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58>국가위기와 행정개혁 VI. 지방행정 체계를 개편하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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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지방행정 체제는 고려 말기의 5도 양계와 주부군현 체제를 그대로 답습했다. 고려의 5도(서해도, 교주도, 양광도, 경상도, 전라도)는 태조 초기에 그대로 답습되다가 태조 3년 6월에 양광도가 충청도로, 서해도가 풍해도로, 교주도가 강원도로 바뀌었다. 그리고 경기좌도와 경기우도는 태종 2년 11월에 경기좌우도로 병합되었다가 태종 17년 12월에 다시 경기도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시대에 양계로 불리던 동북면과 서북면은 태종 13년에 동북면이 영길도, 서북면이 평안도로 되었다가 영길도가 태종 17년 12월 함길도로 되면서 8도 체제가 확립되었다.
비록 도(道)라는 행정 단위가 국가 다음으로 큰 지방행정 단위이기는 하지만 도는 국가차원의 관리의 편의를 위한 행정단위이지 행정의 주체성 혹은 독자성이 있는 단위로 보긴 어려운 점이 있다. 지방행정의 주체성이나 독자성에서 보면 그 아래에 있는 주, 부, 군 및 현이 더 독립적이고 실질적인 정치단위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고등법원이나 고등검찰청 보다 지방법원과 지방검찰청이 더 실질적인 사법행정의 주체인 것과 비슷하다. 지방행정체계의 개편 문제는 도 보다는 그 아래 주부군현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VI.1 지방행정 체계 개편의 필요성
[토호 견제의 필요성]
조선 초기 지방에는 중앙에서 파견되는 수령들이 있었지만 이들 보다 더 큰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조직은 지방 토호들이었다. 지방 토호들은 임내(任內)라고 하는 지역적 토대를 기반으로 하여 지방정치, 지방행정, 지방사법, 지방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수령과 맞먹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임내란 큰 주현(州縣)에 안에 있으면서 반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행정단위로써 속현(屬縣) 또는 그보다 더 작은 토착 지역단위인 향, 소, 부곡, 처, 장을 아우르는 말이다. 임내는 토호들의 주된 무대를 의미한다. 이러한 토호 세력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들의 영향력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중앙정치에 반발하고 나설 가능성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 토호들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임내, 즉 향, 부곡, 소와 같은 소규모 조직을 더 큰 행정단위로 병합함으로써 세력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중앙정치의 영향력 아래 그들을 묶어 둘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주군병합의 첫 번째 필요성이다.
[과도한 숫자의 지방행정 단위]
두 번째로는 소규모 지방행정단위가 너무 많음에 따라 행정의 비효율성이 매우 커졌다. 조선 초기 현의 수만 하더라도 151개였고 군과 도호부와 목을 합하면 총 223 개의 지방조직 단위가 있었으며 경국대전에 정해진 지방관직의 수는 330명에 달하였다. 따라서 주, 군현을 병합하여 수를 줄이지 않으면 수령 및 지방관을 임명하는데 큰 어려움을 피할 수가 없었다.
태종은 집권하고 나서 활발하게 지방 행정체계를 병합해 나갔다. 태종 5년에서 17년 까지 여러 지역이 병합되었는데 특히 태종 14년에만 40개 지역이 20개로 통합되었다. 태종 때 병합된 대표적인 지역이 용인(용구+처인, 태종 14년), 부안(부령+보안, 태종 14년) 해미(정해+여미, 태종 7년), 고양(고봉+덕양, 태종 13년), 창원(의창+회원, 태종 8년) 등이었다.
세종 대에 들어와서도 현의 병합은 이어졌다. 비옥과 안정이 합해져서 비안이 되었고(세종 5년) 청부현과 진보현이 합해서 청보군이 되었다가 송생현을 합하여 청송군이 되었다(세종 5년 10월). 또 해풍과 덕수를 통합하여 풍덕으로 하였고(세종 24년 6월) 신은과 협계를 합하여 신계로 만들었다(세종 27년 9월).
VI.2 수령(守令) 부족현상과 수령육기법
세종시대에 들어와 군현의 병합을 빠르게 진행한 데에는 또 다른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수령육기법에 따라 지방 수령의 공급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수령육기법 자체로만 본다면 수령의 공급에 변동이 생길 이유는 없다. 임기가 3년이든 6년이든 수령의 숫자는 항상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기법을 도입하면서 임기 절반 시점인 3년차에 일정한 평가점수(四中)를 받지 못하면 공직에서 완전히 탈락하게 한 제도가 지방수령의 공급을 크게 줄이는 요인이 된 것이다. 지방 수령직은 종5품(현령)이나 종6품(현감) 직이므로 주로 내시, 다방, 군녹사 등에서 퇴직한 하급관리자들이 수령으로 많이 제수되었는데 이들 상당수의 직무평가가 나쁘게 나와 수령직에서 퇴출되었기 때문에 수령의 공급이 모자랐던 것이다.
