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60>국가위기와 행정개혁 VIII. 호패법(號牌法)을 검토하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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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패(號牌)란 개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동시에 병(兵)과 역(役)에 필요한 백성들의 호구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고안된 작은 패를 말한다. 군대나 혹은 국가의 축성, 교량 건축, 궁궐 공사 등 각종 부역을 위해서는 신속한 장정 공급이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서는 호패를 만들어 개인의 신분을 정확히 밝힘과 아울러 정확한 거주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 제도는 원나라 때 처음 시작하였으며 고려도 공민왕 3년(1354) 때 군인에 한 해 잠깐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세종도 호패법을 시행하지는 않았다. 호패법을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번 제기되었으며 본인도 그 장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채택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불편, 불안함과 소요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육기법이나 부민고소금지법은 백성들의 불편을 초래하는 법이었어도 세종은 강행했지만 호패법은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부민법이나 육기법은 그토록 강력하게 추진하던 세종이었지만 호패법은 끊임없는 도입 요청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도입하지 않은 과정과 내막을 들여다보는 것도 세종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VIII.1 태종의 호패법
태조 7년(1398) 1월에 도평의사사가 호패법을 도입하기를 건의했다. 당시 중국 명나라에는 내전이 발생했고 또 안으로는 태조도 병중에 있었을 뿐 아니라 1차 왕자의 난(태조 7년 8월)이 일어나기 직전이라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으므로 호패법을 의논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가 1398년 여름에 죽고 그 뒤를 이은 손자(혜종 건문제 주윤문)와 그의 삼촌 연왕(주체, 영락제) 사이의 권력 다툼이 마침내 반란(1399.2-1402.7)으로 발전하였으므로 군사적으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2차 왕자의 난(태종 원년,1400)을 수습한 뒤 태종이 즉위하고 나서 호패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즉, 필요할 때 즉각 동원할 수 있도록 군인의 수와 거주지를 정확히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전 국민이 아니라 군인에 대해서 만이라도 인적 사항을 기록한 호패를 지급하자는 안이 태종 2년 8월 논란을 거쳐 도입되었다. 호패를 군인 외에 전 국민으로 확대하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도입되지 못하였다.
[호패법 도입 주장]
중국 명나라 태조는 건국하고 바로 원나라의 호패법을 계승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제도와 법식을 중국에 맞추기 위해 조선도 호패법을 들여와야 한다는 주장을 평주지사 권문의가 제기하였다(태종 6년 3월 24일). 그가 주장한 호패 제도의 목적은 정확한 인구를 파악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유망민을 근절하여 백성을 일정한 장소에 토착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만약 이런 목적이라면 호패에 기록될 내용은 이름과 주소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호패의 새로운 목적, 즉 신분의 높낮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호패에 직위나 지위를 기록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호패를 보고 신분의 높고 낮음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상하존비의 질서가 명확히 유지될 수가 있다. 이것이 평양부윤 윤목이 다시 제기한 호패법 도입의 또 다른 목적이었다(태종 7년 10월 9일). 한동안 잠잠하던 호패법 논의를 다시 점화한 사람은 대사헌 유정현이었다. 세금을 면탈하거나 혹은 군역을 회피하기 위하여 주소를 옮겨 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 국가의 기강이 흔들린다고 생각했던 유정현은 호패법만이 이런 병폐를 근절할 가장 효과적인 방편이라고 생각했다(태종 12년 2월 3일). 그러나 의정부는 냉담했다. 유정현의 다른 제안은 다 받아들였지만 호패법은 보류시켰다.
[호패법의 시행 : 태종 13년(1413) 12월 1일]
태종 13년 8월 황자후가 호패법의 필요성을 다시 강조하였다. 화척이나 광대(재인,才人) 같은 자들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농사를 돌보지 않으니 이런 부류를 포함해서 모든 백성들이 호패를 지녀야만 국가 경제와 기강이 동시에 살아난다고 강조했다. 태종도 동의하면서 그 가부를 깊이 의논하여 결정하라고 지시했다. 의정부와 여러 군들, 문무백관과 은퇴한 원로 등 여러 사람들과 의논한 결과는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도 긍정적이고 또 백성들에게 이익만 있지 폐가 없다는 말에 태종은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태종 13년 8월 21일).
