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3> 최측근 전횡(G) 장호(張顥)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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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학에 빠져 정사에 손을 놓은 황제 효영제(AD177)
사실상 후한 마지막 황제 효영제는 정치보다 문학을 좋아했다. 특히 문장을 화려하게 짓는 사람과 글자를 세밀하고 기이하게 잘 쓰는 사람을 좋아하여 가까이 두었다.(이런 부류의 문학을 홍도문학(鴻都門學)이라고 불렀음) 그리고 항간에 떠도는 사소한 잡담을 듣기를 좋아하여 시정잡배들을 궁궐에 불러들여 종일토록 그들의 한담에 빠져 있곤 했다. 당연히 조정 대신들은 이를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때마침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고 메뚜기 피해가 퍼지자 황제는 조정대신들에게 정치개혁의 핵심(政要)을 써서 올리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의랑 채옹이 황제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섰다.
“ 폐하가 즉위 초기에는 먼저 여러 경학을 두루 섭렵하시고
정사를 열심히 살피시더니
최근에 와서는 오로지 도박이나 바둑 같은 잡기에 빠지셔서
백성을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이시는 것에
관심을 두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학생들은 오로지 이익을 보기위해 문장을 짓고
저속한 문장과 광대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하거나
남의 문장을 베껴 쓰기를 밥 먹듯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높은 관작을 주셔서 백성을 다스리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AD177)
(2) 환관 장호가 태위가 되다. (AD178)
다음해(AD178) 태위(수상) 맹욱이 파면되고 환관 장호가 태위가 되었다. 장호는 환관실세 중상시 장봉의 동생이다. 맹욱은 태위가 된지 2개월 만에 파직된 셈인데 그 전 태위 진탐, 유관, 허훈 모두 몇 달 못있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이유는 그만큼 당시 경제와 사회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이상하고 괴이한 현상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먼저 길이가 10여 장이나 되고 용과 같이 생긴 검은 기운(黑氣)가 황제가 살고 있는 온덕전 궁궐 동쪽에 떨어졌다.(AD178년 6월 29일) 5일 뒤에는 푸른 무지개가 옥당 뒤편 궁전 정원에 나타났다.(7월4일) 광록대부 양사는 고사를 들어서 이렇게 말했다.
“ <천추참(千秋讖)>에는 무지개가 나타나면
천하가 원망하며 해내가 어려워진다고 했습니다.
지금 첩이나 몸종이나 환관무리들이 함께
나라의 조정을 전횡하여
하늘의 태양 같은 분을 기망하고 있습니다.
관모와 신발이 바뀌었고
언덕과 계곡이 위치를 뒤집어엎고 있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징조로써 경계하고 있으니
<주서(周書)>에 ‘천자는 괴이한 것을 보면 덕을 닦고
제후가 괴이함을 보면 정치를 바로잡으며
대부가 괴이함을 보면 직무를 제대로 처리하고
선비나 서인이 괴이함을 보면 몸을 수양한다고 했습니다.
페하께서는 아첨하는 무리를 물리치시고
학명(鶴鳴)한 인사를 부르셔서
환관의 농간을 단절하시고
유흥을 삼가시면서 하늘의 권위를 회복하시려고 노력하시면
재변은 금방사라질 것입니다.“
의랑 채옹도 간언을 올렸다.
“ 재변은 나라가 위태로워 곧 망할 것임을 보여주면서
황제를 질책하는 징조입니다.
푸른 무지개나 암탉이 수탉으로 바뀌는 기변은
모두 여자가 정치에 간여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예전의 효영제 유모 조요나
동태후(효영제 모친) 측근 곽옥이 모두 권세를 믿고 정치를 문란 시켰습니다.
지금 항간에는 나이든 환관 정대인이 모든 정치를 좌우하고 있으므로
곧 큰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유모 조요와 곽옥을 극히 경계하셔야 합니다.
지금 태위 환관 장호는 결국 곽옥이 시킨 것입니다.
조정에 가득한 소인배들이 나라를 좀먹고 있으니
늦기 전에 서둘러 이들을 몰아내어 나라를 바로 세우셔야 합니다.
역경에 말하기를 군주가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신하를 잃고
신하가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다 했습니다.
