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의 리더십 : 외척제거는 계획적인가 우발적인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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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지난 12월11일부터 주말극 ‘태종 이방원’을 방영하고 있다. "고려라는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던 여말선초(麗末鮮初) 시기, 누구보다 조선의 건국에 앞장섰던 리더 이방원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하는 드라마다".
요사이 이러한 이방원의 리더십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다. 특히 이번 대선에서는 유력 후보들의 가족사가 논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태종 이방원의 리더십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1) 개국공신 명단에 빠진 이방원(1392)
태종 이방원(AD1367-AD1422)은 조선왕조 3대 왕으로 태조 이성계의 정부인 신의왕후 한씨가 낳은 다섯째 아들이었다. 원래 시호는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었는데 후대 숙종과 고종 때 시호가 더해져서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이다. 아버지 이성계와 함께 조선 건국에 공을 크게 세웠다. 이성계는 건국직후인 1392년 8월에 공신도감(功臣都監)을 설치하고 3등급으로 나눈 개국공신을 발표했는데 그 초기 개국공신 명단 52명 다음과 같았다.
(개국 1등공신 16명)
정도전(鄭道傳)·배극렴·조준(趙浚)·김사형(金士衡)
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
남은(南誾)· 남재(南在)·장사길(張思吉)·정총(鄭摠)·
조인옥(趙仁沃)·조박(趙璞)·오몽을(吳蒙乙)·정탁(鄭擢)
(개국 2등공신 14명)
윤호(尹虎)·이민도(李敏道)·박포(朴苞)·정지(鄭地)
조영규(趙英圭)·조반(趙胖)·조온(趙溫)·조기(趙琦)
홍길민(洪吉旼)·유경(劉敬)·정용수(鄭龍壽)·장담(張湛)·
조견(趙狷)·황희석(黃希碩)
(개국 3등공신 22명)
안경공(安景恭)·김곤(金稇)·유원정(柳爰廷)·이직(李稷)·
이근(李懃)·오사충(吳思忠)·이서(李舒)·조영무(趙英茂)·
이백유(李伯由)·이부(李敷)·김로(金輅)·손흥종(孫興宗)·
심효생(沈孝生)·고여(高呂)·장지화(張至和)·함부림(咸傅霖)
한상경(韓尙敬)·임언충(任彦忠)·황거정(黃居正)·장사정(張思靖)·
한충(韓忠)·민여익(閔汝翼)
(2) 제1차 왕자의 난과 개국공신으로 편입(1398)
이성계의 부인은 두 명이다. 본 부인은 신의왕후 한씨로 조선 개국 직전인 1391년 사망했다. 두 번째 부인은 개국하기 십여 년 전 맞은 신덕왕후 강씨로 고려 말 여러 왕비를 배출한 당대 최고의 가문이면서 경남지방의 토호세력 출신이다. 이성계는 왕이 된 후 곧바로 강씨를 신덕왕후로 세우고 그가 낳은 막내아들 의안대군 이방석(AD1381-1398)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AD1392년 9월) 이방원의 생모인 신의왕후 한씨는 신덕왕후 강씨보다 1년 늦은 1399년에야 왕비로 추존되었고 서열상 강씨의 아래로 취급되었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이런 조치에 대해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위에 정권을 장악한 정도전 무리들이 요동확장을 위한 전쟁을 계획하면서 개국공신과 종친들의 권한과 사병을 없애려하자 불만은 쌓여갔고 그런 불만을 모를 리 없는 정도전 무리들도 이방원 세력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398년 8월 정도전과 남은 등은 이성계가 병독하다는 이유를 들어서 모든 왕자들을 궁궐로 소환했다. 이방원은 이 소집이 자신들을 해치려는 모함이라고 판단했다. 이방원은 이방의와 이방간 등 바로 위 두 형을 포섭하고 이숙번, 조준, 박포 등 측근은 물론 민무구, 민무질 등 처남들과 함께 정도전과 남은 무리를 죽였다. 바로 위 두 형 이방의(芳毅)·이방간(芳幹)과 자신을 1등 개국공신으로 추록하여 개국공신은 모두 55인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그리고 변란의 책임을 세자와 그를 끼고 돈 정도전에게 돌리면서 왕세자 이방석을 폐위시켰다. 이방원은 자신이 왕세자 자리를 찬탈했다는 혐의를 벗기 위해 왕세자 자리를 무능한 둘째 형 이방과에게 넘겨주었다. 이성계는 그 다음 달 9월 왕위를 정종대왕 이방과에게 넘겨주고 함흥으로 떠났다.
