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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59>국가위기와 행정개혁 VII. 부민고소금지법(府民告訴禁止法)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2월17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4일 10시1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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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VII.1 부민고소금지법의 내용과 도입배경 

 

부민고소금지법(府民 혹은 部民 告訴禁止法)은 부민(府民), 즉 마을 사람들이 그 고을의 수령을 고소하지 못한다는 법이다. 이 법은 세종 2년 9월에 예조판서 허조의 건의에 따라 처음 도입되었으나 그 연원은 거슬러 올라간다. 태종 10년 4월 사간원이 시무 8조를 건의해 올렸는데 그 첫 번째 건의가 부민고소금지법을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태종 10년 사간원의 부민고소금지법]

 

사간원은 국가에 있어서 풍속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했다. 풍속은 국가의원기이므로 좋은 풍속을 위해 국가가 교화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당나라 태종 때에는 대문을 열어 놓고 살았으며 나그네가 양식을 들고 다니지 않았고 고려도 초기에는 풍속이 성했으나 말기에는 박해져 결국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제 새 나라의 기초가 닦여 풍속이 성해야 하는데 서울의 풍속이 얼마나 야박한지 나그네가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아 길에서 얼어 죽는 일이 발생하고 남을 비방하며 수령을 비방하는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올바르고 곧은 수령일수록 교활한 지방 토호들의 미움을 사 고소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며 용졸한 수령은 고소가 겁이나 바른 행정을 제대로 펴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간원은 다음 세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부민의 수령에 대한 고소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적(하적상,下賊上)으로 삼는 죄로, 다른 부민에 대한 고소를 ‘사감에 의해 타인을 해를 주는 죄(협사해인,挾私害人)’의 죄로 엄벌하도록 요청했다 ;

 

    (i) 간악한 사람을 증오하여 비분강개하여 직접 고소하는 경우, 

 

    (ii) 수령의 횡포를 혐오하여 사적인 감정 없이 고소하는 경우,

 

    (iii) 국가의 종묘사직에 관계되는 경우. 

 

이렇게 함으로써 경박한 풍속을 중후한 풍속으로 바꾸어 한 지역의 풍속이 도로 퍼져나가고, 한 도의 풍속이 나라 전체에 퍼지도록 하자는 것이었다(태종 10년  4월 8일). 이런 제안에 대해 의정부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수령의 나쁜 행위를 고소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간악한 수령 무리들을 징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듣고만 있었다. 이때 허조는 사헌부 집의로 있었으므로 사간원과 의견교환은 있었을 것이나 허조의 의견이 개입되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세종 대에 들어와 부민고소금지법 도입에 허조가 앞장선 것을 보면 주도적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허조의 부민고소금지법]

 

부민고소금지법의 주창자로 불리는 허조가 이 법을 처음 언급한 것은 세종이 즉위한 직후로 생각된다. 궁내에 연회가 있는 날 허조가 세종에게 다가와 고려 때 조익철, 이운, 기철과 같은 신하들이 보탑실리왕(충혜왕)을 원나라에 고발하여 잡혀가 죽게 되었어도 한 사람도 나서서 구원하는 자가 없었으니  풍속이 박하고 악하기 이를 데가 없음을 지적했다. 허조는 의리에 매우 투철한 사람이다. 고려가 망해 자신의 스승이 처형당했을 때 아무도 스승을 쳐다보지 않았지만 허조 혼자서 스승을 붙들고 통곡하며 시신을 장례까지 치러 준 사람이었다.   

 

그런 허조에게 지금과 같은 패악한 부민고소의 풍속은 하루빨리 금지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 세종은 박은에게 의견을 물었다.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찬성이었다. 유정현은 말없이 부정했다. 관찰사를 역임한 목진공은 적극 찬성이었다. 그러나 유정현이 반대하고 있는 참이라 세종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못하고 있었다. 세종 2년 9월 4일 태종이 측근들과 원경왕후의 묘의 석실 문제를 의논하던 중에 허조가 모자를 벗고 머리를 땅에 대고 말을 꺼냈다. 근래에 주현의 아전이나 백성들이 수령을 자꾸 고발하여 풍속이 심히 천박해지고 있으니 이를 금하지 않으면 장차 아내가 남편을, 아들은 아비를, 노비는 주인을 모해할 것이므로  법이 채택되기만 하면 자신은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라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자기가 문물을 흘리는 이유는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지금에야 드리게 된 것이 분통해 그런 것이라 설명했다. 분통한 일을 늦게 말하는 것은 경의 잘못이라고 말한 태종은 늦어진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허조는 의견일치를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답변했다. 태종은 허조의 생각에 동의했다(세종 2년 9월 4일). 

