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22 : 사마염의 서진(西晉)<C>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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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6> 사마염의 즉위와 부현의 개혁건의(AD265)
사마염은 황제위에 오르고 나서 맨 먼저 위나라 조정의 각박하고 사치함을 고쳐서 절약하고 인자한 정치를 펼치고 싶었다. 처음으로 간관을 두고 산기상시 부현과 황보도를 그 나리에 임명했다. 부간의 아들인 부현이 서진 무제 사마염 이렇게 상소를 올렸다.
“ 신이 듣기에 선왕이 세상을 통치할 적에
위로는 교화하고
밑으로는 청렴하고 투명하게 의론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최근 위무제(=조조)가 법을 숭상하고 유교를 존중하였기 매문에
천하는 법과 이름이 높은 자를 귀하게 여겼으나
위문제(=조비)는 막힘없이 통달하는 것을 사모했기 때문에
천하는 수절하는 것을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기강이 흐트러지고 조정이 어지럽게 되면서
다시는 청렴하고 투명하게 의론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용처럼 솟아올라 선양을 받으셨으니
요임금과 순임금의 교화를 펼치셔야 하나
멀리 있는 맑고 예를 아는 선비를 등용하셔서 미풍과 절도를 펼치시지 않으시고
껍데기 같은 신하를 내치셔서 근신하지 못하는 것을 징벌하시지 않으시니
신이 이것이 걱정되어 감히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사마염은 부현의 건의가 옳다고 여기고 개혁의 초안을 만들어 올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인사개혁을 단행하지는 못했다.
<7> 장자 사마충이 황태자가 되다(AD267)
AD267년 정월 사마충이 태자가 되었다. 사예교위인 이희가 여러 관료들을 부정부패로 탄핵했다. 유우, 산도 중산왕 사마목 무해 등이 관청의 논을 불법으로 차지하고서 소산을 착복했다는 이유에서 였다.
사마염은 이렇게 조치했다.
“ 현령 유우가 백성들의 재산을 침탈하여 관리로써의 직분을 그르치게 했으니
끝까지 수사하여 망령된 것을 징계하도록 하라.
전 상서 산도 등은 그 허물을 다시 반복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되
죄를 묻지는 말라.
이회는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조차 탄핵했으니
그 용기가 광무제 때의 사직, 양포(포영과 포회)라 할 만하다.
이 일을 널리 표창하여 알리니
각기 일을 신중히 하고
이런 관대한 용서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
사마광은 이런 사마염의 상벌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 정치의 근본은 상벌을 분명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형벌과 상이 분명하지 못하면 어떻게 정치를 성공시키겠습니까.
진무제가 산도는 사해주고 이희를 칭찬한 것은
형벌과 상을 모두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희의 말이 옳다고 하면 산도는 사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의 말이 틀린 것이라면 이희는 포상될 수 없는 것입니다.
포상하는 것은 말을 자유롭게 하라는 것인데
말을 하고도 듣지 않으면 즉, 징벌하지 않으면
밑으로는 불만이 생기고 위로는 위엄이 무너지는 것이어서
장차 쓸 수가 없게 됩니다.
또 네 신하가 같은 죄를 졌는데
유우는 복주되었으나 산도 등은 불문에 부쳤으니
귀척은 빠져나가고 천한 사람에게만 벌이 내려진 것이어서
정치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창업의 초기에 정치의 근본이 서지 않으면
장차 대대로 통치를 하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8> 대사마 석포와 사마염의 용서(AD268)
대사마 석포는 위나라 장군 제갈탄을 진압한 뒤 10여 년간 회남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서진 최고의 장군이다. 회북지역 감군이 왕침은 경쟁자 석포를 매우 시기하였으므로 석포가 오나라와 내통한다고 모함하였다. 당시 오나라가 서진을 침략한다는 소문이 돌아서 석포는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방어막을 쌓고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사마염은 석포가 오와 내통하고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양호는 석포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사마염은 양호의 말을 듣지 않고 조서를 내려서 쓸뎅벗이 백성을 힘들게 한 죄를 물어서 석포를 면직시키고 장안으로 소환했다.