(3) 제2차 왕자의 난과 왕위 등극 (AD1400)
이방원의 바로 위 형 회안대군 이방간(AD1364-1421)은 1399년 정종 1년에 서북방면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정종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위계승에 대한 욕심이 없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2등 공신이 되어 서훈에 불만이 많았던 박포와 손을 잡고 이방원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이방간의 군대는 초기에는 승리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은 패하여 아들 이맹중과 함께 포로가 되었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이방간은 여러 곳으로 유배를 옮겨 다녔는데 신하들이 강력하게 이방간을 탄핵했지만 죽이지는 않았고 1421년 세종 3년 57세에 병사하였다. 이방원은 제2차 왕자의 난을 수습한 뒤 바로 왕위에 올랐다.
(4) 양녕의 왕세자 옹립(1404)과 양위 소동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1394-1462)은 태종 4년(1404) 8월 8일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 때 나이 열한 살이다. 양녕은 천성이 학문을 싫어하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공부를 안 한다고 태종이 본보기로 시종까지 때려 봤지만 양녕은 오로지 활쏘기와 사냥과 여색만 좇았다. 그런데도 태종은 양녕을 믿었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나 여자를 밝히는 것이 자기를 꼭 빼 닮았다고 느껴서 그랬을까. 양녕은 태종에게 매우 소중한 기억을 새겨주는 아이였다. 태조 이성계가 오직 후비 강씨만 총애하자 정도전, 남은과 같은 강씨 세력들이 오로지 태종의 목만 노리던 위태롭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태종의 유일한 위안은 양녕을 업어주고 안아주며 같이 노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는 아이였다. 이제 열다섯의 나이로 의젓하게 북경을 다녀오는 세자 양녕의 모습을 보면서 태종은 얼마나 대견하고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내가 네 몸의 장대함을 보니 예전과 많이 달라졌구나.
(吾見汝形體壯大 殊異乎昔日 : 태종 8년 4월 2일)”
명나라 황제도 어린 세자를 보내 하례한 태종의 명에 대한 배려에 감복했다고 했다. 양녕을 극진히 대접하라고 명령했다고 수행원이 보고하였다. 양녕은 태종의 든든한 후계자 같아 보였다. 양녕에게 왕위를 물려줘도 되겠구나 싶었다.
사실 태종은 왕위를 양녕에게 물려주겠다고 한 바탕 소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태종 6년 8월 18일). 아버지 태조의 환심을 사지 못해 늘 초조해하던 태종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홀가분한 몸으로 아버지 태조곁을 시종하면 혹시 환심을 사지나 않을까 싶어서 전위하려고 했었다. 또 한 번은 밖에 나와 침상에서 잠을 자던 중에 어디선가 곡소리가 나기에 갑자기 놀라고 겁이나 참회하는 의미로 왕좌를 물려주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태종은 왕좌에 구속받지 않고 여기 저기 덕수궁 인덕궁에도 다니면서 놀고 싶다고 했다. 사냥도 하고 유람도 하면서 내 뜻에 맞게 살고 싶다고 했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 준 것을 보면 자유로운 몸이 되고 싶다는 태종의 고백은 사실이다.
(5)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본심
태종은 왕비 원경왕후 민씨의 네 남동생,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를 싫어했다. 민무구, 민무질 두 형제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운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이었다.