 

태종의 의사를 확인한 예조판서 허조가 며칠 뒤 정식으로 부민고소금지법을 세종에게 건의해 올렸다. “한 가닥의 불이 들판을 태우듯이(一星之火 至於燎原)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풍조를 금지하지 않으면 장차 부모가 자식을 거느릴 수 없고 임금이 신하를 거느릴 수가 없다”고 했다. 허조가 건의한 부민고소금지법의 내용은 두 가지였다 ;

 

   (i) 노비, 종으로써 주인을 고발하는 자는 고소를 받지도 말고 참수할 것, 

 

   (ii) 국가종사에 관계되거나 불법살인이 아닌 한, 

      하급관리로써 상급관리자를 고소하거나 주민으로써 

      수령과 감사를 고소하는 자는,

     

       - 고소의 내용이 사실이라도 고소는 기각하고 고소한 자는 

         장 백 대에 유 3천리에 처하며,

      

       - 고소의 내용이 거짓이면 더 가중하여 처벌한다.     

 

허조는 태종이 매우 아끼는 신하이고 또 이 안에 대해 태종이 긍정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세종은 즉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세종 2년 9월 13일).


VII.2 부민고소금지법의 1차 보완 : 풍문탄핵의 허용

 

초기에는 반대가 별로 없었으나 부민고소금지법이 실시되자 문제점이 점차 드러났다. 지방관들의 총체적인 비리가 만연했다는 점이다. 지방관들의 비리횡행이 부민고소법 때문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법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 특히 억울해도 고소할 방법이 없는 사람들은 부민고소금지법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법의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렇게 엄선하여 보낸 지방관들이 부정부패하고 형벌을 불공정하게 내려 민심을 거스르고 있다니 세종은 정말 답답했다. 도대체 인사를 담당하는 부서는 무엇을 한단 말인가. 사람만 잘 골라 뽑았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세종은 생각했다. 


[풍문탄핵의 허용]

 

인사문제의 최고 책임자인 좌의정 이원과 이조판서 허조는 사람 뽑는 일이야 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변명했다. 뭔가 보완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종이 물었다. 

 

   “수령의 범법 사실은 죄다 헌사(憲司)에서만 제기하고 감사는 한 사람도  

    수령의 죄를 제기하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守令犯法者 皆發於憲司 而   

    監司無一人上言守令之罪 何也 : 세종 5년 6월 23일)”

 

이유는 간단했다. 각 고을 사람이나 군현 아전들이 수령의 비위를 숨겨 주기도 하고 또 염탐꾼을 보내 감사의 행동을 감시하여 비위를 감추기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방법을 모색하던 세종이 대안을 내놓았다.  

 

    “이에 헌부에 명하여 풍문으로 탄핵하게 하여 순량(현명한 관리)을

     얻어 함께 백성을 다스리고자 한다.    

     (爰命憲府 風聞糾彈 庶得循良 共治黎庶 : 세종 5년 7월 3일)”

     

중앙에서 사헌부 관원을 지방 곳곳으로 보내 수령의 탐오나 가혹한 형벌을 일일이 탐문하여 처벌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조관에 명하여 주군을 두루 순찰하고 마을을 출입하여 대소 수령의

     뇌물수수와 가혹한 형벌을 모두 적발하고자 한다. 모든 춥고 배고픔으   

    로 고통받는 자와 원한을 품거나 억눌려 있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진   

    술함을 허용하고 나아가 파견한 사신이 풍문으로 고발하면 장차 내가   

   상세히 캐물어 볼 것이다.  (命朝官按行州郡 出入里閭 大小守令貪汚 酷    

   刑等事悉令發摘 一切民間飢寒 困苦與夫含怨負屈者 許以自陳 仍俾使臣    

   風聞啓達 予將詳加究問 : 세종 5년 7월 3일)”

 

세종의 이번 조치의 핵심은 ‘풍문탄핵(風聞彈劾)’의 허용이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 고소하는 나쁜 풍속을 예방하는 부민고소법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지방 관리의 부패와 부정을 없애는 방법은 중앙의 헌사를 지방으로 내려 보내 들은 사실, 즉 풍문을 근거로 처벌하겠다는 제도였다.   

