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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구 기자가 메모한 여의도의 모든 것 <13> 겁도 없이 500조를 줄이다니…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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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10월19일 16시37분
  • 최종수정 2023년09월07일 13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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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자마자 금방 내렸는데, 언제 봤어?”

“내가 볼 때는 있던데?”

“귀신이네….”


  2006년 9월 7일 청와대와 기획예산처(2008년 기획재정부로 개편), 그리고 우리의 호프 ‘걱정 홍보처'가 발칵 뒤집혔다. 며칠 전인 8월 30일 참여정부가 총예산 1,100조 원에 달하는 국가 장기 미래 전략인 ‘비전 2030’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는데, 재원 마련을 위한 증세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예산을 축소 발표한 의혹이 있다는 기사가 난 것이다. 물론 쓴 사람은… 각종 악연으로 점철된 나였다.


 ‘비전 2030’은 노무현 대통령의 야심작이었다. 청와대는 정부 최초의 국가적 장기 발전전략이라고 자화자찬했는데, 내용이 부실하긴 했지만 이런 시도 자체는 필요하다고 본다. 당시 장병완 기획예산처 장관은 노 대통령에게 “2010년대에 선진국에 진입하고, 2020년대에 세계 일류 국가로 도약해, 2030년에는 삶의 질 세계 10위에 오르게 하겠다”라고 보고 했는데 지금 나라 꼴을 보면 전형적인 페이퍼 워크가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주요 내용은 성장과 복지의 동반성장을 위한 50개 과제를 제대로 추진해 2030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 4만9,000달러, 삶의 질 세계 10위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또 복지 분야 재정 비중도 2005년 25.2%에서 2030년 약 40%까지 높이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는데 필요한 재원은 25년간 약 1,100조 원이라고 했다. 


  내가 쓴 기사는 소요 재원이 발표한 대로 1,100조 원이 아니라 사실은 1,600조 원인데 증세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줄였고, 세부 내용도 실제 계획과 다 다르게 짜 맞춰 발표했다는 내용이다. 진짜 보고서를 입수해 면밀하게 검토하고 뜯어보고 쓴 거냐고? ‘비전 2030’은 50대 과제로 이뤄져 있는데, 그중 하나가 ‘국민연금 개혁 완료’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손을 못 대는 그 국민연금이다. 전 국가적 과제가 망라돼 있어 어느 한 사람이 보고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설사 진짜 보고서를 미리 입수했다 해도 나는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대차대조표도 볼 줄 모르는 내가 무슨 재주로 내역을 따져 실제 1,600조 원인데 1,100조 원으로 줄였다는 걸 알아낼 수 있을까.

  내가 한 것이라고는 ‘비전 2030’이 발표된 2006년 8월 30일 국정홍보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해당 발표 자료를 내려받고 화면을 캡처한 게 전부다. 그리고 며칠 후 우연히 캡처한 국정홍보처 화면을 보다가 소요 예산이 정부 발표 때와 다르다는 걸 발견했을 뿐이다.


 ‘비전 2030’은 기획예산처가 발표했기 때문에 당연히 예산처 출입 기자들이 기사를 썼다. 나는 정치부 소속으로 당시 국무총리실, 국정홍보처를 출입했기 때문에 당연히 ‘비전 2030’과 관련해서는 기사를 쓰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국정홍보처는 출입 기자들에게 보도자료도 배포하지 않았다. 단지 국정홍보처가 정부 각 부처 홍보를 총괄하기 때문에, 또 청와대의 대표적인 치적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홈페이지 첫 화면에 크게 띄우고 관련 보도자료를 올려놓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료가 소요 재원을 축소하기 전에 ‘제대로(?)’ 만들어진 ‘정본(正本) 비전 2030’이었던 거다. 공식적으로 발표한 자료와 내가 입수한 자료를 비교하니 내용의 차이가 무척 컸다. 