(정사 1등공신 9명)
·김사형 ·이거이 ·이무
·조박 ·조영무 ·조준
·이화 ·이방의 ·이방간
(정사 2등공신 12명)
·김·로 ·민무구 ·민무질 ·신극례
·심종 ·이복근 ·이양우 ·이지란
·이천우 ·장사길 ·조온 ·장철
그러나 이들 민씨 형제를 믿지 못했다. 그 첫 번 째 이유는 인사청탁 문제였다. 정종이 왕으로 있을 때 이들 민씨 형제가 영의정 조준에게 좋은 자리를 부탁했었다. 그러나 조준이 이를 들어주지 않자 민씨 형제는 조준을 모함하여 옥에 가두게 하였다(정종 2년 7월).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격노했다. 형 정종에게 즉각 조준을 풀어주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태종은 민무질, 민무구 형제가 장차 국사를 그르칠 인간이라고 생각하였다.
태종은 처남 민씨 형제들이 모두 위험하고 불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은 태종이 어린 세종의 글씨를 처남 민무구에게 자랑해 보인 적이 있었다. 그러자 민무구는 곁에 있던 같은 패거리 신극례에게 눈짓하면서 조카인 어린 세종의 글을 건네주었다. 신극례는 술에 취한 척하며 세종의 글씨를 찢어 버렸다(태종 5년 겨울). 이 일로 태종은 민무구의 본심이 결국에는 세종을 해치자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 1406년 태종이 왕위를 양녕에게 넘겨주려는 첫 번째 양위 소동이 있었을 때(태종 6년), 유독 민무구는 펄쩍뛰면서 그렇게 된다면 자기는 군권까지 던져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왕권을 지키는 역할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항명아닌 항명인 셈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어린 세자를 보필해야할 사람이 군권을 내 놓겠다는 것은 그의 진심이 아니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또 한 번은 민무구가 태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정승들이 임금의 양위 생각을 뒤집을 수 없으니 임금이 분부하신대로 양위의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자신에게 했다는 것이었다.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이 그 말을 듣고 “심히 기뻤다.”고 썼다. 진실로 양위를 원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확인해 보니 정승들 얘기는 그게 아니었다. 다들 결사코 반대했다는 것이었다. 민무구에게 태종이 며칠 전에 모든 정승들이 양위를 승복한다고 했다는데 어떻게 된 말이었냐고 물었다. 민무구가 변명했다. ‘모든 정승’이 아니라 정승 한 사람의 얘기를 들었던 것이라고 발뺌했다. 민무구의 속내는 태종이 물러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세자의 뒤에서 실권자가 되려는 음흉한 야욕을 갖고 있음을 알아챘다. 결국 태종은 양위를 없었던 것으로 발표했다. 그러자 모든 신하들이 좋아했지만 유독 민무구 일당만은 언짢은 표정이었다.
태종은 더 정확하게 민무구의 마음을 떠보고 싶었다. 민무구를 불러서 물었다. 세자 양녕대군 이외의 형제들이 궁궐에 있으면서 왕을 자주 만나게 되면 세자에게나 신하들에게 별로 좋을 것이 없을 테니 세자 이외의 모든 왕자를 혼인을 시켜 궐 밖으로 보내면 어떻겠냐고 슬쩍 물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민무구가 섬뜩한 말을 했다. 왕자를 부추겨 난을 선동하는 신하를 막는 것이 왕자를 내보내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민무구가 말하는 것이었다. ‘왕자를 부추겨 중간에서 난을 선동하는 자?’ 소름끼치는(송연,悚然)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의 과거행실을 풍자하는 말 같기도 하고 세자와 형제들 간의 골육상쟁을 예고하는 것 같기도 했다. 민무구가 비슷한 말을 전에도 한 적이 있었던 게 갑자기 확 떠올랐다. 태종이 전에 한 아들은 대궐 이쪽에다 집을 지어주고 다른 아들은 대궐 저쪽에 지어 주어 자주 드나들겠다고 말하자 민무구는 “형제 사이에 유혹하여 부추기는 자들이 없어야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같은 말이었다. 민무구는 왕자와 왕자 사이에 정권 다툼을 기정사실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민무구는 앞으로 왕자들 사이에 피바람을 불러 올 사람이라고 태종은 판단했다.