  

[좌사간 유계문의 부민고소금지법 반대 상소]

 

경기도 교하현 하급서원 정을방은 수령 조만안이 국고를 남용하고 환상곡(빌려준 곡식을 되받음)을 과도하게 받아 착복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 이름으로 고소할 수는 없으므로 자기의 사노 두을언의 이름으로 수령을 고발했다. 이 고소대로 하면 교하현령 조만안은 부정한 뇌물수수죄, 즉 장죄(臟罪)를 범한 것이다. 살인죄는 사면에 해당되어도 장죄는 사면 대상에서 제외되므로 살인죄보다 더 악독한 범죄가 장죄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장죄를 범한 수령 조만안은 그냥 놔두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가장하여 고소한 정을방만 처벌하는 것은 형평성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또 앞으로 수령의 탐오를 징계하지도 못하니 민생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고소를 허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이 좌사간 유계문 상소내용이었다. 유계문은 우의정을 지낸 유관의 셋째 아들로 세종이 잘 알고 있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세종은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하고 일단 덮어 두었다.

 

[찰방의 지방 탐문과 비리 혐의 수령의 교체]    

  

수령들의 탐오와 형벌의 잔혹상을 적발하기 위해 지방으로 보낸 찰방들이 지방 곳곳의 비리, 탐오, 참혹한 형벌들을 풍문탄핵함에 따라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찰방이 고소한 수령의 직을 유지케 할 것인지 교체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허조는 죄가 가벼우면 경솔히 교체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세종은 교체하라고 지시했다(세종 7년 3월 24일).

 

이 조치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풍문에 의해 헌사가 고소를 제기하면 해당 수령은 판결 결과에 관계없이 즉각 교체되기 때문에 상당한 징벌적 효과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풍문탄핵과 함께 재판 중 수령 교체는 부민고소금지법이 지니고 있는 맹점, 즉 수령들의 무분별한 부정부패를 징계하고 예방하는 적절한 보완조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파견된 찰방들이 임금의 덕은 본받지 않고 가혹하게 숨은 일을 들추어내고 물의만 일으키게 되어 찰방파견제도는 사실상 폐지했다(세종 15년 7월 27일). 그러다가 세종 17년 예조의 건의로 민정에 정통하고 밝은 감찰을 보내어 지방 관원의 비리를 탐문하고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도록 건의하자 경기도에 한하여 이 제도를 다시 부활하였다(세종 17년 10월 5일). 

  


VII.3 부민고소금지법의 2차 보완 : 억울함은 고소하라.

 

시간이 흐를수록 세종의 생각은 허조의 부민고소금지법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깊어졌다. 찰방을 현지에 보내는 여부를 의논하던 중 그토록 부민고소법을 완강히 주장하던 허조가 ‘임금의 명이라면 찰방을 보낼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세종은 속으로 ‘찰방파견을 쉽게 인정하는 것을 보니 지론이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許政丞 輕易發言 似不持重:세종 28년 6월 18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부왕이 칭찬하던 허조에 대한 세종의 신뢰가 약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수령의 실정으로 인해 백성들이 너무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이었다. 국가풍속의 중요성 보다는 백성들이 겪고 있는 현실적인 고통과 억울함에 귀를 더 기울이게 된 것이다. ‘민유방본 본고방령’이라고 국정철학을 밝혔었는데 백성이 편안하지 않고서야 무슨 정치가 있다는 말인가. 백성의 억울함을 들어주기 위해 왕이 있는 것 아닌가. 세종이 말했다.