부디 제가 올린 글을 비밀에 부치셔서
간신 환관들의 보복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효영제가 글을 다 읽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 환관 조절이 그 내용을 엿보고 좌우에 누설하였다. 채옹과 사이가 좋지 않으면서 혼인으로 환관과 연결된 정황이 채옹을 모함했다.
“채옹과 그 숙부 채질이 사리를 위해 부정청탁을 했고 거절하자 중상모략을 일삼았습니다.”
환관 무리들은 채옹의 목을 베어 저자거리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관 중상시 여강은 채옹을 불쌍히 여겨 사형에서 한 등급을 낮추어 머리를 깎고 삭방으로 귀양 보내라고 판결했다. 조절 무리들은 자객을 보내 채옹을 죽이려고 했으나 그 자객마저도 채옹의 의로움에 감화되어 죽이지를 않았으며 또 다시 독을 풀어 죽이려고 했으나 누군가가 몰래 독이 있음을 알려 주어 채옹은 끝내 목숨을 건졌다. 장호도 곧 태위에서 파면되고 진구가 자리를 이었다.
(3) 사예교위 양구의 환관척결 시도 실패(AD179)
당시 재정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서 황제는 관직을 팔아 재정을 메우기 시작했다. 이 천석 자리(장관급)는 2천 만전, 사 백석 자리(과장급)는 사백만전을 내면 관직을 얻을 수가 있었다. 덕행이 있으면 절반 혹은 1/3 할인도 가능했으며 가기를 원하는 지방으로 가려면 할증료를 내고 갈 수도 있었다. 부유한 자는 선납했고 돈이 없으면 후납도 가능했는데 이 경우 정가의 2배를 내어야 했다. 당시 조정의 실권은 조절과 왕보와 그의 양자 왕길이 쥐고 있었으며 태위 단경은 아첨아부로 환관들에게 붙어 있었다.
상서령 양구가 환관과 홍도문학 부류들을 비판하며 조정에서 그들을 몰아내어야 한다고 주청했다. 효영제는 듣지 않았다. 양구는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 “내가 사예교위(서울검찰청장)가 되면 어찌 조절, 왕보 무리들을 가만 두겠는가?” 그런 양구가 정말 사예교위가 되었다. 경조윤(서울시장) 왕표는 7천만 전 관물 횡령혐의로 왕보를 양구에게 고발했다. 양구는 즉각 왕보, 왕맹, 왕길, 단결, 순우등, 원사, 봉탑 등 왕보 무리 일당을 탄핵하고 체포했다.(AD178년4월8일)
직전 사예교위였던 왕맹이 양구에게 부탁했다.
“우리 가족 죄가 죽어 마땅하기는 하나 선후임 관계를 생각해서 잘 좀 봐주시지요.”
양구가 대답했다.
“너의 죄악은 형용할 수도 없고 죽어도 책임을 다 할 수가 없다.
어찌 선후배 사이라고 관용을 바라는가?”
왕맹이 욕설을 퍼부었다.
“너는 전에는 우리 가족을 주인처럼 섬기던 종과 같은 놈이었는데
감히 주인을 배반하기냐? 너에게도 반드시 화가 미칠 것이다.”
양구는 흙으로 왕맹의 입을 틀어막고서 채찍질로 쳐서 왕보와 왕맹 부자를 모두 죽였다. 그리고 그 시신을 자른 다음에 성문 밖에 이렇게 써 붙였다. “적신왕보(賊臣王甫)” 환관에 빌붙어있던 단경도 자살했다. 왕보 일족을 처형한 다음 양구는 환관 조절에게로 칼끝을 돌렸다. 부하에게 조절에 대한 탄핵문을 쓰게 하였다. 그 사이에 조절이 왕보의 처형된 시신을 보았다. 속으로 신음하듯 외쳤다.
“우리가 서로 잡아먹을지언정 어찌 개(양구)에게 피를 핥게 하겠는가?”
조절은 여러 부하 환관들에게 단체로 행동할 것을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비상대기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는 황제에게 표문을 올렸다.