(6) 민무구 일당의 숙청(1407)
민무구의 이런 행동, 즉 왕자들 사이의 갈등과 반목을 초래할 우려는 태종이 오래 전부터 눈여겨 봐오던 행동이었다. 이제 이들을 숙청해야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민무구 일파 숙청의 선봉에는 개국정사좌명공신 영의정 이화가 나섰다. 이화는 민무구의 오만불손 방자한 행동을 결코 묵과할 수 없다고 탄핵했다. 특히 “세자 이외에는 다른 똑똑한 왕자는 없어도 좋다.”거나 “똑똑한 왕자가 있으면 난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등 불경스러운 말을 서슴지 않았다고 몰아 세웠다(태종 7년 7월 10일). 태종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사실은 자기가 영의정 이화에게 시킨 일이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민무구 탄핵상소가 빗발쳤다. 전국의 모든 신료들이 탄핵상소를 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간, 형조, 의정부, 공신, 삼성(三省,사헌부, 사간원, 형조)이 연이어 탄핵상소를 올렸다. 대사헌 윤향은 민무구를 처벌하지 않으면 사직하겠다고 했다. 이미 죽은 신극례를 부관참시하자고도 했다.
이런 와중에 민무구의 누나 원경왕후 민씨(태종의 부인)가 올케 민무질 부인 한씨를 몰래 궁으로 부르는 일이 있었다(태종 7년 11월 10일). 매우 민감한 때에 의심받을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다음날 태종은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파면(직첩회수)하고 더 이상 죄는 묻지 말라고 지시했다. 대간은 더 극렬하게 죄를 물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태종은 듣지 않았다. 대간은 총 사퇴를 해버렸다. 파면되어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불쌍해진 태종은 쌀 40석을 보냈다(태종 8년 2월 25일).
6개월 뒤 태종의 장인이요 민무구의 아버지 여흥부원군 민제가 죽었다(태종 8년 8월 15일). 대간의 탄핵상소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장인 문치를 보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태종은 드디어 민무구, 무질 두 형제를 각각 옹진군과 삼척으로 귀양을 보면서(태종 8년 10월 16일) 쌀 30석을 보냈다(태종 8년 11월 21일). 그리고 그들이 귀양가있는 풍해도(지금의 황해도)와 강원도 도관찰사에게 경작할 땅을 주라고 명령했다. 민무구, 민무질 두 형제가 살던 서울 집 자리는 헐어서 일본 사신을 대접하는 동평관과 서평관을 지으라고 명령했다(태종 9년 2월 26일).
태종은 왕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왕자들은 서로 싸우지 말고 꼭 화목하게 지내라고 당부했다. 누가 이간질 하더라도 절대로 믿지 말 것이며 서로 반목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외삼촌과 같은 측근사람을 생각하면 잠시라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곁에 있던 지신사 황희도 세자에게 말했다. 태종의 이 말을 꼭 잊지 않으시면 만세의 복이 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세자 양녕은 물론 세종도 곁에서 이 말을 깊이 새겨듣고 있었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 대한 대사헌, 사헌부, 사간원의 상소는 그래도 그치지 않았다. 상소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도 소용이 없었다. 민무구, 민무질의 주변 인물에 대한 상소도 이어졌다. 정사 일등공신 이무도 태종의 1차 왕자의 난(무인년의 난)에 공을 세울 당시 정도전과 이방원 양쪽에 다 눈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이유로 목을 잘랐다. 그리고 민무구 형제는 더 먼 제주도로 보냈다(태종 9년 10월 5일). 민무구 일당을 지지하는 윤목 등도 모두 처형했다(태종 10년 1월 30일). 종친 백관들의 극렬한 요구에 못 이겨 태종은 결국 민무구, 민무질 두 형제를 제주에서 자결토록 명하였다(태종 10년 3월 17일). 단죄한지 2년 4개월 만에 죽인 것이다. 그리고 6년 뒤에는 남은 두 형제 민무휼과 민무회도 모두 자진토록 하였다(태종 16년 1월 12일). 이들 형제에게 극형을 내릴 수 없다고 머뭇거렸던 태종에게 ‘수많은 업적 중에 티끌과 같은 아주 작은 흠(백중흑점,白中黑點)’일 뿐이라고 신하들은 외쳐댔다.
