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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구 기자가 메모한 여의도의 모든 것 <8> 보이지 않는 손-에피소드 2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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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10월02일 16시45분
  • 최종수정 2023년09월07일 13시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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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구 기자인가요?”

“네 그런데요?”

“○○○입니다. 혹시 △△일 저녁에 시간이 되시나요.”

“네….”

 

  어이없게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서 설명하겠다고. 하… 우린 만나서는 안 되는데…. 엄청나게 중요한 취재였던 만큼 그를 만난다는 사실을 위에 보고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면 당연히 위에서는 뭔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고, 여기서 취재를 접으려던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 뭔가 나오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그의 해명 외에 아무것도 없는 취재의 끝은 뻔한 것이다.

나는 그의 해명을 위에 전달하는 것 외에는 사실상 다른 길이 없고, 차이는 지금 욕먹고 끝낼 일을 더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겪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 시간이 늘어지는 만큼 나는 더 힘들겠지. 그때 왜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수백 발의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인디언 아파치 전사가 머리에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두 차례 연기 끝에 그를 만날 수 있었는데, 청와대에 갑작스러운 상황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3년 3월 22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 한 커피집에서 마침내 그를 만났다. 

 

 “1985년 (대학에서) 제적당하고 신체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선배들이 (학생) 운동을 더 해야 한다고 해 두 차례 입영 연기를 했죠. 그때 인천 부평의 마찌꼬방(町工場·건설업계에 남아 있는 일본식 용어로 소규모 공장을 뜻한다)에 위장 취업을 했는데 대기업 위장취업을 하기 전에 기계 조작법, 노동자의 습성 등을 배우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공장이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고, 변두리 가정집 지하에 기계 몇 대 놓고 하는 곳이죠. 그때 기계를 다루다가 사고를 당해 그렇게 됐어요.”

 

  이후 두 차례 더 만났지만, 진전은 없었다. 검지 한 마디가 잘릴 정도면 당연히 병원에 갔을 텐데 그는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라고 했다. 출혈이 엄청났을 그런 큰 상처를 병원에도 안 가고 어떻게 치료했는지 설명하지도 않았다. 빨간약과 붕대로 될 일이 아닌데…. 그는 사고를 목격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그 정도 사고라면 분명 엄청난 비명을 질렀을 테고, 그의 말마따나 공장도 아닌 가정집 지하 같은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도 없었을 텐데 이해가 안 갔다.

 

  결국 나는 마지막으로, 사고를 당한 공장 주소를 알려주면 내가 수소문해서 확인해보겠다고 제안했다. 현장 목격자는 없더라도 그 정도 사고라면 분명히 직원들 사이에 소문이 안 났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랬더니 그는 “주소는 모르겠는데 위치는 기억하고 있으니 그렇게 못 믿겠다면 함께 (손가락이 잘린) 공장으로 가자. 내가 직접 (현장에서) 그때 상황을 설명해주겠다”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인 4월 5일 토요일 오전. 나와 ○○○ 실장, 그리고 1년 위 선배 기자, 이렇게 셋이 내 차(1995년 식 흰색 아반떼)를 타고 부평으로 향했다. 약간 헛갈리기는 했지만, 그는 “저 군부대 옆 언덕으로 우회전하세요”라며 비교적 정확하게 길 안내를 했다. 그리고 그가 “이 근처”라며 내린 곳은 넓은 도로(6차선 이상은 된 것 같다)가 뻥 뚫리고 상가가 밀집한 꽤 번화한 동네였다. 큰 상가가 있는 블록 뒤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던 그는 “여기쯤인데… 여기쯤 골목길이 있었고…이 근처인데 동네가 너무 변해 못 찾겠다”라고 했다. 좀 어이는 없었지만 어쩌겠나. 최면 요법을 쓸 수도 없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이걸 어떻게 보고해야 하나. 또 한바탕 깨지겠네’하는 생각뿐이었다. 오후 4, 5시쯤. 출발지인 광화문에 도착했는데, 그냥 보내기가 미안했던지 그는 “목이나 축이고 가자”라며 종로소방서 근처의 한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맥주 6병을 마시고 나왔는데, 그는 “증명하고 싶었는데 정말 미안하다. 내가 더 답답하다.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다. 한 달에 한 번은 만나는 좋은 사이가 되자”라고 했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해가 떨어지기 전에 카페에서 나온 걸 보면 그리 오래 같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서로 대화도 몇 마디 나누지 않았으니까.