“사예교위 양구는 원래 난폭한 사람이므로 면직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황제는 양구를 외직인 위위로 전직시켰다. 조절과 주우의 환관세력들이 다시 상서령이 되어 조정을 장악하였다. 양구 말고도 진구와 황실종친인 유합과 유납 등이 조절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여 모두 옥사 당했다(AD179) 이 때 살아난 조절은 2년 뒤 AD181년 사망하고 그 뒤를 환관 조충이 자리를 이었다.
(4) 장각(張角)의 태평도 술법과 장건의 황건적의 난(AD184)
하북성 거록(지금의 평향)사람 장각이 요망한 술법으로 병을 낫게 한다는 ‘태평도’를 가지고서 백성들을 현혹하였다. 주문을 외면서 머리를 숙이고 꿇어 앉아 죄를 반성시키면서 병을 치료하였다. 어떤 자들이 정말로 병이 나았다고 하자 태평도를 믿는 사람들이 수십만 명이상으로 늘어갔다. 청주(산동성), 서주(안휘성 북부), 유주(북경) 기주(하북성), 형주(호남성), 연주(하남성) 예주(하남성) 등으로 태평도의 세력이 빠르게 확산되었다.(AD183) 태위 양사는 이미 7년 전 사악한 장각을 체포해서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다만 갑자기 체포하면 큰 소요가 발생할 수가 있으므로 점진적으로 대중을 설득하는 한편 장각 무리를 서서히 고립시켜 체포해야한다고 강조했었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효영제와 집권 실세 환관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장각의 태평도 무리들은 매우 체계적인 군사조직을 갖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36개의 방(方)으로 조직되었는데 대방(大方)은 1만 명이고 소방(小方)은 6,7천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최고 책임자는 장군이라고 불렀다. 태평도 무리들은 “창천(푸른 하늘)은 죽고 황천을 세워야 하니 갑자년(AD184)은 천하가 크게 길한 해이다.“ 라고 선동했다. 갑자년 3월 5일 거사하기로 하면서 조정 내부의 환관 봉서와 서봉과 몰래 호응하기로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장각의 제자 당주의 밀고로 3월 5일 거사계획은 누설되었고 주모자 마원의와 함께 태평도 신도 수 천 명이 적발되어 죽었다. 불안을 느낀 태평도 신도 장건이 서둘러 명령을 내려 일제히 군사를 일으켰다.(AD184년 2월) 이들을 황건적이라고 불렀다. 3월 조정에서는 군신회의가 열렸다. 모든 신하들이 당인에 대한 금고, 즉 당금(黨禁)을 풀어서 현인들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장군 하진과 중상시 여강의 주장이 강했다. 그동안 1-3차 당고의 화로 당인들이 배척된 것은 환관들의 농간 때문이었으므로 환관들은 이 조치로 크게 불안하였다. 당시 큰 세력을 이룬 환관들은 조충, 장양, 하운, 관승, 단규 및 송전 등이었다. 이들을 열후상시(列侯常侍)라고 불렀다. 황제가 이들 열후상시들을 다독거렸다. ”장 상시(장양)는 나의 아버지고 조 상시(조충)는 나의 어머니다.“라고 위로했다.
(5) 낭중 장균의 상소와 죽음(AD184)
효영제가 영안궁 망루를 오르려하자 환관들이 깜짝 놀라며 막아섰다. 효영제가 높은 곳에 올라가면 자신들의 호화스런 집들이 다 노출되고 말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 천자가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은 마땅치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자가 높은 곳에 오르시면 백성들이 두려워 흩어져서 도망가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화가 나서 그들을 꾸짖었다.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지난 3월 환관 봉서와 서봉이 황건적 장각과 마원의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느냐. 역적은 당인이 아니라 너희들이 아니었느냐!”
환관들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죽은 왕보와 후람 등이 주모한 것이지 저희들은 모르기도 했고 또 주모자도 아니었습니다.”
환관 조절과 하운이 여강을 모함했다.
“ 중상시 여강이 당인과 더불어 조정을 농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자주 곽광전을 읽으면서 황제폐출 모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여강을 문책하려고 불렀다. 여강은 이렇게 말하며 자결했다. “ 내가 죽고 나면 난이 일어날 것이다. 충성을 다하는 자가 어찌 옥리와 마주치며 따질 것인가?”
