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6-2: 전한(前漢) 원제 유석(BC75-BC49-BC33) <I>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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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둘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38> 죄를 후회하고 황제의 부름으로 기주자사로 나선 장창张敞(BC53)
양운이 허리가 잘려 죽는 형벌을 당한 뒤 공경들은 그와 가까이 지냈던 장창을 양운의 무리라고 참소하여 자리에서 축출하라고 주장했다. 황제는 장창의 재능을 아까워하며 그들의 주장을 썩히고 묵혀 두었다. 장창은 부하 서순으로 하여금 수사하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서순이 그 내용을 집에서 누설하였다.
“ 임기가 오일 밖에 안 남은 경조윤인데
검사할 일이 무엇이냐.”
장창은 그 사실을 듣고 즉시 관리를 시켜 서순을 하옥시키고 주야로 심하게 수사한 끝에 서순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서순의 죽음이 가까워오자 장창이 주부를 시켜 교서를 가지고 서순에게 말했다.
“ 오일짜리 경조윤이 어쨌다는 것인가.
겨울이 거의 다 지나가게 되었으니
연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서순을 죽인 다음 기시에 처했다. 봄이 되어 억울한 옥사를 조사하는 사자가 전국을 순회하게 되었는데 서순의 가족들은 서순의 시체와 장창의 편지를 가지고 원옥사자에게 호소하면서 장창이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장창에게 유리하도록 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장창이 대궐에 들어와 인수를 반납하고 스스로 도망치듯 물러나왔다.
장창이 물러난 몇 달 뒤 경조의 백성들과 관료들이 해이해지면서 소동이 여러 번 일어났고 또 기주 방면에서 큰 도적떼가 일어났다. 장창의 능력을 생각한 황제는 즉시 사자를 보내 장창을 소환했다. 장창이 큰 죄를 지었으므로 사신이 집에 들어오자 온 가족은 무섭고 떨리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장창은 웃으면서 말했다.
“ 내 몸은 평민이 되어있으니 잡으러 온다면
당연히 군 관리가 체포하러 올 것이다.
지금 황제의 사자가 왔으니
분명히 나를 다시 쓰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행장을 차려입고 사자를 따라 가마에 오른 장창은 곧바로 서한을 황제에게 올렸다.
“ 신이 전에 다행히 은총을 입어 경공의 반열에 있었습니다.
경조윤으로 있으면서 서순을 죽인 죄를 입었습니다.
서순은 본래 제가 여러 번 후하게 대하던 관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탄핵을 당하자
저의 수사 명령을 받고 ‘오일짜리 경조윤’이라고 비웃으면서
배은망덕하면서 풍속을 상하게 했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고한 사람을
법을 구부려 죽인 것이라서 바르지 못한 것이니
비록 밝은 법에 따라 국문을 당하여 죽는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황제가 장창을 만나보고 기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장창이 부서에 도착하자 도적들은 모두 종적을 감추었다.
<39> 선제에게 불만족인 황태자(BC53)
황태자 유유인劉柔仁은 온유하고 유학을 좋아하였는데 황제가 법관을 다수 뽑아서 쓰면서 형을 내리는 것으로 밑의 관리를 다스리는 것을 보았다. 마침 연회에서 황제를 시종하면서 조용하게 말했다.
“ 폐하께서는 내리는 형벌이 너무 심합니다.
마땅히 유생들을 등용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때 선제 나이는 서른여덟, 황태자는 스물 둘이었다. 선제는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했다.
“ 한나라에는 고유의 제도가 있다.
본래 패도와 왕도가 섞여 있어서
어떻게 주나라처럼 덕정과 교화만 따를 수가 있겠느냐.
또 저 세속적인 유가들은 시의적절한 방도를 찾지 못하여
오래 된 것은 무조건 옳고 지금 것은 무조건 그르다고만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명분과 실리에 어둡기만 해서
지킬 것도 모르는데 어찌 그들에게 위임하겠느냐 .”