 

   “만약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고소를 못하게 하면 사람이 억울함을

    말 할 곳이 없어지니 자기의 절박한 사실을 호소하는 자의 고소는 

    받아주고 관리들에 관한 고소는 받아주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若禁卑下告訴尊上 則人之冤抑 無所伸矣 其告訴迫切於己者聽理 

    如訴官吏者勿聽 何如 : 세종 13년 1월 19일)”

 

그동안의 법은 내용을 불문하고 아래 사람은 윗사람을 고소하지 못하였으나 ‘자기의 억울한 사실’에 대해서는 고소를 허용하자는 것이 세종의 판단이다. 예조판서 신상과 형조판서 하연이 즉각 찬성하고 나섰다. 임금의 말씀이 정말 옳다(上敎誠然)고 말했다. 이조판서 허조만 반대했다. 또 풍속을 이유로 들었다. 세종은 단호하게 지적했다.

 

   “억울하고 눌린 것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어찌 정치의 도리인가.

    수령이 부민의 밭을 잘못 판결했는데 부민의 지적으로 잘못이 고쳐지면   

    그것이 어찌 고소인가. 불가피한 자기의 일이 아닌가. 만약 백성들의 

    고소를 들어준다면 수령의 잘못된 판결의 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죄는 이미 성립되었는데 다스리지 않는다면 징계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만약 그 수령의 죄를 다스린다면 그것은 또 고소를 허용한 것이 되니   

    마땅히 더 상세히 의논하여 지난 번 교지를 수정 보완하라.      

    (冤抑不伸 豈爲政之道乎 如守令誤決部民之田 部民又呈誤決改正 

    豈爲告訴乎 實自己不得已之事也 若許聽理 則守令誤決之罪 何以處之 

    罪名旣成而不治 則人無所懲 若治其罪 則是許其告訴 宜更詳議 

    以補前受敎之條 : 세종 13년 1월 19일)”  

 

허조는 이 조치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지신사 안숭선과 만난 자리에서 지금과 같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임금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실 거라고 까지 말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불경한 말이 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허조의 그 말을 인정한다고 했다. 다만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자는 뜻이지 아래가 위를 고소하는 것을 허용하자는 의도가 아님을 강조했다. 직접 허조를 불러 물었다.

 

   “내가 일찍이 생각하기를 경의 말이 매우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  

    의 억울한 바를 수리하지 않는 것은, 가령 수령이 자기 노비를 뺏어 남을 

   주었는데도 고소를 수리하지 않는 다면 그것이 옳은가. 백성이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임금이 없으면 내란이 일어나므로 결국 임금을 세워 다스리  

   게 했거늘 억울함을 수리하지 않는 것이 왜 통치체제에 해로움이 없다는  

   말인가. (予嘗思之 卿言甚善 至於自己所寃 悉令勿受 則假如守令 奪民奴婢 

   以與他人 更不受理可乎 民生有欲 無主乃亂 必立軍長而治之 不受訴冤 則  

   豈不害於治體 : 세종 13년 6월 20일)”

 

허조는 더 이상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논리에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 관리의 비리를 탐문하는 조관을 파견하는 문제에 대해 허조는 찬성했었다. 그런데 비리 탐문을 위한 조관 파견의 전례는 어디에도 없었다. 때문에 허조의 강력한 무기였던 ‘과거의 제도를 본받자.’라는 논리를 근거로 출발한 부민고소금지법에 역사적 근거가 없는 ‘조관 파견’이라는 내용을 포함한다는 것은 허조 논리의 자가당착인 것이다. 하여간에 예조판서 신상, 형조판서 정흠지, 대사헌 신개, 이조판서 권진 등 거의 모든 대신들이 세종의 편에 있었다. 이제 부민고소금지법 개정에 대한 합의는 거의 이루어질 참이었는데 세종이 새로운 문제를 들고 나왔다. 잘못된 판단을 내린 수령의 죄를 물을 것인가 묻지 않을 것인가가 궁금했다. 세종은 묻지 않기를 원했다. 

 

    “오결을 바로 잡은 다음에는 오결의 죄는 묻지 않는 게 어떨까. 

