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기의 시대정신(zeitgeist) <2> 여름날 뜨겁던 노래들이 지고 있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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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에 동네 도서관에 갔다. 컴퓨터실에 70대로 보이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홈페이지 하나를 열고 한참을 씨름하더니 젊은 직원을 불렀다. 노인은 “내 컴퓨터에 들어가고 싶은데….”란 말을, 직원은 “죄송한데 개인 업무는 도와드릴 수 없어요.”란 말을 수차례 반복했고 노인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망연자실 앉아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노인이 내민 스마트폰 화면과 홈페이지를 번갈아 보니 이력서라는 단어가 보였다. 노인이 찾던 것은 ‘내 컴퓨터’가 아니라 ‘마이 페이지’였다. ‘마이 페이지’에 들어가서 ‘내가 낸 이력서’를 클릭하자 노인의 얼굴이 환해진다. 내가 노인을 도와드린 시간은 1분 남짓이었다. 한 시간쯤 뒤, 노인은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일부러 찾아와 “먼저 갑니다.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요.” 하고 떠났다.
70대의 노인이 컴퓨터를 이용해 이력서를 내고, 무슨 이유에선지 그 이력서를 또 컴퓨터로 확인해야만 하는 세상이다. 아직은 꾸역꾸역 따라가고 있지만 내가 70대가 되고 80대가 되었을 때 이 세상이 얼마나 더 낯설고 차가운 모습으로 나를 소외시킬지 막막해진다. 켄 로치 감독의 작품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는 먼 곳의 얘기가 아니다.
영화의 배경은 영국 뉴캐슬이다. 다니엘은 40년을 목수로 살아왔다. 치매로 떠난 아내의 간병비 때문에 모아둔 돈은 없지만 홀로 성실하게 살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심장에 이상이 생겨 작업장에서 추락할 뻔한 사고를 겪는다. 의사의 진단에 따라 일을 그만두고 질병수당을 신청하면서부터 다니엘의 지난한 싸움이 시작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숨이 막힌다. 수당 신청을 위해 건 전화는 한 시간 넘게 통화연결음만 울린다. 비발디의 봄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진다. 간신히 통화 연결이 되어도 상담원은 귀를 막고 매뉴얼만 읊어댄다. 의사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고 진단하는데, 복지부 담당자는 일을 할 수 있다며 질병수당 지급을 거부한다. 재심사든 실업수당이든 인터넷으로 신청해야만 하는 껍데기뿐인 절차가 가로막는다. 참다못한 다니엘은 벽에 자신의 이름을 쓰며 1인 시위를 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굶어 죽기 전에 항고 날짜를 요구한다. 그리고 거지같은 통화연결음은 바꿔라!”
-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2023년 여름 미국 빌보드 차트는 한동안 주류에서 철저히 밀려났던 컨트리 음악이 대세였다. 7월 마지막 주에는 컨트리 곡이 차트 1, 2, 3위를 독식했다. 1958년 빌보드가 첫 집계를 시작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로 백인, 보수, 남성우월주의적 성격을 띤다고 여겨지던 컨트리 음악의 돌풍에 정치적인 해석이 쏟아졌다. PC주의(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염증, 러스트벨트 저소득 백인 남성들의 반격, 보수의 결집 등등….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좌파 우파 요란스러운 힘겨루기 속에 정작 그 노래들이 가까스로 냈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차트 2위까지 올랐던 루크 콤스(Luke Combs)의 ‘Fast Car’는 내 귀에도 익숙한 곡이다. 80년대 후반, 글램 메탈 밴드들의 화려한 분위기 속에 불쑥 튀어나와 투박한 옷차림으로 우물우물 노래하던 흑인 여성 트레이시 채프먼(Tracy Chapman)의 곡이 원곡이다. 30년도 더 지났지만 달라진 건 없다. 술주정뱅이 아빠, 도망친 엄마, 학교를 그만두고 편의점에서 일하며 ‘fast car’를 타고 비참한 현실로부터 탈주하고 싶어 했던 흑인 소녀의 목소리가 2023년 백인 남성의 목소리로 바뀐 것뿐.
8월 말에도 불그레한 얼굴을 한 백인 청년의 컨트리 곡이 새롭게 차트 1위에 올랐다. 제목은 ‘Rich Men North of Richmond’, 열일곱 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서 일하다 두개골이 골절되는 사고를 겪은 후 10년 가까이 블루칼라 일용직을 전전하던 올리버 앤서니(Oliver Anthony)가 리치몬드 북부(워싱턴 D·C)의 부자들(정치인)에게 희망 없는 현실을 호소하는 노래다.
올리버 앤서니 유튜브 www.youtube.com/@radiowv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I've been sellin' my soul, workin' all day (난 온종일 일하며 내 영혼을 팔아왔어)
Overtime hours for bullshit pay (형편없는 돈을 받으며 초과근무했지)
So I can sit out here and waste my life away (이렇게 여기 주저앉아서 내 인생을 낭비해)
올리버 앤서니의 유튜브 영상 조회수는 6800만을 넘어섰다. 그 아래에는 이 노래에 공감하는 17만 개의 댓글이 달렸다. 23살의 기계공, 42세의 트럭 운전사, 닳아버린 허리만 남은 70세 노인, 광부와 목수와 용접공과 장애인 퇴역군인과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코스타리카에서, 베네수엘라에서, 노르웨이, 아일랜드, 이란과 호주에서 자기의 팍팍한 삶을 댓글로 달고 있다.
영화 속 다니엘 블레이크는 커다란 벽에 자신의 이름을 휙휙 써 내려갔지만, 현실의 다니엘 블레이크들은 유튜브 영상 아래 한 뼘도 안 되는 공간에 모여 있다. 휴일 아침 동네 도서관에서 만난 한국의 다니엘 블레이크는 티끌 같은 호의에 주섬주섬 감사의 말을 남기고 돌아설 뿐이다.
어느새 가을이다. 낙엽이 지듯 한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노래들도 차트에서 서서히 내려가고 있다. 그들이 애써 노래했던 고단한 삶에 대한 잠깐의 관심도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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