도승지 안숭선이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거대한 중국도 아홉 개 주 밖에 없는데 우리나라와 같이 작은 나라에 주군의 수가 327개이면 과도하게 많은 것이므로 한 편으로는 인재를 발굴 양성하되 다른 한 편으로는 주군의 병합을 통해서 자리를 줄이자는 생각이었다(세종 16년 11월 17일). 세종은 숭선의 생각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부왕 때에도 병합이 쉽지 않았던 것을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이다.
“내가 마땅히 대신들과 상의해서 결정하겠다. 그러나 주군합병은
이미 거행했어도 끝내 효과를 보지 못했으니 불가하다. (予當與大臣議而
定之 然郡縣合倂之事 曾己擧行 竟未見效 不可行也
: 세종 16년 11월 17일)”
다음날 세종은 궁금한 게 있었다. 고려 때에는 이조(吏曹)의 규정에 따라 퇴직한 하급관리로 지방 수령을 임명하였기 때문에 질이 낮고 용렬한 사람이 많았으나 지금은 매우 심사숙고하여 엄선해 뽑아 보내는데 왜 실적이 나빠 퇴출되는 수령이 많은가.
“태조께서 그 폐단을 없애고자 주군의 수를 한정하고 현능한 사람을
신중히 뽑아 보내다 보니 내시, 다방 퇴직자까지 이르렀는데 업적평가에
서 가장 낮은 자들이 모두 내시, 다방 퇴직자들이라니 이것이 무슨 까닭
인가.(太祖爰念此弊 先革支縣 定爲州郡之額 愼簡賢能以差遣之 至於內侍茶
房去官者 亦皆愼簡差任 然殿最之際 其在下列者 皆內侍茶房去官之人 是何
故也 : 세종 16년 11월 18일)”
황희가 나서서 말했다. 내시, 다방은 여러 가지 서무를 담당한 것이 아니고 궁궐에서의 소소한 심부름이나 혹은 차와 음식 준비 같은 잡무만 하다가 연한이 차서 퇴직한 것이므로 실제로 능력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라서 당연히 업무평가가 나쁘게 나올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중대한 문제였다. 수령육기법을 통해 지방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근본 목적이 무너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다음날 이조에 명하여 과거 자료를 뽑아와 보았다. 지난 십년 동안 132명의 내시다방 퇴직자가 수령으로 임명되어 나갔는데 이중에 중도에서 폄출된 자가 열 명 중에 팔, 구명이나 되었다. 깜짝 놀랐다. 뭔가 대책이 시급하다고 느꼈다. 이조에 이렇게 지시했다.
“갑진년(세종 6년,1424) 이후 내시와 다방 퇴직자로 수령에 배수된
자가 132명이었는데 이 중 폄출된 자가 십 중 팔 구명이었다. 이것은
임직에 오래 두게 하자는 뜻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실상은
번거롭게 보내고 맞이하여 백성에게 병폐가 됨이 어떻게 전과 다르냐.
그 폐단을 없앨 방법을 자세히 강구하여 보고하라.
(甲辰年以後成衆去官除授拜受令者 百有三十二人 罷軟貶黜者
十常八九 非惟有違久任之意 實煩迎送 民之受病 何異於前
其救弊之方 磨勘以聞 : 세종 16년 11월 19일)”
세종의 엄한 명령이 떨어지자 이조는 매우 당황했다. 수령의 선발과 임명과 인재양성의 임무를 관장하는 이조로써 이 문제의 모든 책임은 사실상 이조에게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육기법의 도입근거가 되었던 잦은 교체의 폐단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육기법 도입 자체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더 답답한 문제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점이었다. 한 가지 대안이 있다면 합병을 통해 주군을 줄여 수령의 수요를 줄이는 방법이 있다. 결국 이조는 세종에게 주군합병을 다시 추진하는 게 어떻겠냐고 건의했다. 세종이 허락하자 전국 감사에게 명하여 합병이 가능한 지역을 보고해 올리라고 명령했다(세종 17년 1월 28일).
