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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예산의 대폭 삭감, 그 배경과 파장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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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10월31일 17시10분

작성자

  • 이덕환
  •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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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과학기술계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연구개발 예산의 갑작스러운 삭감이다. 내년도 정부예산안에서 국가연구개발 예산이 5조2000억 원이나 삭감된다. 5% 수준의 증액을 기대했던 과학계의 입장에서 16.6%의 대폭 삭감은 실망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사실 예산의 대폭 삭감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실제로 연구개발 예산의 삭감은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심지어 IMF 외환 위기 때도 연구개발 예산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동안 과학기술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뜻이다. 정부의 갑작스러운 변덕에 과학기술계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졸속으로 진행된 예산 재편성

 

  전 세계의 과학기술계가 우리의 갑작스러운 연구개발 예산 삭감을 주목하고 있다. 미국의 ‘사이언스’는 지난 9월 19일 ‘과학 투자 챔피언인 한국의 갑작스러운 예산 삭감’으로 우리 연구자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대서특필했다.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 ‘네이처’도 지난 10월 5일 ‘한국의 과학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정부가 올해 초 ‘세계 5대 연구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GDP 대비 5% 투자를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스스로 깨버렸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연구개발 예산의 삭감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6월 말 대통령 주재로 개최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그 시작이었다. 일상적인 절차에 따라 과학기술자문회의의 심의·의결까지 마친 연구개발 예산안을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라’는 대통령의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대통령이 과학기술정부통신부 장관을 심하게 질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결국 두 달 만인 8월 말에 16.6%(5조2000억 원)나 삭감된 새 예산안이 만들어져서 국회에 제출됐다. 국가연구개발 예산이 30조 원을 넘어섰다고 환호했던 과학기술계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기막힌 소식이었다. 민간의 기여까지 합쳐 ‘연구개발 100조 원 시대’는 2023년 한 해의 멋쩍은 기록으로 남겨지게 되는 셈이다. 세계 최고 수준인 GDP 대비 4.9%였던 연구개발 투자가 내년에는 3.9%로 곤두박질칠 것이라고 한다.

 

  예산안이 국회에 제출되고 두 달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개편된 예산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오리무중이다. 사실 지난 6월 대통령에게 보고된 ‘원안’의 내용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국정감사에서 과기부가 ‘원안’과 ‘개편안’을 모두 제출하라는 야당의 요구조차 거부해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졸속으로 개편된 예산안에 대한 파편적인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다. 혼란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연말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기초연구와 정부출연연구원이 직격탄을 맞았다고 한다. 기초연구 예산이 2조4000억 원(6.2%)이나 줄었고, 25개 출연연 예산도 2조1000억 원(10.8%)이나 깎였다고 한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일 뿐이다. 

  당장 연구 현장에 비상이 걸렸다. 인력양성과 기관 운영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전기를 많이 쓰는 슈퍼컴퓨터, 핵융합 연구설비, 중이온 가속기, 중성미자 검출시설 등은 전기요금을 감당할 수 없어서 가동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소문이다. 과기부가 ‘우수’하다고 평가한 사업도 무작정 휘두른 제로베이스 재검토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37개 사업단 중 73%인 27개가 평균 25.5%의 예산 삭감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국제협력 예산은 오히려 2조8000억 원으로 무려 4배 가까이 늘었다고 한다. 우리 과학자가 ‘세계 최고 기술을 만드는 선진 연구개발 현장을 체화(體化)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 때문이라고 한다. 오래전에 수명이 끝나버린 추격형 시대에나 어울렸던 퇴행적 인식이다. 선진국의 최고 연구기관이 돈 보따리만 들고 가면 누구에게나 연구개발 현장을 체화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고 환영할 것이라는 기대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연구개발의 현장을 무시한 어처구니없는 억지일 뿐이다.

 

‘이권 카르텔’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

 

  정부의 예산은 언제든지 삭감할 수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세수가 줄어들면 예산 지출을 줄이는 것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연구개발 예산도 예외가 아니다. 연구개발 예산을 삭감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과학기술계가 분노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예산 삭감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과학기술계가 반발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이 땅의 과학자들을 ‘약탈적 이권 카르텔’로 낙인을 찍어버린 것이 핵심이다. 과학자들이 지난 5년 동안 10조 원이나 늘어난 연구개발 예산을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면서 서로 나눠 먹고, 갈라 먹고 말았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을 국정의 중심에 세우겠다는 각오를 반복적으로 강조했던 정부가 느닷없이 과학자들을 싸잡아서 ‘이권 카르텔’로 몰아붙이는 모습은 놀랍고도 생경한 것이다. 스위스와 미국에서 직접 과학기술 현장을 찾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던 사실은 기억에서 완전히 잊어버린 모양이다.

