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기자가 메모한 여의도의 모든 것 <25> 여의도엔 교도소도 필요하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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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후보는 계속 단일화를 주장하고 있는데, 나중에 후보를 사퇴하면 국고보조금을 그대로 받게 되지 않습니까. 도덕적 문제도 있는데 단일화를 계속 주장하면서 토론회에도 나오는 이유가 있나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대단히 궁금하신 모양인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저는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려고 나왔습니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후보)
(2012년 12월 4일 대선후보 첫 텔레비전 토론 중)
제18대 대선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2012년 12월 4일 대선후보 첫 텔레비전 토론이 열렸다. 토론자는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민주통합당 문재인,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 이 후보의 “저는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라는 말로 유명해진 그 토론회다. 이 후보는 박 후보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카키 마사오’라 부르며 신랄하게 공격했다. 득표에 도움이 됐는지는 의문이지만 이날 토론회를 주도한 건 이 후보였다. 그런데… 투표를 사흘 남기고 후보를 사퇴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진보·민주·개혁 세력이 힘을 모아 정권교체를 실현하라는 국민 열망을 이뤄내기 위해서”라고 사퇴 이유를 밝혔다. 자신이 후보직을 사퇴하고, 나머지 TV토론을 포기하는 것은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한 희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민주통합당과의 사전 교감은 없었고, 스스로 조건 없이 결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공직선거법은 국회의원이 있는 정당이 대선 후보를 내면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한다. 이 때문에 통합진보당도 18대 대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다음 날(2012년 11월 28일) 27억 원의 보조금을 받았다. 선거를 위해 써야 할 돈이다. 그런데 통합진보당은 각 가정에 배포되는 2차 선거 공보물을 제출 마감인 12월 6일까지 내지 않았다. 선거운동 기간 44차례나 할 수 있는 TV, 라디오 연설은 라디오만 단 한 번 했고, 130회에 이르는 신문, TV, 라디오 광고는 신문만 한 번 했다. 선거에 쓰라고 지급한 보조금은 안 쓰고 있다가, 후보를 사퇴하면서 ‘꿀꺽’한 것이다. 앞서 박 후보가 “도중에 후보를 사퇴하면 국고보조금을 그대로 받게 되지 않습니까. 도덕적 문제도 있는데…”라고 한 것은 이런 까닭이다. 이 후보 사퇴 기자회견에서도 당연히 이 질문이 나왔다. 그는 “현행법상 중간에 사퇴한다고 해서 반환하라는 규정이 없어 법대로 하겠다”라고 했다.
불법(不法)이 아니라고 괜찮은 게 아니다. 세상엔 불법은 아니지만, 해선 안 될 일이 있고, 법은 그중에서도 이것만은 절대로 어기면 안 된다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를 유지하는 건 준법(遵法)이 아니라 양심(良心)이다. 그 양심의 기준은 사회 지도층일수록 더 높게 요구된다. 배임(背任)에 대해 법적으로는 ‘업무상 다른 사람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삼자가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로 정의한다. 이 후보가 중도 사퇴로 챙긴 대선 보조금 27억여 원은 법적으론 ‘배임’에 해당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대로 공직선거법상 국회의원이 있는 정당이 대선후보를 내면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법적’인 해석일 뿐, 사회지도층에 요구되는 양식으로는 분명 ‘배임’에 해당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반 국민이 생각하는 배임은 ‘주어진 임무를 저버림. 주로 공무원 또는 회사원이 자기 이익을 위하여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국가나 회사에 재산상의 손해를 주는 경우’(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로 법적 해석보다 폭이 더 넓기 때문이다.
그 사회가 가진 보편적인 사고를 정의한 국어사전과 법률적 정의의 차이를 나는 ‘양식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그중에서도 이것만큼은 절대로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거짓말은 하면 안 되는 것임에도 했다고 다 처벌하지는 않되, 그로 인해 피해가 생기면 처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민의 세금으로 후보를 지원하는 건 금권 정치를 막고, 소수 정당의 정치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금권 정치엔 필연적으로 로비가 뒤따르고, 결과적으로 돈 있는 사람이 정치를 독점하게 된다. 당선 가능성이 적은 소수 정당 후보라도 출마하면 그 후보로 인해 소수의 의사가 표출되고, 국정에 반영될 수 있다. 이것이 대의 민주주의이며, 소수 정당 후보라도 선거를 완주해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후보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정책과 비전을 알려야 하고, 세금으로 보조금을 지원받은 경우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남을 떨어뜨리기 위해, 중도 사퇴로 남은 돈을 챙기기 위해 출마해선 안 된다. 이건 법 이전에 양식의 문제다.
대선 후보 사퇴라는 중차대한 결정을 후보 혼자, 갑자기 즉흥적으로 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선 투표일 사흘 전에 갑자기 후보를 사퇴했으니 정상적인 선거운동 과정이었다면 이미 숱한 공보물이 제작되고 신문·방송에 광고가 나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아마 선거운동 시작 전 또는 후보 등록 전에 이미 중도 포기 방침을 정했을 테니 굳이 돈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30회나 할 수 있는 각종 광고를 한 번만 한 것은 그런 까닭일 것이다. 그러고도 보조금을 받고, 중도 포기로 남은 돈을 ‘인 마이 포켓(in my pocket)’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주어진 임무를 저버리고 국가와 사회에 손해를 끼친 행위가 아닌가.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짓, 또는 그런 짓을 하는 사람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는 ‘도둑’이다. 여의도엔 대형 교도소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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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가 지난 2023년 8월 펴낸 책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도서출판 북트리 刊>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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