(7) 양녕대군과 충녕대군
이제 세자 양녕의 길은 탄탄해졌다. 세자가 집권하면 권력을 농단할 외삼촌 민무구 일당이 제거된 것이었다. 태종이 세자 양녕과 여러 대군 공주들과 함께 망년회를 열고 있던 중이었다. 태종은 충녕에게 싯귀를 주면서 해석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충녕은 기막히게 시를 풀어 뜻을 해석했다. 태종이 열여섯 살 충녕을 자랑스러워하며 세자에게 말했다.
“장차 너를 도와 큰일을 해결해 낼 사람이다.
(將佐汝斷決大事者也 : 태종 13년 12월 30일)”
양녕도 동생이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태종은 충녕에게 열심히 인생을 즐기라고 말했지만 앞으로 별 다른 역할과 할 일이 없을 충녕이 아깝긴 했다. 그러나 충녕은 마냥 즐거웠다. 서화, 화석(化石), 악기, 장난감 등 온갖 재미에 탐닉했다. 충녕이 유난히 악기를 잘 탔으므로 세자도 그것을 동생에게 배웠다. 두 형제 사이는 매우 화목했다. 그러나 두 형제가 장성하면서 자질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양녕은 멋 부리는 것을 좋아했다. 잔뜩 차려입고는 시종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옆에 있던 충녕이 형을 꼬집으며 말했다.
“먼저 마음을 바로 하신 다음에 모양새를 가꾸시기 바랍니다.
(願先正心 而後修容 : 태종 16년 1월 9일)”
이 말을 곁에서 들은 시종들은 하나같이 탄복했지만 양녕만은 불쾌하고 부끄러웠다. 어머니 원경왕후에게 충녕은 매우 어질고 현명하여 대사를 함께 의논할 상대라고 말하긴 했지만 속마음은 시원스럽지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가 충녕을 대견하게 생각하고는 양녕에게 들을 말을 태종에게 전했지만 태종도 개운치가 않은 것은 양녕과 매 한가지였다.
하루는 태종이 “비가 오는 날 집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길 떠난 가족을 생각할 것이다.”라고 하자 충녕은 바로 <시경,詩經>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황새가 논둑에서 우니 아낙은 방안에서 탄식하네.
(鸛鳴于垤 婦嘆于室 : 태종 16년 2월 9일)”
기가 막힌 대답이었다. 열아홉 젊은이가 즉석에서 <시경>을 외우다니 이렇게 총명할 수가 있을까. 태종은 기쁜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세자가 (충녕을) 따라 갈 수가 없겠구나.
(非世子所及 : 태종 16년 2월 9일)”
양녕은 아버지의 충녕 칭찬에 못마땅해 할 수밖에 없었다.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忠寧不猛 : 태종 16년 2월 9일)”
태종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비록 용맹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중대사에 임하여 큰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雖若不猛 臨大事 決大疑 當世無與爲比 : 태종 16년 2월 9일)”
(8) 양녕대군의 패륜
양녕은 열네 살 되는 태종 7년(1407)에 김한로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열일곱 살 때부터 외도에 탐닉했다. 잔치에서 봤던 봉지련이라는 기생을 몰래 궁으로 불러들였다(태종 10년 11월 3일). 궁으로 기생을 불러들이다니! 그것도 세자라는 사람이. 경악한 태종은 세자 측근들에게 엄한 벌을 주는 한편 봉지련에게는 비단을 주어 무마하려했다. 그러나 양녕은 담을 타넘고 빠져나가 봉지련을 만났다. 시종들이 극구 말렸지만 궁 바깥에 측근 앞잡이(은아리, 이오방)까지 포섭해 놓고서는 수시로 담을 넘어 외도를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궁 안에서 금지된 매를 기르는가 하면 수시로 기생파티를 열었 다. 주변 모두가 기겁하여 말렸지만 그걸 들을 양녕이 아니었다. 결국 태종이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양녕의 측근들에게 책임을 물려 엄한 징계를 내리려 하자 양녕은 단식투쟁으로 태종에게 대들었다. 결국 단식을 풀라고 태종이 설득하며 애걸하는 상황까지 되어 버렸다.