  전체 소요 재원은 앞서 말했고, 재원 조달 방식에 따른 국민의 조세부담률도 정본에는 △전액 국채로 조달할 경우 △세금으로만 할 경우 △국채와 증세를 병행할 경우 등을 구별해 각각의 수치를 명기했지만, 실제 발표한 자료에서는 이런 수치를 밝히지 않았다. 당시 이수원 기획예산처 재정정책기획관은 “여러 가지 재정 조달 계획안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1,100조 원으로 결정됐다. 홍보처에서 최종안을 보지 못한 채 만든 것 같다”라고 해명했다. 이 말을 듣고 심증이 확신으로 바뀌었는데, 우스운 게 홍보처에는 그런 경제 관련 보고서를 만들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다. 홍보처가 ‘비전 2030’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홍보처가 최종안이 확정되기 전에 논의 됐던 여러 가지 안 중의 하나를 받았을 리도 없다. 세상 어느 공무원이 최종안이 아닌 걸 배포하겠나. 그리고 홍보처는 이 자료를 기획예산처가 발표하기 며칠 전에 올린 게 아니라 발표 당일 오후에 홈페이지에 올렸다. 당시 홍보처 담당자는 나한테 “예산처가 준 자료를 그대로 게재한 것뿐”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왜 국정홍보처가 실제 발표한 내용과 다른 자료를 갖고 있었는지는 취재할 수가 없었다. 기사가 나가자마자 모두 입을 다물었으니까. (당시는 대통령이 기자들 만나지 말라고 불호령을 내리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단지 나의 추측으로는 원래 예산처는 1,600조 원으로 만들었는데 어떤 정무적 판단으로 급하게 1,100조 원으로 줄이는 과정에서 전달 실수가 발생한 게 아닌가 싶다. 수정된 1,100조 원 안을 유관 부처에 배포하는 과정에서 담당자가 실수로 홍보처에는 기존 1,600조 원 안을 보냈을 수도 있고, 이미 1,600조 원 안이 배포됐는데 급하게 수정하고 수거하는 과정에서 홍보처만 깜빡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같은 상상이지만 어쩌면 홍보처 안에 ‘의적’이 있어서 누군가 이 말도 안 되는 행태를 알아주길 바라고 올렸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본다.)

  아무튼 국정홍보처는 물론이고 우리 출입기자실도 발칵 뒤집혔다. 자기들 일이 아니었는데 나 때문에 물먹은 게 됐으니까. 참고로 앞서 말했지만 나도 그렇고 국정홍보처 출입 기자 중에 ‘비전 2030’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일이 아니니까. 그래서 아무도 발표 당일 홍보처 홈페이지에 들어가지 않았을 테고, 설사 들어갔어도 나처럼 캡처하고 자료를 내려받은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정본 비전 2030’이 홍보처 홈페이지에 올라가 있던 시간은 정말 몇 분이 안 됐다고 한다. 길어야 2~3분 정도? 금방 내렸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 짧은 시간에 내가 다녀갔을 줄은 몰랐던 거다. 


  기사를 쓰고 나서는 굉장히 씁쓰름했다. 1억~2억 원도 큰돈인데, 소요 재원을 500조 원이나 뭉텅이로 줄이는 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인지…. 1,600조 원 ‘정본’이 제대로 만든 거라면 하루아침에 재원의 3분의 1이 넘는 돈을 축소한 프로젝트가 제대로 진행될 리는 없을 것이다. 만약 수정본이 맞는 것이라면, 상당 기간 1,600조 원 안을 만든 실무자들은 완전히 잘못된 판단과 계산으로 정책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2022년 우리 국가 예산이 607조 원이다. 어떤 기획재정부 실무자가 500조 원이 넘게 차이 나는 예산안을 만들어왔다면 그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애초부터 제대로 실행될 수 있는 ‘비전 2030’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않았나 싶다. 그저, 노무현 정부가 이렇게 장기적인 시야와 안목을 가진 정부라는 것을 홍보하고 싶었을 뿐.

  우리가 흔히 하고, 듣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이 지도자 복은 없는데, 아직은 국운(國運)이 있어서 괜찮을 거라고. 그런데 ‘국운이’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나도 이제 지쳤다고. 이제는 내게 기대지 말고 너희 힘으로 좀 해보라고. ‘국운이’도 힘들다.    

 

<ifsPOST>  

 ※ 이 글은 필자가 지난 2023년 8월 펴낸 책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도서출판 북트리 刊>의 내용을 옮겨 실은 것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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