석포는 손삭을 부하로 삼았었는데 지나다가 손삭이 여음왕 사마준을 만나 보았다. 사마준은 사마염이 조서를 보내 석포를 소환한다는 정보를 듣고 있었으므로 손삭에게 그 정보를 미리 알려주면서 석포와 사마염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권고했다. 손삭을 그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석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사마염의 소환령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편지를 올려서 대사마직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사마염에게 사죄하라고 깨우쳤다. 석포는 손삭 말대로 사마염에게 사죄를 구했다. 사마염은 의심을 풀고 석포를 낙릉공으로 후대하였다.
석포가 대사마에서 물러나 사도가 되고 그 자리에 의양왕 사마망이 올랐다. 사마망은 사마의의 동생 사마부의 아들로 사마염에게는 5촌 당숙인 셈이다.(AD268)
<9> 교활한 가충을 비판하는 배해(AD271)
거기장군이면서 시중과 상서령을 겸한 가충은 사마소 시절서부터 조정의 실권자 중의 하였는데 사마염을 태자로 만드는 공이 컸으므로 사마염의 시대가 되면서 더욱 권한이 강해졌다. 가충은 아첨과 교활한 생각을 잘했고 조정에서 순욱, 풍담과 짝을 이루어 붕당을 결성했기 때문에 대부분 조정 신료들은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마염이 시중 배해에게 현재 정치의 잘잘못을 물었을 때 배해가 이렇게 대답했다.
“ 폐하께서 천명을 받으시고 사해가 순풍을 탓지만
요순의 치적에 못 미치는 것은
오로지 가충의 무리들 때문입니다.
천하의 현인들을 끌어들이시고
그들과 더불어 올바른 정치를 하셔야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마셔야 합니다.”
<10> 사마염과사돈 맺는 가충(AD271)
시중 임개와 하남윤 유순도 가충과 가깝지 않았는데 가충은 이들을 멀리 몰아낼 생각이었다. 가충은 임개를 태자소부 내보냈다. 임개 또한 가충을 멀리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독발씨가 진주지역을 침략하자 임개는 황제에게 능력있는 사람을 보내야만 독발씨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마염이 누가 좋으냐고 묻자 가충만한 사람은 없다고 추천했다. 다른 신료들도 모두 가충을 천거했다. 7월 사마염은 가충을 진주 및 양주 제군사로 임명하여 그리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가충은 걱정이 깊어졌다. 진주로 부임해서 지방으로 나가면 황제의 총애가 식을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가득한 조정에서 어떤 모함으로 해를 끼칠지 모를 일이었다. 가충은 측근 순욱에게 묘책이 없는지 물었다. 순욱이 말했다.
“ 공께서 재상의 신분으로
한 남자(임개를 뜻함)에게 제압된다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번 일은 반드시 맡아야 할 일이니 사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자(사마충)와 결혼을 맺게 된다면
진주에 부임하지 않고도 그 직책을 수행할 핑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가충은 그 일을 누가 맡아 주선할 수 있을지 물었다. 순욱이 스스로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같은 풍담에게도 가충이 사마염과 사돈관계를 맺지 못하면 그들의 권세도 끝장나므로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풍담도 같은 생각이었다.
사마염은 원래 위관의 딸을 태자비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충의 처 곽괴가 사마염의부인이자 태자 사마충의 생모인 양씨의 주위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어 양씨가 자신의 딸을 받아들이도록 설득시켰다. 사마염은 부인 양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 위관의 딸은 다섯가지 아름다움을 갖고 있고
가공의 딸은 다섯가지 약점을 갖고 있소.
위씨 집안은 현명하고, 아들이 많으며, 아름답고 키가, 크며 피부가 하얗소.
가씨 딸은 우둔하고 아들이 적고 추하며 키가 작고 피부가 검지 않소. ”
양황후는 이미 설득된지라 끝까지 고집하여 가충의 딸을 세우고자 하였다. 더욱이 순욱과 풍담과순의 모두 가씨의 딸이 미인이고 재치가 넘친다고 칭찬해대자 사마염은 그 말을 좇기로 했다. 가충을 진주로 보내려던 계획도 돌려서 없던 일로 했다. AD272년 2월 가충의 딸 15세 가남풍을 태자비로 들였다. 가남풍은 태자보다 2년 연상이었고 투기가 매우 심했고 권모술수와 속임수가 보통사람을 넘었다. 태자는 그를 종하하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갖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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