양녕은 이제 태종을 갖고 놀기 시작했다. 기생을 동궁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물론 큰 아버지 정종의 기첩 초궁장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큰아버님 여자라는 것을 몰랐지만 알고 나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태종은 격노했다. 초궁장을 쫒아내긴 했지만 그 다음에는 칠점생이라는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자는 양녕의 큰 매형 이백강의 애첩이었다. 충녕이 그런 양녕을 저지하고 막았다.
“어떻게 일가끼리 저렇게 서로 통할 수가 있습니까.
(豈可親中 自相如此也 : 태종 16년 3월 20일)”
충녕은 여러 차례 양녕을 말렸다고 했다. 양녕도 하는 수없이 충녕의 말을 듣긴 했지만 속으로는 분을 삭이며 “나와 너의 도는 다르다!”고 내뱉었다고 기록되어있다(태종 16년 3월 20일). 초궁장과 칠점생 다음으로 양녕에게 나타난 여자는 곽선의 첩 어리였다. 어리를 양녕에게 소개한 사람은 측근 바람잡이 이오방이었다. 이오방은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곽선의 조카사위 권보에게 부탁했고 권보는 자기 첩을 통해 어리에게 접근했다. 처음에는 어리가 거부했다. 그러나 양녕은 어리에게 선물을 보냈고 어리는 자기 양자인 이승에게 그 사실을 일렀다. 그날 밤 양녕은 이승의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가 이승을 협박하고 어리를 납치하여 결국 궁으로 데려왔다(태종 17년 2월 15일).
이 사실은 우연하게 태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양녕의 장인 김한로의 종이었던 전별감 소근동이 동궁 무수리와 사통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김한로가 태종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국문을 당하던 소근동은 엉겁결에 양녕과 어리의 관계를 실토해 버린 것이다. 태종은 격노했다. 이원과 조말생을 불러 ‘태갑(太甲)의 고사’를 본받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태갑의 고사’란 은나라 시조 성탕의 손자 태갑이 즉위 후 3년 간 포악한 정치를 한 까닭에 이윤이 그를 내쳤는데 3년 뒤 반성하고 돌아와 성군(태종)이 되었다는 고사를 말한다. 즉, 세자를 당분간 내 쫓은 다음에 다시 불러들이자는 것이었다.
이원 변계량 등 태종의 대신들은 양녕의 품성이 좋으므로 주변 인물을 제거하고 교육만 잘 시키면 될 것이므로 굳이 밖으로 내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대신 양녕은 스승 변계량의 설득으로 긴 반성문을 썼다(태종 17년 2월 22일). 그리고 조상 종묘에도 반성하는 글을 올렸다. 물론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변계량이 대신 쓴 것이다. 그리고 양녕 곁에서 비행을 부추긴 바람잡이 구종수, 구종지, 구종유 형제와 이오방을 참하였다(태종 17년 3월 5일). 임상좌의 양녀를 양녕이 간통한 사실이 또 드러났지만 그 건은 덮어두기로 했다.
여자문제가 막 아물려고 하던 차에 또 사건이 불거져 나왔다. 방유신의 손녀가 미색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는 양녕이 그 집을 잠입하여 내통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곽선의 첩 어리를 몰래 궁 안으로 다시 불러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리가 임신하자 세자빈 김씨의 할머니가 어리를 데리고 궁 밖으로 나가 아이를 낳기까지 하였다. 태종은 한 참 동안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지신사 조말생을 불러 말했다.
“세자의 행동이 저 모양이니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然世子之行 至於如此 奈何奈何 其將奈何 : 태종 18년 3월 6일)”
(9) 양녕폐위와 충녕대군의 세자책봉(1418년 6월)
개성에 와있던 태종은 일단 양녕을 서울로 내쫓고 왕을 알현하지 못하도록 했다(태종 18년 5월 10일). 서울로 쫓겨 가던 양녕과 충녕이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양녕이 버럭 화를 내며 “어리의 일을 네가 고자질했지?”라고 다그쳤다. 충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동안 서울로 돌아가던 양녕을 태종이 다시 불러 꾸짖자 화가 난 양녕은 태종에게 대들었다. 충녕이 극구 말렸지만 분을 삭이지 못한 양녕은 태종에게 분노에 찬 상서를 올렸다.