     (誤決改正後 勿論其罪何如 : 세종 13년 6월 20일)”

 

지신사 안숭선은 일단 잘못된 판결로 판명되면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잘못 판결해도 죄를 묻지 않는 줄 알면 의도적으로 잘못 판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세종은 좀 더 두고 보자고 했다. 2년 뒤 세종은 백성들이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한 고소는 들어주되 수령의 잘못됨이 드러나더라도 수령에게 죄를 주지 말자는 생각을 황희, 맹사성 등 조정 대신들에게 내려 보내 의논하도록 하였다(세종 15년 10월 20일). 모두 찬성했다. 이틀 뒤 세종은 이를 반포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고소장을 수리하고 올바르게

    판결하되 관리의 죄는 묻지 않아서 존비의 구분을 온전히 하고 또 낮은   

   사람이 윗사람을 고소하는 일이 이 법에 따라 없도록 하라. 

    (自今只受自己訴冤之狀 從正斷決 毋坐官吏 以全尊卑之分 

    其餘卑下告尊上防禁 一依 : 세종 15년 10월 24일) ”

 

 

VII.4 거듭되는 감찰 파견 요구

 

부민고소금지법에 대한 1,2차 보완이 끝나는 세종 16년부터 서서히 가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세종 17년과 18년은 21년, 22년과 함께 세종 시대의 최악의 가뭄기간이었다. 농사가 실패하고 경제가 어려울수록 수령들의 횡포와 비리는 악독해지고 백성들의 고통은 더 깊어지는 법이다. 곳곳에서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탐학을 비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동현감 곽순(郭珣)은 관료들의 부패상을 매우 적나라하게 지적하여 상소하고 있다. 그가 지적한 세 가지 병폐는 다음과 같다(세종 18년 7월 4일) ;

 

   (i) 용렬한 수령들이 탐학한 아전에게 속아서 조세와 부역이 고르지 못하     

   고 부자만 편들어 가난한 자는 멀리 유랑하므로 고을 백성의 수가 자    

   꾸 줄어들고 있으며,

 

   (ii)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백성을 위한다고 하고는 속으로는    

     탐심으로 가득 차 뇌물이 성행하고 공공 물자를 착복하고,

 

   (iii) 부도한 무리들이 부민고소금지법을 침탈의 도구로 악용하여 

       백성들이 침탈에서 벗어 날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육기법을 폐지하고 중국의 어사와 같이 지방을 감찰하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물론 조정에서도 행대(行臺)를 보내기는 하지만 두서너 달 동안 길에서 시간을 다 보낼 뿐이며 또 수령이 하고 있는 복잡한 현장 업무를 제대로 모르므로 효과적인 감찰이 되지도 않는다고 지적했다. 

     

비슷한 상소를 사간원도 올렸다. 한나라 순제가 지방행정을 바로 잡기 위해 두교 등 여덟 사람을 전국에 나누어 파견하였던 것 같이 우리도 조정 관리들 중에서 강직하고 청렴하며 유능한 사람을 불시에 전국으로 보내자고 재촉했다. 세종은 이런 요구에 대해 확실하게 반대했다. 

 

   “만약 자기가 간여된 것이 아니면서 비밀리에 수령의 과실을 고소하는

    자라면 과연 선한 사람의 소행일까 간악한 사람의 소행일까. 그의 말은  

    과연 모두 공정한 마음에서 나왔을까 아니면 역시 개인적인 분함에서 

    나왔기 때문에 거짓이 좀 들어있을까. 이 모든 것을 잘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임금이 이미 금하는 법을 세웠는데 또 사람을 보내 고소한 

    사람의 말을 들으라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법이냐. 임금이 대신과 상의

     하여 확정하였으니 어찌 하찮은 유생의 말을 듣고 다시 고치겠느냐.   