VI.3 도관찰사의 주군병합 보고서
이조의 지시에 따라 각 도 감사는 도내 합병가능지역을 조사하여 보고했다.경기도에서는 여덟 개 지역을 네 곳으로 합병하고 한 지역(교하)는 나누어 인근 현에 귀속하기를 건의했고, 전라도는 여덟 개 지역을 네 개 현으로 합병할 것을 건의했다. 강원도는 두 지역을 병합하겠다고 보고했다. 이조의 주군병합 지시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경기도와 전라도가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경기도와 전라도에서 합병이 가능하다고 한 지역은 대부분이 태종 14년에 병합되었다가 곧 원상대로 복귀했던 지역일 뿐 새로운 지역은 별로 없었다. 사실상 신규 병합지역은 하나도 없는 셈이었다. 그리고 경기도의 경우에도 지시가 그러하니까 할 수 없이 병합가능 지역을 보고하기는 했지만 가능하면 그대로 두자는 의견을 첨부했다. 경상도와 충청도는 민심이 매우 불만임을 지적하며 노골적으로 병합을 반대하고 나섰다.
[감사들의 반대]
먼저 충청도 감사 남지는 주군 합병의 소문을 듣고 주민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고 했다. 특히 지역이 작아서 다른 현으로 통합되는 작은 현의 소속 아전이나 관노비들은 직장을 잃거나 집을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은 물론 조상의 분묘도 옮겨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에 더해 창고나 관사를 증축하거나 옮기는 폐해가 클 것이라고 걱정했다.
아전과 관노비는 물론 주민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다. 새로 통합되는 현의 중심지, 즉 주읍(主邑)은 일반적으로 통합되기 이전의 큰 현의 주읍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흡수되는 소현의 주읍은 행정 중심으로써의 주읍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며 이에 따라 경제적 손실을 입음은 물론 행정 처리를 위해 먼 곳으로 가야하는 불편함을 피할 수 없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이 문제는 주읍의 위치를 새로 통합된 현의 제3의 읍으로 설정하더라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양 현의 주읍 거주자들이 모두 반대하고 나설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경기도 감사 성개는 지역이 넓어지고 관할 백성의 수가 증가하면 수령의 징세, 요역, 송사 등 업무가 크게 늘어날 것이고 또 아무리 용렬하다고 해도 수령업무를 못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냥 예전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건의했다. 경상도 감사 김효정의 의견도 같았다. 이미 백성들이 편안히살아온 지 오래 되었는데 단지 인재 부족을 이유로 통합함으로써 백성이 흩어지고 불편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VI.4 풍년을 기다리라(당대풍년,當待豐年).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감사들의 부정적인 태도에 이조도 놀랐고 세종도 당황했다. 게다가 가뭄이 너무 심해 주군병합 문제를 의논할 형편도 되지 못했고 또 곳곳에서 병합논의를 중지하자는 상소도 있고 해서 일단 미루기로 했었다. 가을 추수가 끝이 날 무렵 세종이 이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주군병합의 이해에 대해 분분하게 말이 많아 아직 결정하지 못했으나
만약 깊이 이해를 알고 있다면 대의를 위해 당연히 결단을 내리면 될
일이지 어찌 아전이나 백성의 주장을 듣겠다는 말인가.
(州郡幷合利害 紛紜未能決 若深知利害 則當斷大義 豈可聽人吏之說乎
: 세종 17년 9월 16일)”
세종은 감사들의 의견에 못마땅했다. 첫째로 주군병합의 진정한 이익을 알고 있기는 하냐는 핀잔이 깔려 있었고 두 번째로는 대의를 좇으면 되지 무슨 아전이나 길거리 백성들의 말을 내세워 그 뒤에 숨느냐는 것이었다. 판원사 허조와 대사헌 이숙치가 나서며 말했다. 주군병합이 진실로 백성에게 이득이 됨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이해가 걸려 반대하고 버티는 것이라 설명했다. 세종이 마침내 끄덕이며 말했다.
“옛 것을 집착하고 새 것을 싫어하는 것은 평민의 평상시 태도이다.
또 이 일은 대사라 가볍게 결정할 수 없다. 풍년을 기다려야 하겠다.
(守舊厭新 小民常態 且如此大事 未可輕擧 當待豐年
: 세종 17년 9월 16일)”
결국 주군병합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몇 개의 주를 그 지역 임내의 요청에 따라 합병했을 뿐이었다.
VI.5 주군병합의 실패 이유
주군병합이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백성의 반대여론이었다. 주군병합의 명분도 있고 대의도 있었다. 백성들을 직접 관리 감독하는 수령들이 제대로 행정을 하려면 유능한 인재가 오래 재임을 해야 하는 데 그런 대의를 위해서는 주군병합이 필요했다. 그리고 과도한 조직과 인원을 줄이고 잦은 관리의 교체에 따른 번잡함을 줄인다는 명분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대의라면 어떤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관철시켰던 세종이 아니었던가. 육기법에서도 그랬고 부민고소금지법에서도 그랬다. 그런 세종이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무슨 이유일까. 두 가지 원인을 지적할 수 있다.