 

이후에 데스크에 상황 보고를 했더니 그냥 있는 대로 쓰라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지만, 증거가 없었으니까. 정황만으로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시에 반항하다가 좀 많이 깨졌다. 그래도 어쩔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 달 정도가 지난 것 같다. 함께 부평에 갔던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 저녁 먹자는데 △일 비워둬.”

“그러지요.”

 

  그래. 취재는 꽝 됐지만, 인맥이라도 넓히자. 현 정부 실세 중의 실세인데 뭐라도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작은 한정식집에서 셋이 만났다. (인사동에 흔히 있는 일반 한정식집이다. 정확한 가격은 잘 모르겠는데 1인당 한 3만 원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반찬도 몇 가지 없었다) 그리고 식사 후에 근처 카페에서 맥주 한 잔을 더 했는데, 그곳에서 기분이 확 틀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한 명이 더 온다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들어오는 사람을 보니 (저녁 9시 반쯤 됐던 것 같다) 당시 휴대전화를 만들던 모 회사의 오너 ◇◇◇ 부회장이었다. (그 회사는 지금은 없어졌다) 

  특별히 그들이 내게 뭘 잘못한 것은 없다. (싼 거 사줘서 그런 거 절대 아니다) 아마도 당시 출범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노무현 정부가 내세운 신조와 그 정부의 실세 중의 실세라는 사람이 술자리에 재벌 회장을 불러낸다는 게 굉장히 이상하게 보여서 그랬던 것 같다. 술값 때문에 부르지는 않았을 거다. 맥주 몇 병과 마른안주 정도였으니까. 내 생각에는 그 자리 이후 자기들끼리 할 얘기나 갈 데가 따로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카페에서 나온 시간이 밤 11시는 넘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둘이 함께 어디론가 가는 것까지는 봤다. 왜 어디론가 갔다고 생각하냐면 그들이 인사동에서 종로 쪽으로 갔기 때문이다. ○○○ 실장의 집은 반대쪽이었고, 그 방향으로는 나와 선배가 갔다. 그리고 우리는 가는 길에 있던 포장마차에서 한 잔 더 했다.) 아무튼 한나라당을 재벌로부터 수백억 원의 뇌물을 받은 차떼기 정당이라며 그렇게 비난하고 집권한 사람들이 낮에 일 때문도 아니고, 밤에 재벌 오너를 오라 가라 부른다는 게 굉장히 기분 나빴던 것 같다. 청와대 실장이 기자와 저녁 먹는데 재벌 오너를 부를 일이 뭐가 있나. 계속 삐딱하게 툴툴거리고 있었는데 ◇◇◇ 부회장이 좀 불편했던지 “이 기자님, 저 보기보다 괜찮은 사람입니다. 잘 지내봅시다”라고 했다. 흥, 내가 지와 잘 지낼 일이 뭐가 있다고. 

 

  그렇게 술자리는 끝났고, 나와 선배 기자는 근처 포장마차에서 한 잔 더 하면서 엄청나게 싸웠다. 요지는 분위기 흐리게 왜 그렇게 툴툴거렸느냐는 것이었는데 나는 “씨발, 개혁 정치하겠다며 집권한 놈들이 재벌 회장 부르는 행태가 뭐 같아서 그랬다”라고 대들었다. 그리고 “당신이 취재시킬 때는 그렇게 지랄하더니 취재는 꽝 됐는데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냐?”고 마구 덤볐다. 그도 굉장히 다혈질이다 보니 서로 대판 붙었는데 물론 말로만 싸웠다.

  사적으로 ○○○ 실장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가 말했던 것과는 달리 ‘두 번째 한 달 후’는 없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데 나만 뺀 나머지 등장인물들에는 두 번째, 세 번째 한 달 후가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들이 매달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에 벌어진 상황을 보면 그러고도 남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걸 안 뒤 나는 어른이(좋은 의미는 아니다) 됐다. 세상이 눈에 보이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ifsPOST>  

 ※ 이 글은 필자가 지난 2023년 8월 펴낸 책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도서출판 북트리 刊>의 내용을 옮겨 실은 것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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