호패의 재질과 기록 내용은 신분에 따라 달랐다. 직급이 높으면 상아나 녹각으로 만들고 이름과 함께 직급만 기록하였으나 직급이 낮으면 나무로 만들고 신체 특징까지도 기록하도록 하였다. 같은 품관이라 하더라도 문관과 무관의 기록내용이 달랐다. 문관과는 달리 무관은 서민과 같이 나이 용모를 기록하게 하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건의가 있어 4품 이상의 무관은 문관과 같이 하도록 조정했다.
시행공고는 태종 13년(1413) 10월 1일에 하고 호패제작은 11일부터 하며 12월 1일까지 지급을 완료한다고 계획하였다. 호패를 발급받지 않으면 중형으로 다스리며 호패를 발급받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고발하도록 하였다. 만약 고발하지 않으면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즉 임금의 명령을 어긴 죄로 다스린다고 했다. 호패를 빌리거나 빌려 주는 자도 같은 죄로 다스리되 2등을 감해주고 이리저리 유망하는 자는 1등을 감하며 호패 없이 이동을 허락하는 자도 같은 죄 감2등 한다고 했다. 만약 호패를 위조하면 위조지폐범에 준하여 처벌하고(僞造寶鈔律) 잃어버리거나 소지를 하지 않아도 ‘규정에 없는 위반 범죄죄(不應爲律)’에 의해 태형을 부과하도록 했다(단 10세 이하와 70세 이상은 면죄). 호패를 훔치는 자는 장 1백대를 치고 글자를 깎거나 변조한 자는 장 60대를 치게 하였다. 그 해 12월 1일 드디어 전국 백성이 호패를 차기 시작했다. 호패 착용을 법으로 강제하였으나 백성들은 혹시 군에 끌려가는 게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많았다. 그런 우려를 씻기 위해 군역은 호패가 아니라 경작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부과하는 것이므로 염려할 것이 없다는 특별교지를 태종이 내림과 동시에 호패법위반에 대해 강력한 처벌 의지를 재차 강조했다.
[호패법의 폐지 : 태종 16년(1416) 6월 2일]
호패법은 출발부터 불길했다. 호패를 변조하거나 위조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식별하기가 어려운 지경이 되어 발급한 모든 호패를 다시 교체해주는 일이 벌어졌다.(태종 14년 10월 11일). 게다가 유랑하는 사람을 막기 위해 호패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랑 인구는 더 늘어만 갔다. 토지가 있는 사람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이유가 별로 없지만 아무 재산도 없는 하류 백성들은 호패를 발급받고 온갖 의무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나중에 잡힐 값에라도 일단 도망가고 볼 일이었다. 얼마나 위,변조가 많았는지 호패의 별명을 ‘있으나마나한 패’라는 뜻의 ‘무패(無牌)’, ‘안 고친 패’라는 뜻의 ‘불개패(不改牌)’, ‘안 깎은 패’라는 뜻의 ‘불각패(不刻牌)’, ‘위조패(僞造牌)’ ‘바꿔야 할 패’라는 뜻의 ‘환패(換牌)’, 심지어는 ‘실패한 패’라는 뜻의 ‘실패(失牌)’라고까지 비하, 조롱하였다.
좌부대언 홍여방은 태종에게 호패제도를 폐지하자고 했다. 실시한 지 꼭 2년 5개월 만이었다. 국가에 이득은 없고 무수한 백성들을 범법자로 만들었으며 형리들만 헛고생시키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태종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백성들에게 번거로움만 준다니 그것도 큰일이다 싶긴 했다. 태종은 뾰족한 대안이 없겠냐고 물었다. 의정부와 육조 대신들이 한참 의논한 끝에 호패위조죄를 묻지 않거나 벌을 감경해주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대사헌 김여지가 호패제도를 안 할 것이면 몰라도 호패제도를 한다고 하면서 위변조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 어불성설 아니냐고 되물었다. 태종도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호패제도를 폐지하기로 했다(태종 16년 6월 2일).
