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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구 기자가 메모한 여의도의 모든 것 <16> ○○.○%,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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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10월30일 16시36분
  • 최종수정 2023년10월29일 23시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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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선거법 위반인 거 알고 하는 건가?” 

“모를 수가 있어? 내일이 투표일인데?”

“투표 전날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깐다고?”

“와~ 정신 나갔네….”

“우리 알면서도 써야 하는 거야?”

“그거 노린 거 같은데?”

“쓰면 우리도 선거법 위반 아니야?”

“저 ×××이….” 


  작정하고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은 정신병자일까, 아니면 범죄자일까. 아마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나는 여의도 정신병원 안에 교도소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을 것 같지만…. 

  때는 17대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2007년 12월 18일. 출근하며 ‘오늘만 버티면 다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에 유난히 발걸음이 상쾌했던 날이었다. 아~, 지난 1년여 간 얼마나 힘들었던가. 타사에 물 먹어서, 후배들이 말을 안 들어서, 기사 아이템이 없어서 깨진 나날들. 하지만 다 지난 일이고, 그날만큼은 모 드라마 대사처럼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함께 한 그 모든 날이 좋았다’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이제부터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었으니까. 

  투표 당일은 개표 결과로 지면을 채우기 때문에 기사를 찾아다녀야 할 필요가 없다. 또 당선자가 결정되면 당연히 인수위 구성, 정책 변화 등 온갖 ‘핫’한 기사 경쟁이 붙겠지만 당시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이 100% 예상됐고, 나는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 출입 기자였다!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 했던가. 대선에서 진 당 출입 기자가 써야 할 기사는 상당 기간은 별로 없다. 놀! 면! 된! 다!

  그 즐거웠던 기분은 간단히 오전 보고를 하고 동료 기자들과 우아하게 커피를 한 잔하고 있을 때 무참히 깨졌다. 대통합민주신당 ○○○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이 국회 정론관에서 갑자기 예정에 없던 여론조사 브리핑을 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토교통부 장관을 하며, “아파트가 빵이라면 밤새도록 찍어내고 싶다”고 해 국민의 울화통을 터지게 한 그 분이다. 당시 한국공인중개사협회가 ‘부동산 산업의 날’ 장관 표창을 거부하기도 했다. 2007년 대선은 열린우리당이 내홍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대통합민주신당 이름으로 치렀다.) 

  불쑥 나타난 그는 “자체 자동응답 전화(ARS) 조사에서 (한나라당)이명박 후보 34.2%,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28.5%로 5% 내 차로 좁혀졌다. 오차 범위 내 접전이 벌어지고 있다. 조사 결과 두드러진 특징은 수도권에서 이명박 후보는 급 붕괴하고 있고, …(중략)… 특히 수도권 30~40대의 경우 이 후보 지지도는 반 토막으로 줄었다. 오늘 하루 더 지나면 또다시 반 토막으로 줄어들 것이다. 이 후보의 30~40대 지지도는 4분의 1로 줄어드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브리핑을 듣던 우리는 경악했다. 선거법은 ‘누구든지 선거일 전 6일부터 선거일의 투표 마감 시각까지 선거에 관해 정당에 대한 지지도나 당선인을 연상케 하는 여론조사의 경위와 그 결과를 공표하거나 인용하여 보도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어기면 최대 2년 이하 징역, 4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그날은 선거일 바로 전날이었다. 모르고 하지 않았냐고? 선거를 한두 번 치러본 사람들도 아니고, 모른다는 건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증거가 브리핑에서는 구체적인 수치를 말했지만, e메일로 배포한 보도 자료에서는 수치를 다 삭제했으니까.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면 보도 자료에도 수치가 있어야 하지 않나. 대놓고 한 것이다.

  의도는 명백하다. 당시 전통적인 대통합민주신당 지지층 중에는 투표를 포기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정동영 후보와 이명박 후보 간의 여론조사 지지율 격차가 워낙 커 투표를 해봐야 소용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공표 금지 기간 내내 대통합민주신당은 상당히 벌어져 있던 격차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고 이제는 한 자릿수까지 추격했다고 주장해왔는데, 진짜로 박빙이라는 걸 보여줌으로써 지지층 결집을 노린 것이었다.

  욕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물론 당연히 이 여론조사 브리핑은 보도하면 안 된다. 더군다나 공신력 있는 외부 여론조사 기관이 한 것도 아닌 당 자체 조사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기자를 하다보면, ‘쓰면 안 된다’ 또는 ‘기사가 안 된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남들이 쓰기 시작하면 휩쓸려서 쓸 때가 종종 있다. 기자 자신이 자신감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데스크에 ‘이런 문제가 있으니 안 쓰겠다’라고 말하는 게 싫어서이기도 하고, ‘안 쓰겠다’고 해도 데스크에서 그냥 쓰라고 해서 그렇기도 하고, 아무튼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기자실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출입 기자가 적은 곳은 그나마 기자들끼리 논의해 조절을 하는데, 국회처럼 등록 기자가 1000명이 넘는 곳은 기자들 간의 합의가 불가능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인터넷 언론에는 ○○○ 대변인이 의도한 대로 기사가 게재되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 대변인과 이 브리핑의 실행 및 의사 결정을 한 사람들이 정말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불법을 저지른 건 말할 것도 없고, 앞서 말한 언론의 이런 생리를 의도적으로 이용한 데다, 더 나쁜 건 이 브리핑을 인용 보도한 기자와 언론사까지도 범법자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태연하게 저질렀기 때문이다. 선거법은 공표금지 기간의 여론조사 공표는 물론이고 이를 인용해 보도하는 것도 금지한다.