“ ... 여자를 궁궐로 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버지나 할아버지 태조도
여자를 모두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 들인 것이 아니지 않는가.
또 그 여자를 내보내면 밖에서 욕먹고 박대당할 것 같아 궁 안에 둔 것인데,
전하가 여러 여자를 내쫓으므로 바깥에서는 원망이 가득한데
왜 전하 잘못은 모르고 있는가.
착한 일을 하라고 책망을 해도 꾸짖으면 정이 떠나는데
그 보다 더한 불행은 없지 않지 않는가.
아직까지 악기의 줄을 일부러 끊는 일을 하지는 않았으며
앞으로도 계속 음악과 여색을 참을 생각이 없으니 이대로 살겠다.
내가 앞으로 큰 효자가 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전하는 장담하는가.
장인 김한로는 전하의 죽마고우인데
그 우정을 저버리는 것은 어찌 포악한 일이 아닌가.
그러면 김한로 같은 공신들이 모두 위태롭다고 느낄 것 아닌가.
앞으로 스스로 새로운 길을 가서 털끝만큼도 전하가 심려하지 않도록 하겠다”
(태종 18년 5월 30일).”
이것은 반성문인가 협박문인가. 태종은 기겁하여 할 말을 잊었다. 양녕에게 더 이상 한 가닥의 희망도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몇 번 더 설득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의정부와 육조와 삼군도총제부와 삼공신 등 대소신료 모두에게 양녕의 세자폐위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도록 했다(태종 18년 6월 2일). 태종은 바로 그 다음날 양녕을 폐세자하여 경기도 광주로 내쫓고 대신 충녕을 세자로 세웠다(태종 18년 6월 3일). 양녕의 아들로 세자를 삼는 생각도 했지만 어진 충녕이 세자가 되는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10)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다.(1418년 8월)
태종은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고 나서 한 달 만인 태종 18년 7월 6일 전격적으로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겠다고 발표했다. 태종은 이미 여러 번 전위의 뜻을 밝혔던 적이 있었다. 태종 6년 8월 18일에 처음 꺼냈었고 그 다음은 태종 9년 8월 11일과 태종 10년 10월 19일의 양위 소동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네 번째 양위는 달랐다. 똑똑하고 든든한 충녕이 세자로 책봉된 데다가 가뭄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하늘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는 것 같기만 했다. 이제 물러나야 할 때라고 직감했다. 사냥을 즐기는데다 병도 있고 또 아끼는 성령마저 죽었으니 좀 쉬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태종은 여섯 대언을 불러 양위할 뜻을 분명하게 말했다. 모든 신료들이 양위만은 안 된다고 말렸다. 영의정 한상경,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 육조 판서 모두 반대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태종은 양위의 문제는 신하들이 간섭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였다. 대언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렸지만 다 내보냈다. 지신사 이명덕에게 국보(옥쇄)를 가져오라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그것을 충녕에게 넘겨주었다. 충녕이 머뭇거리고 망설이자 지신사 이명덕이 “성상의 뜻이 결정되었으니 효를 다하여 받으시라.”고 거들었다.
(11) 세종의 처족 심온 제거(1418년 12월)
태종은 옥새를 충녕에게 넘긴 뒤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상왕이 된 후에도 병권과 인사권은 쥐고 있었다. 그런데 항간에는 이상한 이야기들이 돌았다. 세종의 장인 심온 주변에 너무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는 것이었다. 1418년 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장인인 영의정부사 심온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연도에 몰려 환송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병조참판 강상인이 자신에게 앞서서 세종에게 먼저 정세보고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병조좌랑 안헌오는 심정(沈泟)이 박습·강상인과 더불어 사사로운 말로 ‘이제 호령이 상왕과 세종 두 곳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한 곳(세종)에서 나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이것은 당시 병권을 갖고 있던 상왕 태종에 대한 비판이었다. 태종은 강상인 무리를 잡아들여 처형하고 그 우두머리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간 심온을 지목하였다. 심온은 자신에게 극형이 떨어질 것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도망가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에서 체포된 뒤 수원(水原)으로 압송되어 사약을 받고 처형되었다. 나이 44세이다. 이 사건은 심온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걱정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이 무고한 것으로 밝혀져 문종 때 관작이 복구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12) 이방원의 척족 제거, 계획인가 심리적 우발인가?