     (若不干於己 而密記守令過惡以訴者 果善人之所爲歟 抑奸人之所爲歟

     其所言之事 果皆實而出於至公歟 抑亦出於私忿而容有不實歟 是皆未

     可知也 又況人主旣入法禁防 又從而遣人聽訴 何等法也 且人主旣與 

     大臣商確定制 豈可聞小儒輩言 遽而變更之也 : 세종 19년 5월 20일)”  

 

감찰관을 보내어 지방의 비리를 수사함으로써 부정을 척결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었다. 충분히 근거가 있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감찰 파견에 반대했던 이유는 논리적인 문제였다. 지난 번 찰방을 보내 봤지만 별로 효과가 없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자기의 억울한 문제 외에는 지방관을 고소하지 못하게 해놓고는 또 다른 한편으로 관리를 보내 고소하게 한다면 이것은 자가당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충청도 도관찰사 이익박 뇌물 수수사건]

 

세종 25년 3월 1일 세종은 온양으로 행차했다. 이 때 충청도 관찰사 이익박은 임금을 수행하는 대소 관료들에게 쌀, 콩, 땔감과 같은 물자를 제공했다.더러는 요구를 받고 주기도 했지만 대개는 요청이 없어도 알아서 주었다. 수행 신하들도 온천 부근에 오래 묵어야 하므로 생활물자가 많이 필요했던 게 사실이었다. 수행 신하가 많고 또 주어야 할 물자도 여러 종류이므로 충청도 관찰사 아래에 있는 기록 담당 아전(營記官) 오유두가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를 줘야 한다는 내용이 적힌 기록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기관 오유두는 그 문서를 고향 사람 남타내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남타내는 적힌 내용을 금성대군(세종의 넷째 아들)에게 알렸고 금성대군은 그 사실을 다시 세종에게 전했다. 세종은 20여장이나 된다는 그 문서를 확보할 수 있는지 승정원에 물었다. 도승지 조서강은 아전이 가지고 있으니 어렵지 않을 것이라 대답했다. 전부 18장이 확보되었다. 서찰에는 대개 제사나 혹은 장례에 필요한 품목이 적혀 있었지만 세종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문건에는 없지만 훨씬 더 많은 물건을 노골적으로 받았을 것이며 받은 사람도 서찰 이외에 훨씬 많을 것으로 직감했다. 

 

   “그 서류의 글을 보니 모두 제사나 장례를 도와 달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어찌 다른 물건이 없었겠느냐. 또 받은 사람이 어찌 명단에 

    있는 사람들에 그쳤겠느냐. 내가 내시에게 들으니 받은 사람들이 

    파다하다더라. 만약 그냥 내버려두고 묻지 않으면 정말 안 되겠다. 

    (其書辭 皆請助哀祭奠等事也 豈無他贈與之物 且贈與之人 豈止此而己乎

    予親聞宦者受贈者頗多 若置而不問 則固不可也 : 세종 25년 3월 25일)” 

 

안 받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건이 매우 커질 조짐이 보였다. 받은 대로 처벌한다면 대소 신하 모두 죄를 받아야 할 형편이었다. 세종이 이 문제를 심각하다고 본 이유는 오유두가 남타내를 통해 서류를 준 것이 의도적이었는가 아니면 단순한 착오인가에 따라 상황이 180도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고의냐 우연이냐]

 

만약 고의로, 즉 물건을 요구한 사람들을 고소할 목적으로 서류를 넘겼다면 그것은 부민고소금지법에 바로 해당되어서 물건을 요구한 사람의 죄는 성립되지 않고 그 사실을 고소하려했던 오유두가 처벌받게 된다. 그러나 만약 아무런 의도가 없이 오유도의 실수로 문서를 보여 준 것이라면 오유두는 죄가 없고 대신 물건을 받은 전원이 중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세종은 후자로 보고 있었다. 오유두를 불러 왜 서류를 남타내에게 주었는지 물었다. 남타내가 감자를 쌀 종이가 필요하다고 해서 엉겁결에 주다 보니 그 서류를 주게 되었는데 나중에 잘못 준줄 알고 황급히 회수했다고 오유두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오유두에게 고의가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도승지 조서강은 고의가 있었다고 우겨댔다. 요구물건이 적힌 종이는 모두 구겨진 종이므로 감자를 쌀 종이로는 쓸 수 없는 종이인데 그걸 줬다면 달라는 종이가 아닌 종이를 준 셈이므로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꾸며댔다. 화가 난 세종의 말이다.