  그리고 이게 정말 더 나쁜 짓인데… 자신들은 빠져나가겠다고 그날 밤 오후 8시경 각 언론사로 공문을 보내 “실수로 수치를 적시했다. 보도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보도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보도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는데 왜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들을 상대로 브리핑을 하나. 그리고 충분히 의도한 바를 이루고 나서 저녁 늦게 ‘실수’라고 보도 자제를 요처하다니. 정말 실수였다면 오전 브리핑 직후 기사가 나가기 시작할 때 얘기했어야지.

기사는 제각각이었다. 그들의 의도대로 수치를 포함해 쓴 곳도 있고(주로 인터넷 언론 쪽), 아예 안 쓴 곳도 있다. 수치 없이 “격차가 많이 줄었다”라는 식으로만 쓴 곳도 있다. 나는 어떻게 써야 저들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으면서도 저 나쁜 행동을 알 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대통합민주신당이 18일 선거법을 위반하면서 정동영 대선 후보가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를 오차 범위 안으로 추격했다는 여론조사 수치를 공개해 비난받고 있다. 선거법상 12일을 넘겨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는 19일 투표 종료 시까지 공개가 금지돼 있으며, 위반 시 최대 2년 이하 징역, 4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대통합민주신당 ○○○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은 이날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을 통해 “자체 자동응답 전화(ARS) 조사에서 이 후보 △△.△%, 정 후보 △△.△%로 △% 차로 좁혀졌다. 오차 범위 내 접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 대변인은 또 “수도권에서 이 후보가 급 붕괴하고 있고, 모 방송사 여론조사에서도 하루 만에 이 후보의 지지도가 △△% 급격히 추락했다. 오늘 하루에도 이 후보는 △△% 더 추락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은 브리핑 내용을 출입 기자들에게 e메일로 보내 주는 ‘대변인 브리핑’에서는 관련 수치를 모두 삭제했다. ○ 대변인은 이날 오후 8시경 각 언론사로 공문을 보내 “실수로 수치를 적시했다”며 “보도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보도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에 대해 “○ 대변인의 국회 브리핑 동영상을 확보해 조사한 결과 선거법상 여론조사 결과 공표금지 조항 위반으로 보인다”며 “조치 수준을 검토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한나라당 박형준 대변인은 “신당이 선거 막판에 허위 여론조사 결과까지 무차별 유포하고 있다”면서 “브리핑을 통해 구체적 수치를 공개한 김 대변인 등 신당 관계자들을 전원 선관위에 고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기사를 이렇게 쓰고 나름 기특해했는데, 다음날 개표 결과를 보니 그냥 무시해도 됐던 일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한 자릿수까지 맹추격했다고 했지만(물론 아무도 안 믿었다), 결과는 역대 최대라는 531만 표 차이로 졌기 때문이다.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당선자와 이회창 후보는 57만 표,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당선자와 이회창 후보의 표 차는 39만표였다.)

당시에는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민주당이 2021년 4·15 서울·부산 시장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의 중대 잘못으로 보궐선거가 치러질 경우 공천하지 않는다’라는 당헌까지 개정해가며 공천을 강행했다 참패한 걸 보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DNA가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꼭 큰 병원을 지어 치료해 주고 싶다. 


PS. ― 2007년 초였던 것 같은데 그 ○○○ 대변인이 의원 시절 각 언론사 말진(팀의 막내 기자) 몇 명과 오찬을 한 적이 있다. 후배가 다녀와서 해준 말이 인상적이어서 기록해놨는데 자신은 반장들보다 당신들(말진)과 함께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통상 대부분의 언론사 정치부는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청와대 정당팀 외교 안보팀 등으로 구성되고, 정당팀은 여당·야당팀으로 나뉜다. 이 여당·야당팀의 팀장 기자를 반장이라고 보통 부르는데, 회사에서 정한 직급은 아니고 여의도 안에서 부르는 관습적 표현이다.) 

  이유인즉, 자신이 지금 초선 의원인데 뭔가 해볼 선수가 됐을 때(아마 3선 정도를 말한 것 같다) 지금 반장들은 다 현장에 없을 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언론사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반장급은 보통 15년 차 안팎이니 그가 3선이 될 때쯤이면 여의도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도 비슷할 거라 생각하는데 당시에 각 언론사 반장은 당 대표, 원내대표 등도 무시로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초선 의원들은 반장들과 친해지고 싶어 했는데 반대로 말진들과 함께 가고 싶다고 하니 왠지 멀리 볼 줄 아는, 시야가 넓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물론 이 생각은 앞서 설명한 여론조사 발표 모습을 보며 완전히 사라졌다. 

<ifsPOST>  

 ※ 이 글은 필자가 지난 2023년 8월 펴낸 책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도서출판 북트리 刊>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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