사마광이 이 부분에 대해 선제의 생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왕도와 패도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옛 적 삼대시대 융성은 예악을 중시하였고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는 것은 오직 천자로부터만 나왔으니 이를 왕도라 합니다.
천자의 힘이 미약해지고 제후를 다스릴 수 없게 되면서
다른 나라를 거느리고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제후가 나타나서
복종하지 않는 사람을 토벌하면서 왕실을 지켰는데 이것을 패도라 했습니다.
둘 다 모두 행동의 바탕은 어짐을 근본으로 하고 의를 기본으로 하며 本仁祖义
현명한 사람을 임명하고 능력을 존중하며 任贤使能
잘한 것을 포상하고 잘못을 징벌하고 赏善罚恶
난폭한 것을 금지하고 반난을 일으킨 것을 주살하는 것 禁暴诛乱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름이나 직위에는 존비가 있고
덕택에는 깊고 얕음이 있으며
공업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행정명령에는 넓고 좁음이 있습니다만
흑백같이 분명한 것이 아니고
단맛과 쓴맛 같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나라가 삼대처럼 되지 못한 것은
군주가 하지 못해 그런 것이지
선왕의 법도가 후에도 적용할 수 없는 것이라서가 아닙니다.
대저 유가의 법에는 군자가 있고 소인이 있습니다.
저 속된 유자는 함께 통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진짜 유자를 구해서 등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을 뿐입니다.
후직이나 설이나 고요나 백익이나 이윤이나 공자는 진정으로 대유입니다만
한나라가 등용해서 이런 사람들을 썼다면
어찌 그 공이 이 정도에 그치고 말았겠습니까.
선제가 태자를 나약하고 정치의 본질에 어두워
우리 가문을 필히 어지럽게 할 것이라고 한 것은 옳은 말이지만
왕도가 불가능하다고 한 것이나
유자는 쓸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심히 잘못된 말이다.
자손을 훈시하여 미래를 위해 법을 바로 세우지 못하는 잘못이다.
준양헌왕 유흠은 선제의 둘째 아들로 첩여 장씨 소생이다. 총명하고 활달하면서 많은 재능을 지녔기 때문에 황제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그 생모 장첩여 또한 선제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황제와 황태자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황제는 유흠을 진짜 자신의 아들이라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장차 준양헌왕을 세울 생각을 했지만 자신이 어려울 때 도와 준 허씨를 생각하고 또 허씨가 즉위 직후 곽씨 일가에게 살해된 것이 안타까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한찬 지나 위현성을 준양왕국 중위로 임명하고 현성이 작위를 형에게 양보하면서 헌왕에게 넌지시 가르침을 주게되자 태자는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었다.
<40> 흉노 호안야선우 呼韩邪单于의 내조와 기린각 11인(BC51)
BC53년을 전후하여 한나라 북방을 어지럽히던 흉노족이 여러 번의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세력이 약해지자 결국 한나라에 투항하게 되었다. 족장 호안야선우는 BC52년 항복을 선언하고 다음해에 조정에 들어와 조현하기를 원했다. BC51년 정월 흉노 추장이 들어와 번신이라고 칭하면서 조현하자 조정에서는 공식 이름을 주지는 않았지만 관대, 옥새 등 여러 선물을 내려 주었다. 2월에 흉노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이제 골치 아픈 흉노족이 마침내 복속되었다고 판단하고 그동안 공로를 세운 11인의 초상을 그리게 한 다음 기린각이라는 전각을 지어 그것을 보관하게 하였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장군 및 대사마(곽광이지만 이름을 쓰지는 않았음), 장안세, 한증, 조충국, 위상, 병길,
두연년, 유덕, 양구하, 소망지 및 소무가 그 사람들이다. 이 해 삼월 승상 황패가 죽었다. 정위 우정국이 뒤를 이어 승상이 되었다. 태복 진만년은 어사대부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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