VIII.2 호패법 논란 재점화
도입한 지 2년 반 만에 폐지되었던 호패법을 다시 들고 나온 사람은 태종 때 처음 호패제도를 주창한 사람 중 하나였던 영의정 유정현이었다. 개인의 토지보유 상한을 정하는 한전제와 백성에게 토지를 고르게 나누어 경작하는 균전제와 함께 호패법을 다시 실시하기를 요청했다(세종 3년 5월 11일). 세종은 가을 추수를 봐서 다시 생각해 보자고 했다. 세종은 호패법의 장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호패법은 그 후 5년 동안 의논이 되지 못했다. 최근 큰 흉년(세종 5년과 7년)이 들어 백성의 불안과 반발이 걱정되어서 호패법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병조의 호패법 요청]
다행히 세종 8년의 농사는 비교적 잘 되었다. 그러나 세종 5년의 대가뭄 이후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도는 유망민이 크게 증가하고 군대의 수가 감소하고 농사에도 큰 타격을 주게 되자 병조가 유망민 대책을 내놓았다(세종 5년 8월 17일).
(i) 유망민을 받아 주는 호주, 이정, 이장은 10월 30일 까지 신고할 것,
위반자 및 그 고을 수령은 육전(六典)에 따라 처벌할 것,
(ii) 한성부와 각 도관찰사는 도망인의 원거주지 주소, 이름, 연령, 용모,
도망 날짜를 상세히 기록하고 그 사실을 원거주지에 확인할 것,
(iii) 유망자는 본고장으로 돌려보내되 농사를 오래 안 지어 돌려보내기
어려운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사람은 다시 도망가지 않도록 방지
대책을 철저히 수립할 것,
(iv) 각 고을 수령은 숨어있는 자를 철저히 수색할 것,
(v) 숨겨 준 가장과 최선을 다하지 않은 고을의 관원의 문책은,
통정대부(정3품 상계)이하는 경차관이 즉결 처단하고
가선대부(종2품 하계)이상은 상부에 보고하여 처단할 것 등 이었다.
[우사간 박안신의 상언]
병조의 요청대로 조치가 취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망민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점차 더 커져갔다. 우사간 박안신 등 여럿이 이 문제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세종 8년 8월 27일). 이들은 유망민의 다섯 가지 폐단을 지적하였다.
(i) 이사를 자꾸 가므로 농사와 목축이 위축되어 항산(恒産)이 줄어 듬,
(ii) 노비가 주인을 살해하고, 처첩이 남편을 해치며 강절도가 사람의
재물을 탈취하는 등 풍속이 무너짐,
(iii) 군사의 수가 감소함,
(iv) 국가의 구호곡식을 축내고 갚지 않아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함,
(v) 양천의 구별이 없어지고 선비를 도와 줄 사환천민들이 사라져 예의
지국의 기풍이 손상됨 등이었다.
박안신은 이런 문제의 근원은 유망에 대한 처벌규정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육전(六典)> 에는 도망자를 숨겨준 집 주인과 호주(戶首)에게 장 1백대, 이를 신고하지 않은 고을 이장(里正 또는 里長)은 장 70대의 벌을 주게 되어 있지만 이것으로는 유망을 방지하기 어려우므로 훨씬 강력한 처벌을 하자고 주장했다. 도망간 사람을 숨겨준 집의 가장과 호주는 장 1백대에 처할 뿐 아니라 그 집 가장 가까운 주변 가옥의 호주도 연대책임을 물리며 숨겨준 집과 신고하지 않는 이장의 재산을 몰수하여 신고한 사람에게 주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렇게 하면 숨을 곳이 없어져 유망자가 끊어지고 항산이 증가하며 군사의 수도 늘어나고 국고도 비축되고 예의도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 세종은 이 안을 의정부가 육조와 함께 의논하라고 내려 보냈으나 별다른 건의는 없었고 대신 호패법을 도입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건의만 있었다. 그러나 호패법에 대해 세종은 부정적이었다.