[속현의 반발]
하나는 속현의 반발이 거셌다는 점이다. 속현이란 흡수를 하는 쪽이 아니라 흡수를 당하는 현이다. 합병하는 경우 반드시 합병의 주체가 되는 큰 현과 합병을 당하는 작은 현(또는 임내나 향, 부곡, 소, 장, 처와 같은 행정단위)이 있게 되는데 이들 흡수되는 쪽에서는 모든 권한이나 영향력을 잃게 되는 것이 반대의 주된 이유였다. 특히 흡수되는 속현에 딸려있던 아전들은 자기의 영향력의 근거를 다 잃음은 물론 직장을 잃거나 아니면 거주지를 주읍으로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컸으므로 결사코 반대했던 것이다.
실제로 경남 곤명현의 경우 고려 현종 때 진주 임내로 병합되었는데 이로 인해 곤명이 진주에 의해 심한 피해를 당했으므로(侵暴) 불만이 많았다. 이에 경상도 감사 신상이 보고를 올려 곤명을 진주가 아니라 남해에 합치자고 제안했다. 곤명은 세종의 태실이 안치된 곳이라 행정지위를 격상할 필요도 있었다. 세종이 말했다.
“지도의 형세를 보면 곤명은 당연히 남해에 붙여야 한다. 그러나 곤명을
떼어서 남해에 붙이면 진주 사람들은 반드시 억울하다 할 텐데
어떻게 할 것인가. (以勢觀之 昆明當合南海 然奪昆明與南海 則晉州必
訴冤 奈何 : 세종 1년 3월 27일)”
호조판서 권진과 공조판서 이적이 묘안을 생각해 냈다. 세종의 태가 안치된 지역이라고 해서 진주를 목에서 대도호부로 승격시켜 주자는 것이다. 그러나 원숙은 그럴 것 없다고 했다. 임금의 태가 안치된 곳인데다 수 백호 가옥을 진주에서 떼어 낸다하더라도 큰 탈 없을 것이며 무엇보다 곤명사람들이 침탈 당하고 있다하니 남해와 붙여서 곤남군으로 하자고 했다. 사실 진주는 태조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태종 방간에 의해 피살된 방석의 모)의 고향이라서 태조 원년(1392)에 진양도호부로 승격시켜 주었으나 태종이 즉위하자마자 진주목으로 다시 격하시켰던 곳이다(태종 2년 12월 16일). 따라서 부왕이 목으로 격하시킨 진주를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남해와 합해서 곤남군으로 만들었던 것이다(세종 1년 3월 27일).
[월경처와 견아상입지의 반대]
주군합병 반대의 또 다른 이유는 월경처(越境處)와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의 존재였다. 월경처란 말 그대로 소속은 군(혹은 현)에 소속되어 있으나 실재 소재지는 군(혹은 현)의 경계 바깥에 존재하는 땅을 말한다. 예를 들면 충청도 단양군은 경상도 땅 순흥 임내 하곡소에 월경처를 갖고 있었고 충청도 회덕현은 유성의 동촌 낭산리에 월경처로 갖고 있었다.
월경처가 발생하게 된 연유는 매우 다양하나 본 군현에 없어서는 안 되는 대단히 중요한 토지였다. 때로는 해산물과 소금과 같은 특산물 공급을 위해 혹은 목장의 용도 등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경제적 가치가 있는 땅이었다. 따라서 합병을 통해 타 군현으로 소속된다는 것은 영토를 빼앗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므로 극렬한 병합반대의 근원이 되었다.
견아상입지도 월경처와 거의 같았다. 견아상입지란 한 군현의 영토가 개 이빨(견아,犬牙)처럼 다른 지역을 뚫고 들어간 형태의 지역을 말한다. 예를 들어 경기도 광주목의 행정구역은 서쪽으로 85리 길게 뻗어 바닷가(성곶)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광주목이 이런 견아상입지가 필요한 것은 바로 바닷가 물산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러한 견아상입지를 다른 군현에 할양한다는 것은 본군의 경제적 필요에서 볼 때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주군합병에 대해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선왕의 실패]
속현의 반발과 월경처나 견아상입지와 같은 현실적인 이유에 따른 반대가 주군합병의 중요한 원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원인은 태조와 부왕도 쉽게 성공하지 못했다는 세종의 선입견이었다. 부왕의 조치나 결단은 쉽게 고칠 수 없다는 말을 세종은 여러 번 했었다. 그리고 주군합병문제가 처음 제기되었을 때에도 그 부분을 언급했었다. 따라서 백성들이 합병에 흔쾌히 동의한다면 몰라도 여론도 반대고 부왕도 성공하지 못한 것이라면 굳이 무리해서 일을 성사시킬 생각은 아예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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