태종 이방원이 본인의 처족과 아들 세종의 처족을 잔인하게 처단한 것이 과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되었던 것인가, 아니면 남을 믿지 못하고 충동에 휩싸이기 쉬운 성격적 결함에 의한 것이었는가는 이방원의 리더십을 평가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만약 조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계획적 제거라면 이방원의 리더십 또한 계획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충동적이고 과격한 성격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리더십이라고 평가할 것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오랜 기간 동안 이방원이 겪은 극도의 심리적 불안 상태를 이해하는 일이다. 1392년 건국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개국공신 명단에도 들지 못하고 또 실권세력인 정도전 무리들에게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지낸 1398년까지 6년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 6년 동안 이방원은 극도의 불안감과 피해의식 속에서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적들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도리어 역으로 죽는 상황을 6년이나 겪어야 했다. 이런 기간 오직 유일한 낙은 양녕과 충녕 등 어린 아들을 데리고 노는 일이었다. 물론 1398년과 1400년의 왕자의 난을 통해 집권에는 성공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와 등을 돌리고 배다른 형제 및 무수한 과거의 친구들을 죽인 것에 대한 자괴감과 민망함이 얽혀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심리상태는 극도로 불안했다고 보인다.
그런 심리적 불안 상태는 곧바로 왕위를 양위하겠다는 태도로 나타났다. 태종은 즉위한 지 6년 이 되는 1406년 이후 여러 번 양위를 하려고 시도했고 또 실제로 1418년 양위를 단행했다. 태종이 불가피하게 양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이유는 정신적 압박 혹은 정신질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러 번 악몽을 꾸었고 불길한 징조를 경험하기도 했다. 따라서 양위를 기정사실로 한다면 양위를 하고나서 왕권이 흔들릴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왕권강화를 위한 선제적인 정적 불안 요인을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양위를 했을 때 발생할 왕권의 약화를 어떻게 예방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는 점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태종이 민씨 형제와 심온 무리를 사전에 가혹하게 제거한 것은 심리적인 강박 혹은 정신적인 불안감에서 나온 우발적인 행동의 결과였을 가능성이 높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여러 가지로 행태나 언사로 볼 때 이씨 왕권에 불안 요인이었던 것이 확실했다. 양녕을 제외한 다른 아들을 경시하는 태도라든지 겉과 다른 말을 함부로 내뱉는다든지 여러 행동으로 볼 때 믿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왕권이 아니라 이방원 자신이 마음 놓고 양위를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다만 장인 민제가 살아있으니 그들을 어찌 할 수가 없어서 민제가 1407년 죽기까지 기다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민씨 형제를 1410년 제거하고 나서도 한 참 뒤인 1418년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를 했지만 태종은 여전히 인사권과 병권을 쥐고 있었다. 양위를 했지만 왕권이 흔들릴 이유는 없었다. 그런 태종은 세종이 즉위한 지 넉 달 만에 병조참판 강상온과 심온을 갑자기 처단했다. 강상온은 병조참판이니까 병권을 사실상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고, 심온 또한 아버지 심덕부와 함께 개국의 공이 있었고 스스로 병조에서 관료를 했기 때문에 병권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병권을 가진 자에 대한 태종의 불안감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판단된다. 특히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은 태종의 입장에서 병적으로 사후가 갑자기 걱정되어 행동에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태종의 심리적 강박상태에서 억지로 강상온과 심온 무리를 역모로 엮어 제거했던 것이라고 판단된다. 나중에 강상인과 심온의 역모는 무고였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태종의 처족 제거는 계획된 거사가 아니라 심리불안과 강박에 의한 무리한 살육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 결과는 세종에서 단종에 이르는 37년 동안 왕권 내부에 큰 변란이 없도록 하는데 우연히 기여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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