“지난 번 대신이 호패법을 다시 실시하기를 요청했다. 그 법은 태종 때
이미 실시했었으나 백성들이 싫어하여 마침내 폐지하였다. 나는 새
법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다시 실시한다면 백성들이
원망하고 탄식할까 두렵다.
(向者大臣 請復立號牌之法 此法太宗時旣行 以民之不願 而遂除之
予不喜立新法 今若復行 恐民之怨咨也 : 세종 8년 12월 8일) ”
VIII.3 호패법 책문(策問) 출제
백성들이 싫어하면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실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십년이 지나도록 호패법 논란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비교적 가뭄피해가 없었고 농사도 잘 되어 유망민이 크게 문제로 대두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호패법에 관련된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좋은 법이긴 하나 백성들이 반대를 하니 어떻게 하면 도망자나 떠도는 사람을 줄일 수 있겠는가. 비록 백성들이 싫어하는 바가 있어 호패법을 실시하지는 못하지만 호패법의 장점이 있으므로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답답하던 세종은 과거시험에 출제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세종 17년 4월 17일 근정전에서 있었던 문과 전시 책문 중에서 호패법에 관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
“호구법은 역대가 소중하게 여겨 섬세하지 않음이 없는데 우리나라는
법이 있긴 해도 상세하거나 명확하지 못해 빠진 집과 숨은 장정이
십중 팔구이다. 내가 지금 모두 찾아내 빠짐이 없도록 하고자 하나 백
성이 여력이 없거나 곤고하다. 따라서 호구실사를 하고 노동을 균등
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근자에 호패법의 득실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가 끝내 실시하지 못했는데 과연 시행이 불가능
한가. (戶口之法 歷代所重 莫不纖悉 我國雖有其令 未盡詳明 漏戶隱丁
十常八九 今欲盡刷無遺 則民無餘力 或生困苦 伊欲使戶口實而勞逸均
其術安在 近者號牌之設 利害之論紛紜 竟莫之行 固不可行歟
: 세종 17년 4월 17일)”
세종은 여러 번 과거시험의 책문(策問)을 출제했다. 책문은 대책을 묻는 질문이다. 아래 [표.3-13]에서 보듯이 최소 여덟 번 문제를 내었는데 대부분이 정책 현안 문제였다. 세종 17년 4월 17일 책문에는 호패법 문제와 함께 태평성대로 알려진 전설의 삼대(하나라, 은나라 및 주나라)의 제도 중에서 도입해야할 제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노비가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생겼으며 노예의 존재가 예의를 지키는 사회에서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대사헌 이숙치의 상서]
과거시험 문과 책문에 호패법 출제까지 한 것을 보면 호패법에 대해 세종이 관심이 매우 깊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사헌 이숙치가 이것을 알고 바로 상소를 올려 호패법 도입을 건의했다. 호패를 차는 것은 간사한 일을 막고 일정한 재산과 생업(항산,恒産)이 없는 자라도 떠돌지 못하게 하며 군역을 마쳐야 하는 사람들이 도망을 못 가게 하여 국가재정이 튼튼하고 군대가 충실해지는 법이라는 것이다. 세종은 생각해 보고 결정하자고 했다.
“경들의 말이 옳다. 그러나 가볍게 시행할 수 없다. 대신들과 상의한 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卿等之言善矣 然不可輕以擧行 當議諸大臣施行 : 세종 18년 6월 18일)”
세종도 의정부도 대사헌부 이숙치의 건의에 대해 움직임이 없자 사헌부가 나서서 호패도입을 임금께 독촉했다. 그러자 세종은 단호히 말했다.
“백성의 숫자는 당연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호패를 실시하면 분명
소요가 일어날 것이다. 올해 큰 재변을 당했으므로 당연히 안정을
취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씻어야 할 것이다.