 

  이권 카르텔의 구체적인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아베 총리에 의해서 촉발된 반도체 소재 대란과 지난 3년 동안의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한 ‘긴급 예산’ 투입이 빌미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중소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원 사업이 연구개발 사업으로 둔갑해버린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연구개발에 아무 관심도 없는 중소기업을 상대로 정부 예산을 따주는 전문 브로커가 활개를 치고 있었다고 한다. 과기부도 그런 지적을 애써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이 땅의 과학자들이 느닷없이 ‘정부 예산이나 탐내는 저질 도둑놈’이라는 더러운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계가 놀라는 경제 성장과 사회 민주화를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을 제공했다는 자부심으로 살고 있는 과학자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모욕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별난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따르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는 대통령의 관심을 확실하게 돌려 세워놓은 원인을 찾아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몇 가지 추측은 가능하다.

 

  지난 연말 대통령실에서 모처럼 마련했던 ‘과학기술계 원로 오찬 간담회’에서 시작된 일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연구개발 예산을 ‘더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원로들의 일상적인 조언이 ‘나눠 먹고, 갈라 먹는 이권 카르텔’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국회 상임위에서 과기부의 발언을 종합해서 나온 분석이다. 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경험이나 이해를 기대할 수 없는 대통령실의 인적 환경과 대통령의 신뢰를 얻지 못한 과기정통부가 만들어 낸 재앙적 상황이다.

 

  도를 넘어선 부처간 갈등이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과기부를 언제나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부처가 한둘이 아니다. 2008년 과기부 해체에 앞장섰던 산업부도 있고, 보건의료 정책을 전담하는 보건복지부나 환경 정책을 총괄하는 환경부도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무작정 부활시킨 혁신본부의 존재를 성가시게 여기는 부처도 적지 않다. 특히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기재부의 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거부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태의 과기부에 대한 원성(怨聲)이 모아져서 ‘약탈적 이권 카르텔’의 허상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사실 카르텔의 존재를 무작정 부정할 수는 없다. 호시탐탐 연구개발 예산을 노리고 활동하는 전문 ‘브로커’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영혼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주머니만 채우겠다는 ‘썩은 관료’가 있는 것도 엄염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오래 전부터 관료와 정책 전문가들이 무작정 휘두르는 채찍에 길을 잃어버린 ‘양떼’로 전락해버린 과학자에게는 정부 예산을 노린 브로커의 역할도 버거운 것이다.

  

자중지란에 빠진 과학기술 리더십

 

  권위주의 시대의 대통령이 만들어준 ‘따뜻하고 온화한 온실’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과학기술계가 심각한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져 버렸다. 지근 거리에서 과학기술을 대변해주기를 기대했던 과학기술보좌관‧비서관은 여성 쿼터를 채우는 자리로 변질되어 버렸다. 과학기술이나 연구개발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도 갖추지 못한 보좌관‧비서관의 역할이 참혹하다. 2005년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황우석 사태는 청와대가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탈원전의 선봉에 서서 과학기술 추락을 부추기기도 했다.

 

  교육부로 흡수되었던 과기부를 애써 되살려 놓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실망스럽다. 연구개발 예산의 삭감은 단순한 ‘용돈 줄이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켜 놓고 오히려 격한 반발이 ‘당혹스럽다’고 할 정도의 부처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 일단 예산을 깎아놓고 나서 뒤늦게 ‘보일러’를 고치겠다고 허둥거리는 모습이 애처로울 뿐이다.

 

  과학기술계의 원로와 단체도 침묵하고 있다. 과거에 있었던 최형섭 장관의 확실한 비전이나 김시중 장관의 뜨거운 열정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출연연의 젊은 연구자들이 내는 목소리가 고작이다. 아무리 붉은 꽃도 열흘이 지나면 색이 바래기 마련이라고 했다. 과학기술에 대한 우리의 뜨거웠던 열기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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