승기를 잡은 환관무리들은 이 기회에 다시 반대 당인들을 모두 척결하고자 나서면서 황제에게 이렇게 주장했다.
“수사도 하지 않았는데 죽은 것을 보면 분명히 숨기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황제의 재가를 얻은 조절 등의 환관 무리들은 종친과 유림을 수색하고 감옥에 가두면서 재산을 몰수했다. 낭중 장균이 편지를 황제에게 올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장각이 군사를 일으켜 크게 성공한 것은
그 근원이 모두 십상시 대부분이 부형, 자제, 처족, 친척들을 동원하여
주와 군현을 장악하고서 재물과 이권을 독점하고 백성을 약탈하며
해를 끼치고 있는데도 백성들이 하소연할 데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마땅히 십상시 목을 치시고
남쪽 교외에 목을 걸어 두시어 백성들에게 사죄하시고
사자를 전국에 보내 알리시면
군사가 없더라도 큰 도적이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장균이 말한 십상시는 장양, 조충, 하운, 곽숭, 손장, 필남, 율숭, 단규, 고망, 장공, 한이, 및 송전 등 12명이다. 어리석은 효영제는 장균의 상주문을 측근 십상시들에게 보여 주었다. 십상시들이 모두 관을 벗고서 맨발로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에게 사죄하면서 스스로 자청해서 감옥으로 가고 있는 재물을 모두 헌납하여 군비에 보태겠다고 했다. 환관들의 겉으로 속죄하는 거짓 모습에 감동을 받은 황제는 조서를 내려 그들을 모두 용서하고 예전처럼 일을 보도록 하면서 말했다.
“ 저 장균이란 놈이 미쳤구나.
십 상시 가운데 착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니
말이 되기나 하는가? “
어사는 황제의 뜻을 받들어 장균이 황건적의 도를 배웠다고 무고하여 감옥에서 매질로 죽였다.(AD184)
(6) 십상시의 황건적 내통과 후한의 멸망
조정이 십상시 환관들에 의해 농락을 당하는 동안 전국은 황건적의 난에 휩싸이게 된다. 여남지역의 황건적은 여남 태수를 격파했고 광양지역 황건적은 유주자사 곽훈과 유위를 살해했다. 황보숭과 조조가 황건적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으나 그것은 일부 지역에 불과했다. 그 해 8월에는 파군사람 장수의 오두미적(줄여서 米賊)이 일어났다. 한 지방의 황건적이 궤멸되면 그 잔당들이 도망가서 금방 다른 지역 유민들을 규합하여 일어났다. 한 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일어나는 풍선효과를 잠재울 방법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조정의 환관들은 교활하게도 황건적들과 내통하고 있었다. 예주자사 왕윤이 황건적을 토벌하던 중에 십상시 장양이 황건적과 내통한 편지를 습득하게 되었다. 황제께 편지를 올리자 장양은 핑계를 대면서 사과했다. 황제는 장양에게 죄를 줄 수가 없었다. 그만큼 황제는 장양에게 예속되어 있었고 또 조정 전체가 장양의 손아귀에 있기도 했었다. 장양은 왕윤을 중상모략해서 감옥에 가두었다. 사면으로 왕윤이 풀려나자 또 다른 일로 왕윤을 가두었다. 태위 양사가 장양의 사주를 받아 사람을 보내 넌지시 말했다.
“ 두 번이나 감옥에 불려갔으니 꽤나 숨겨진 죄가 많은가보오.”
자살하라는 암시였다. 왕윤이 말했다.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죄를 지으면
마땅히 대벽(처형)을 받아 하늘에 사과할 것이지
어찌 약을 씹으며 죽겠는가! “
왕윤은 자결을 선택했다. 조정의 곳간은 텅텅 비어 세금을 올려야 했고 삼공마저도 복직하면 재물을 헌납해야 했다. 환관의 비위를 건드린 조신들은 낙엽처럼 처형되었으며 곳곳에서는 도적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장각과 장만성의 무리에다가 박릉의 장우각, 상산의 저비연, 변장과 한수 등이 활개를 치며 나라를 쪼개어 가졌다. 양주(감숙성)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후한 조정의 장군들 사이에도 환관에 의해 조종되는 중앙 조정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이어지는 반란과 내란으로 후한의 멸망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었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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