(民數 固當所知 然號牌之行 民必搔擾 今當災變 宜當安靜
以消天譴 : 세종 18년 윤6월 1일)”
세종 18년은 최악의 가뭄이 있던 해였다. 또 동북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 김종서를 함길도로 내보냈던 해였다. 안팎으로 중대한 상황 하에서 호패법을가지고 갑론을박 토론할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세종은 단호히 거절했다.
VIII.4 호패법 재론과 최종 결단
세종 18년에서 세종 22년 까지 5년은 세종 재위 31년 6개월 중 가장 가뭄이 심했던 기간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생활도 어려웠고 또 떠도는 유민의 수도 많았다. 북방에서는 함길도 방면의 육진 건설과 연변 축성이 진행되고 있었고 남쪽에서도 끊임없이 왜구가 출몰하여 혼란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남북 양쪽에서 국가방어를 위해 필수병력의 수는 엄청나게 늘었지만 동원할 장정의 수는 거의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정부 부서 중에서도 병조가 호패법의 도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유도 병정의 감소 때문이었다. 도승지 김돈은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집현전 출신의 서생이었지만 도승지가 된 이후(세종 20년 6월 4일) 국방 문제에 관해 많이 듣고 모아온 터라 호패법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백성의 수는 늘고 있는데 병역 대상자는 늘어나지 않으니 호패법을 도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김돈이 물었다. 세종의 대답이다.
“나라가 승평한지 오래되어 백성의 숫자가 배나 되었음은 노비의 숫자나
나누어 줄 밭이 적음을 보면 알 수 있다. 호패법은 태종 때 요청이
있어 시행했던 법이나 한 대신이 폐지하기를 원하고 또 백성이 모두
싫어하므로 결국 그만 두었었다. 이번에 이 법을 다시 시행한다면 숨는
자와 빠지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지만 범법자가 많이 나올 것이다.
정치란 당연히 큰 것을 보고 해야지 그렇게 세밀하면 안 되는 것이다.
조정 신하들과 시험 삼아 한번 의논하여 보라.
(國家昇平久日 生齒之繁 倍於往昔 觀其奴婢之繁息 分田之不敷
則可知矣 此法在太宗朝 庶幾行之 以有一大臣獻議沮之 民亦皆不欲
固遂停之 今若復行此法 則必無隱漏者矣 然慮犯法者多也 爲治當擧其大體
不可如是其察察也 試與朝臣議之 : 세종 22년 2월 7일) ”
이 때 세종은 호패법의 목적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이 가져올 원치 않는 결과, 즉 백성들이 느낄 불안과 그로 인한 변조, 위조 및 그에 따라 발생 하는 범법자 문제 때문에 호패제를 망설였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세종은 늘 하던 것처럼 조야의 전, 현직 관리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해법을 찾아 제안해 줄 것을 호소하였지만 별다른 묘책은 없었다(세종 22년 2월 23일). 며칠 전 호패법을 건의한 김돈에게 확실하게 말했다.
“전날 호패법에 관해 올린 보고를 보았는데 내가 반드시 실행하지 않는
다는 것을 너는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前日所啓號牌之法 予必不行 爾其知之 : 세종 22년 3월 18일)”
세종의 확고한 의지를 알아 챈 김돈은 그러면 대신 인보법을 실시하자고 했다. 그리고 떠도는 사람을 숨겨준 자는 아예 압록강 여연 지역으로 옮겨버리면 처벌도 하면서 그쪽 인구부족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세종은 인보법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이렇게 말했다.
“유랑하는 것을 막고 군정의 수를 늘이는 방법을 상의하여 보고하라.
(流移禁防 軍額增益之策 其擬議以啓 : 세종 22년 3월18일)”
이후 간간이 혹 호패법을 주장하는 자가 있었으나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약 20여년 뒤 세조 4년(1458)에 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어떤 대책이 있느냐고 묻자 좌찬성 신숙주와 도승지 조석문 등이 호패법을 재추천했다. 세조는 바로 준비에 들어가 다음 해 세조 5년 2월 1일 최초로 호패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호패제도는 조선 왕조 내내 논란을 거듭하여 시행과 폐지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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