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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서른다섯 번 째 이야기 사마디(禪定)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2월24일 17시10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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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네 가지 사마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가? ‘神은 영원한 명상’이라고. 그의 통찰은 테라바다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는 듯하다. 색계 마음은 色界禪定(rupajjhana)이라고 불리는 선정, 사마디의 상태이다. 이런 마음은 색계의 중생들 사이에서 주로 일어나지만, 마음과 세상이 반드시 상응하지는 않는다. 

  색계 마음에서 거친 물질은 사라진다.(이때 물질은 우리가 이해하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대상을 말한다.) 하지만 아주 미세한 물질은 남아있다.(명상의 대상이 순수한 형상이지만, 몸이나 흙 등 물질로 만든 형상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비슈디마가(청정도론)는 이런 색계 마음, 즉 사마디의 마음상태를 네 가지 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물론 이런 분류는 저자인 붓다고샤(佛音)가 임의로 한 것이 아니라, 명상 수행자들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첫 단계인 初禪에 들면 다섯 가지 마음상태가 따라온다. 覺, 觀, 喜, 樂, 一心이 그것이다. 한자 한 글자로 표현되는 마음의 상태를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그 가운데 희와 낙은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명상수련 중 나타나는 네 가지 단계 중 첫 단계인 초선정을 얻으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차고 삶 자체가 즐겁기 그지없게 된다. 사마디로 얻어지는  기쁨은 충만한 기쁨이다. 원하던 것을 얻을 때의 만족이나 노력해서 얻은 결과의 보람 같은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다. 진리와 관계있는 기쁨이라고 해서 ‘法悅’이라고도 부른다. 법의 맛은 바로 이 기쁨의 맛이다. 명상을 통해 작은 법열이라도 맛본 사람은 결코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이런 사람에게 명상은 평생 삶의 일부가 된다.

  두 번 째 단계인 2禪에서는 內淨(tranquility), 喜, 樂, 捨(equanimity 마음이 초연한 상태)가 지배적인 마음상태가 된다. 2선정에서는 초선정의 마음에 평온하고 초연한 느낌이 더해진다. 더해지는 느낌은 팔리어의 우뻬까인데, 느낌의 세 가지 가운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을 뜻한다. 느낌에 반응하지 않는 마음이라서 평온함이고 초연함이다. 우뻬까의 맛은 법열의 맛보다 한 차원 높다고 한다.

  세 번 째 단계인 3禪의 선정을 얻게 되면 희열이 없어지고 초연함이 지배적인 마음상태가 된다. 희열의 마음상태보다는 초연한 마음상태가 한 수 위인 셈이다. 3선에서는 이와 더불어 念, 慧, 樂, 一心이 있다. 念은 아시는대로 사띠이다.

  마지막 단계인 4禪의 마음은 不苦不樂이다. 괴로움도 없지만 즐거움도 없다. 기쁨에 이어 즐거움까지도 사라지는 마음의 상태가 된다. 초연한 마음(捨)과 念, 一心이 있다. 혹자는 4선정에 가면 물질이 더욱 미세해져서 호흡이 사라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얼마 전 티벳에서 2백년 된 승려의 미이라가 발견됐는데, 명상 전문가가 그 미이라가 죽지 않고 깊은 명상에 들어있다고 주장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주장이 이런 이론과 연관돼있지 않나 내 나름대로 생각했다.

 

  바르지 않은 선정

  이 네 가지 선정이 팔정도의 正定에 속한다고 논사들은 해석한다. 논사들은 선정의 기준으로 이 네 가지 선정을 세운 셈이다. 선정의 기준이 왜 필요했을까? 바른 선정이 있다면 바르지 않은 선정도 있겠다. 마음이 한 대상에 집중하면 앞서 본 것처럼 여러 가지 마음상태가 따라온다. 세간에 전해오는 명상법들은 대부분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마음의 평화를 얻거나 모종의 심적 능력을 얻으려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명상들이 종교와 연관을 맺는 사례도 많다. 집중을 통한 명상으로 남다른 능력을 얻기도 한다. 기도를 통해 신과 직접 소통하는 능력을 갖춘 신앙인도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장면을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는데 매우 경이로웠다. 귀신처럼 남의 과거를 알아맞히는 점쟁이도 만난 적이 있는데 3년 동안 산기도를 통해 갖게 된 능력이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작고하신 서정범 교수의 저술을 통해 세간에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명상을 통해 얻은 남다른 심적 능력으로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인다면 올바른 선정이 아니지 않겠는가? 아마도 선정의 이런 특성 때문에 선정에 대한 논사들의 기준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테라바다에서도 색계 4선정만을 바른 선정으로 규정하고 색계를 벗어난 무색계 4선정을 이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무색계 4선정이 초월적인 심적 능력을 수반함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가치인 열반을 얻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궁금하시지 않은가? 무색계 4선정이 무엇인지?

 

  무색계 4선정 

  무색계란 더 이상 명상의 대상이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세계라는 뜻이다. 색계 4선정의 단계를 초월하여 형상에 의지하지 않는 무색계 선정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 것일까? (마음은 항상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대상 없는 마음이란 있을 수 없다.)

  공간 자체가 그 대상이 된다. 어떻게 공간 자체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색계선에서 대상으로 했던 형상을 한 없이 확장시킨다. 그런 다음 그 형상을 걷어내면 무한한 공간만 남는다. 대상이 된 공간이 경계가 없다고 해서 空無邊處라고 한다. 그것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의 상태는 空無邊處定이다. 무한을 체험하는 탕탕무애의 경지이다. 

  그러나 ‘끝이 없다’는 것도 장애이다. 이 장애를 걷어내기 위해 허공을 가득채운 알음알이를 대상으로 공간을 걷어내는 다음 단계가 존재한다. 바로 끝없는 알음알이, 識無邊處이다. 논서들은 이 경지가 한 없이 고요하다고 쓰고 있다. 본인이 체험이 없어서 좋은 표현이 나오지 않아 송구스럽다. 그저 ‘한 없이 확장된 마음의 경지’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맹자의 호연지기가 연상된다.)

  다음 단계는 無所有處인데 알음알이가 없는 상태이다. 알음알이가 떠나가 텅 비어버려 더욱 고요해진 마음의 상태이다. 하지만 알음알이가 없다는 무소유처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초월하면 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머문다. 이 마음의 상태가 인식을 가진 것도, 갖지 않은 것도 아니라서 이 같은 명칭이 붙었다. 거친 인식은 없지만 미세한 인식은 있다는 그런 뜻이다.

  비상비비상처정은 무색계선정 중 가장 고요하고 수승한 경지이다. 청정도론은 4무색정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물질인 표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첫 번째이고,

허공을 초월했기 때문에 두 번째이고, 

허공을 대상으로 일어난 알음알이를 

초월했기 때문에 세 번째이고,

허공을 대상으로 일어난 알음알이의 떠남을

초월했기 때문에 네 번째이다.

모든 곳에서 대상을 극복했기 때문에

이 무색계증득은 네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청정도론,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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