 

    “이번 행차는 모든 일에서 절약하려고 엄격한 규칙을 세웠는데 감사란    

    자가 몰래 물건을 보내었으니 매우 간교하구나. 파면 퇴출시킬

     생각이니 유의손이 감사직을 대행하고 따로 의금부제조를 임명하며

     사헌부장령으로 추궁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떤가.  

     (此行 凡事欲其省約 嚴立條章 監司潛相贈遺 大爲姦巧 

     予欲罷黜 以同副承旨柳義孫代行監司之任 別置義禁府提調 

     同司憲掌令推鞫 何如 : 세종 25년 3월 25일)”

  

주변의 신하들은 속으로 큰일이 났다 싶었다. 안 받은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우참찬 이숙치 부터 실토하고 나섰다. 자기가 거처할 곳에 충청도감사가 물건을 보냈기에 이미 다 써렸다고 자백했다. 도승지 조서강, 좌승지 이승손, 우승지 김조도 모두 따라서 자백했다. 세종이 너희들이 받은 것은 뇌물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누구하고 의논하느냐고 하면서 혐의쩍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의금부제조 신인손도 뇌물수수에 간여되어 있었으므로 책임수사관을 의금부제조가 아닌 병조판서 정연으로 제조를 삼았는데 정연 또한 자기의 종이 뇌물을 받았음을 실토했다. 다만 자기가 받은 것이 아니었고 또 돌려주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이 돌려주지 않은 것이라고 정연이 변명했다. 세종은 일단 정연을 용서하고 의금부제조직을 충실히 수행하라 명령하였다. 수사 결과 뇌물을 받은 사람이 매우 많았으나 나이 많은 공신들은 용서했다.

 

그러나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 승정원 관리는 엄하게 처벌하였다(세종 25년 3월 26일). 세종이 측근 승정원 신하들이 모두 뇌물에 연루된 것을 보고 처음에는 매우 놀랐으나 나중에는 웃었다고 말했다. 이틀 뒤 갇힌 사람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처음 신료들이 법을 위반하고 뇌물을 받았다고 할 때 매우 놀랐으나

     지금 그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소리를 듣고 내가 한바탕 웃었노라.

     (予初聞臣僚違禁受贈 至爲驚駭 今聞匪今伊始 付諸一哂 

     : 세종 25년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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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에 따랐으니 큰 벌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친척에게 줄 소금을 요구한 우승지 김조와 누이에게 말 먹일 풀을 달라고 한 우부승지 성봉조를 제외한 모든 관련자는 문책인사를 당하지 않았다. 조서강은 정 3품에서 참판(종2품)으로 승진했으며 이승손, 유의손, 강석덕은 품급에는 변동이 없으나 직책으로 승진했다. 충청도 관찰사 이익박도 지방관직을 마치고 형조참의로 들어왔다.  

 

 

VII.5 이계전의 상소와 행대감찰 파견

 

세종 재위 18년과 27년 사이의 10년은 가뭄 피해가 극심했다. 경제적으로도 핍박했고 공법 추진의 혼란과 전국적인 축성 공사로 민력도 매우 고갈되어 민심이 불안했다. 경중 안팎에서 국정쇄신과 민생 개혁 방안을 상소하는 글이 끊이지 않고 올라왔다. 그 ‘십 년 상소’의 출발을 영동군수 곽순이 시작했다면 마지막은 집현전 직제학(종3품) 이계전이 마무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계전은 두 번에 걸쳐 함길도 평안도 지방의 축성, 백성의 이주, 공법의 폐단, 형벌의 불공평 등 국정 전반에 걸친 난맥상을 지적하고 그 해법을 제시했는데 그 중에는 부민고소금지에 관련된 조항이 들어있다(세종 28년 5월 3일과 6월 18일). 

