺史) 환현도 형주자사(荊州刺史) 은중감(殷仲堪)과 함께 서부군(西府軍)을 이끌고 군대를 일으켰다. 왕공의 반란은 유뢰지(劉牢之)의 배신으로 실패했지만 환현은 세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조정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마도자ㆍ사마원현(司馬元顯) 부자는 은중감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환현을 강주자사(江州刺史)로 임명한 것이다. 환현은 AD399년에 은중감과 옹주자사(雍州刺史) 양전기(楊佺期)를 죽이고 서부군(西府軍)을 장악했다.

 

AD399년 저장성(浙江省)과 장쑤성(江蘇省)에서 손은(孫恩) 주도로 오두미교(五斗米敎)민란이 일어나면서 AD402년 건강(建康, 지금의 난징)을 위협하였다. 이 민란은 유뢰지의 북부군에의해 진압되었지만, 환현은 서부군을 이끌고 건강으로 진입해 사마도자 부자를 죽이고 동진의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환현은 유뢰지마저 제거하고 AD403년 12월 3일 안제에게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초(楚)라고 불렀다. 역사에서 ‘환초(桓楚)’라고 부르는 나라다.

환현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건강의 황궁 어좌에 앉았을 때 마루가 가라앉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 백료가 깜짝 놀라 어쩔줄을 몰라했다. 은중문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 성덕이 깊고 두터워서

  땅도 폐하의 무게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62) 환현의 사람됨(AD404)

 

환현은 정서적으로 불안증이나 혹은 우울증의 질환을 앓았던 것 같다.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불편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하루는 큰 파도가 덮쳐 수도 건강의 북쪽 석두에서 많은 사람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놀란 사람들의 원성과 탄식이 그치지 않았는데 환현은 한편으로 매우 두려워 하면서도 그것이 노비들이 일부러 만들어 낸 소리라고 일축하려 했다. 환현은 매우 자잘한 일도 손수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어서 말단 직급자도 직접 면접하고 뽑았다. 문서의 글자가 하나 틀렸는데 이 때문에 좌승상 이하 전 관련부서 관료들을 파면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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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6월07일 17시30분
  • 최종수정 2018년06월07일 15시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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