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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1> 권한 위임의 달인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5월17일 17시30분
  • 최종수정 2018년05월17일 13시28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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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아우구스투스에게 아그리파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그리파 없는 아우구스투스의 운명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아그리파는 충실한 부하로서, 때로는 미더운 동역자로서 아우구스투스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제정 체제를 확립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아그리파는 기원전 63년에 태어나 기원전 12년에 사망했다. 17세 때 카이사르에게 발탁되어 동갑인 아우구스투스의 협력자가 되었다. 군사적인 재능이 부족한 아우구스투스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카이사르의 배려였다. 아우구스투스가 거둔 군사적인 승리는 모두 아그리파의 전략과 지휘 덕택에 가능했다. 

 

아그리파는 일생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분신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군사뿐만 아니라 건설에서도 두 사람의 협력 관계는 환상적이었다. 로마의 도심인 포로 로마노 일대는 아우구스투스가 기획자인 카이사르의 생각을 이어받아 정비했다. 반면에 그 북쪽에 있는 ‘마르스 광장’은 아그리파가 맡았다. 카이사르는 이 일대를 도심화하는 핵으로서 ‘사이프타 율리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그리파는 ‘사이프타 율리아’ 서쪽에 신전을 세웠다. 이 신전은 모든 신들에게 바쳐졌다는 뜻을 담아 ‘판테온’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아그리파는 판테온 남쪽에 로마 최초의 공중목욕탕인 ‘아그리파 목욕탕’도 만들었다. 이 목욕탕은 욕실, 마사지 시설, 체육장, 독서실, 오락장까지 갖추었다. 

 

아그리파가 세운 공공건축물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제국 전역에 널려 있다. 대표적인 예로 남프랑스의 님에는 ‘퐁 뒤 가르(가르 다리)’가 남아 있다. 이 다리는 길이가 370미터, 높이가 48미터나 되는 수도교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보도가 딸려 있다. 주민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아그리파는 공공 봉사 정신을 평생 동안 실천했다. 죽을 때는 개인 재산도 아우구스투스에게 모두 남기고 공공을 위해 써줄 것을 부탁했다. 아그리파는 공공사업에 정열을 바쳤고, 그 방면에 숙달된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면 노예도 상관하지 않고 우수한 기술자 집단을 구성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가 죽은 뒤 기술자 집단에 속한 노예들을 전부 해방시키고 기사 계급으로 승격시켜주었으며, 이들을 주축으로 로마의 ‘공공사업청’을 창설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외동딸 율리아의 남편이 자식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자, 재혼 상대로 아그리파를 택했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요청을 받고 이혼까지 하면서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재혼한 아그리파와 율리아는 3남 2녀를 두었다. 외손자를 5명이나 얻은 아우구스투스는 무척 기뻐한 나머지 두 외손자에게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양자로 삼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유일한 혈육인 외손자를 후계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외손자와 아우구스투스와 나이차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에 아그리파를 중간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아그리파는 병을 모르는 건장한 체질이어서 자신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 동갑인 아그리파가 기원전 12년 51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아우구스투스는 슬픔과 충격에 빠졌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 구도도 함께 무너져버렸다.

 

아우구스투스에게 또 한 명의 핵심 인물이 있다. 외교와 문화 홍보를 담당한 마이케나스다. 아그리파가 아우구스투스를 양지에서 도왔다면, 마이케나스는 음지에서 도운 사람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 아그리파, 왼팔 마이케나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오늘날 기업이 문화예술 활동에 자금이나 시설을 지원하는 활동을 ‘메세나 운동’이라고 한다. 메세나는 마이케나스의 프랑스식 발음으로, 메세나 운동의 시조가 바로 마이케나스다. 그는 고대 에트루리아 지방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기사 계급에 속해 있었다. 나이는 아우구스투스보다 많았는데, 전쟁터에서 만나 의기투합했다. 아그리파는 카이사르가 맺어주었지만, 마이케나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선택한 사람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전쟁터는 아그리파에게 맡기고, 외교는 마이케나스에게 위임했다. 

 

마이케나스의 경제적 지원에 힘입어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저자 베르길리우스, 『서정시집』과 『서간시』를 남긴 호라티우스, 서사시로 간주되는 리비우스의 『로마사』 등이 탄생했다. 마이케나스가 문학인들을 어떻게 지원했을까?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시인 호라티우스를 지원한 구체적인 사례를 이렇게 소개한다. “처음에 마이케나스는 호라티우스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거리를 다니면서 대도시의 삶을 관찰하며 지낼 수 있도록 충분한 수입을 제공했다. 나중에는 그 시인에게 티볼리 근처의 사비니 시골에 방이 24개 딸린 집과 노예 8명과 소작농 5가구를 둔 드넓은 사유지를 제공했다. 이곳에서 호라티우스는 빈둥거리면서 술을 마시고 시골의 한적한 생활을 마음껏 즐기면서 시를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프로페르티우스, 오비디우스에 힘입어 라틴어는 시의 매체로 완벽하게 확립되었고, 라틴 문학은 세계의 위대한 문학의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오늘날의 메세나 운동은 문화예술가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아 라틴 문학을 꽃피우게 한 정치가 마이케나스에서 유래했다. 1967년 미국에서 기업예술후원회가 발족하면서 이 용어를 처음 쓴 이후, 각국의 기업인들이 ‘메세나협의회’를 설립하면서 메세나는 기업인들의 각종 지원 및 후원 활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메세나의 대표적 예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대예술가들을 지원한 피렌체의 메디치가가 꼽힌다. 후대에 와서 메세나는 기업의 문화 예술 및 스포츠 지원, 사회적 인도적 입장에서의 공식적인 예술 후원 사업을 뜻하게 되었는데, 미국의 카네기 홀, 록펠러 재단 등은 대표적인 메세나 활동으로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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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5월17일 17시30분
  • 최종수정 2018년05월17일 13시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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