 

[이계전의 상소]

 

이계전이 올린 상소문 중에서 부민고소금지법에 관련된 부분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수령은 백성과 가까운 관원이므로 백성의 기쁨과 슬픔(휴척,休戚)이 그에게 달려 있습니다. 국가에서 육기법을 세운 이유도 수령이 그        직책에 오래 있어서 혜택이 백성에게 널리 미치게 하려고 한 것이었습  니다. 그러나 청렴공평한 사람은 드물고 용렬한 자는 매우 많아서 용렬  한 자가 요행이나 인연으로 자리를 오래 차지하고서는 못하는 일이 없  이 마음대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 재산  을 늘리는 것에 혈안이 되고 옆 관청과 뇌물을 주고받으니 이를 ‘손을 바꾼다(易手).’라고 하고 있습니다. 심한 자는 공공연히 관서 물건을 자기 집으로 가져가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감사는 이목에 한계가 있고 부민고소는 금지되어 있는데다가 탐욕스런 아전들은 치밀하게 가리고 꾸미고 속여 들키는 법이 없어 6년 동안 나라를 갉아먹고 백성들이 병드니 말을 할수록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 육기법과 부민법이 국법으로 정해졌으니 엎드려 바라옵니다. 특별히 사헌부 대신(臺臣)을 암행으로 예고 없이 보내시어 규찰하도록 하시면 비록 다 알아내지는 못하더라도 탐하고 횡포함이 어느 정도 그칠 것으로 생각합니다. 속담에 고양이 있는 집에 쥐가 마음대로 다니지 못한다(猫畜之家 鼠不肆行)고 하듯이 실상 이치가 있는 말이옵니다(세종 28년 5월 3일).”

  

이계전의 말은 하나하나 폐부를 찌르는 예리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확한 현실 파악과 높은 통찰력으로 문제점마다 정확하게 해법을 내놓았다. 특히 임금이 제안한 법이면 대신들이 반박을 하지 못하고, 대신이 제안한 법이면 그 아래 신하들이 비판하지 못하는 풍토이니 어찌 제대로 된 법이 나오겠느냐고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더구나 법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다 하더라도 그 법을 의논하는 사람이 당초 법을 만든 사람이라면 어떻게 다른 의견이 나올 수가 있느냐고 반문하였다. 대저 법이 처음에는 아름다운 것 같으나 시행해보면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므로 마땅히 여러 각도로 미리 생각해 본 후에 법을 만들어야 하고 만약 문제점이 드러나면 의논 후에 고치거나 폐지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의정 대신들은 ‘너무 거창하여 실행하기 어려운 말(광간,狂簡)’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계전 말에 숙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의 내용이 두려움을 준다고까지 표현했다.

 

   “최근 연속으로 심한 가뭄이 들어 백성이 안심하고 살지 못하니 

    사람의 일을 잘 못 하나 두렵다. 지금 축성에 공법에 입거까지

    하나하나가 다 대사인데 동시에 거행하다보니 어찌 원한이 없겠느냐.

    완급을 참작해서 백성이 원한을 갖지 않는 방법을 알아서 보고하라.   

    (近連歲旱荒民不聊生 恐有人事未盡 今之築城貢法入居 

    皆事之大者 一時竝擧 其間豈無怨者 斟酌緩急 民不致怨之術 

    磨勘以聞 : 세종 28년 5월 3일)”

 

한 달 뒤 세종은 다시 예조판서 김종서와 집현전 관리들을 불렀다. 세종은 부민고소금지법의 연혁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집현전이나 대간의 젊은 관리들이 그 내막을 잘 알아야 제대로 된 충언을 할 것 아니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히 수령의 부정을 감시하기 위해 찰방을 파견하는 것은 한 번 실패한 적도 있고 또 자가당착적이라서 재도입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세종은 지난 번 의논할 때 ‘행대가 너무 촉박하므로 실체를 얻기가 힘들다’는 말이 무슨 뜻이었냐고 김종서에게 물었다. 종서는 돌아오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뜻이라고 대답했다. 김종서는 행대감찰 파견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김종서는 감찰파견을 내심 찬성하고 있었다. 행대감찰을 망설이던 세종은 김종서마저 감찰파송에 찬성한다고 하자 생각을 바꾸었다. 

 

    “행대를 파견해 보내는 것을 다시 영을 내려 실시하라.

     (行臺發遣之事 更令磨鍊施行 : 세종 28년 6월 18일)”

 

다시 행대를 내보내 지방관의 비리와 백성의 고통을 수렴하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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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2월17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4일 10시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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